특집 - 이석우 시문학파기념관장이 말하는 「영랑 김윤식과 안귀련〉김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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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이석우 시문학파기념관장이 말하는 「영랑 김윤식과 안귀련〉김귀연」
  • 장강뉴스
  • 승인 2024.08.05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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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과 강진, 그리고 1930년대 시문학
영랑 김윤식 시인
영랑 김윤식 시인

 

영랑 김윤식 시인은 1903년 1월 16일 전남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에서 부친 김종호와 모친 김해김씨 사이 탑골마을의 북산 아래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영랑의 부친 김종호는 5백 석을 거두어들이는 강진군의 대지주로써 경제적으로 상당한 여유가 있는 유지였다.

영랑생가-봄
영랑생가-봄

 

이렇듯 영랑의 시심이 뿌리를 내린 전남 강진의 영랑생가, 본채와 사랑채 사이 앞 뜨락에는“모란이 피기까지는” 시비가 찬란한 봄을 기다리며 또 기다리며 슬퍼할 뿐이다.

영랑은 강진에서 5백석 지주에 5남 2녀 중 장남으로 임자생(1903년 1월 16일)인지라 늘 상 나이 불리기를 좋아하여 굳이 음력을 고집했다.

집안에는 한학을 공부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그가 강진보통학교를 거쳐 소년의 부푼 꿈을 안고 상경한 것이 불과 14세 나이 1916년일 이다.

영랑 김윤식 시인 휘문의숙 재학시절
영랑 김윤식 시인 휘문의숙 재학시절

 

부친은 무척 완고하였으며 객지로 나가는 자식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으나 모친의 경제적 도움으로 우선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듬해 1917년 휘문의숙(현, 휘문고)에 입학하여 이를 계기로 영랑의 시심이 자라났을 법하다. 1919년 3.1운동이 서울에서 일어나자 3학년에 재학 중인 영랑은 학업을 중단하고 구두 안창에 독립선언문을 숨기고 강진으로 내려와 3월 23일 밤 독립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경찰에 사전에 발각되어 6개월간의 대구 형무소에서 나라를 빼앗긴 민족으로써의 뼈아픈 설움을 체험했다.

영랑 김윤식 시인
영랑 김윤식 시인

 

영랑시인은 1916년 김해김씨 김은초 씨와 결혼 1년여 만에 부인을 여의었는데, 아직 청년으로 굳어지지 않은 가슴은 잃은 자의 비애로 멍들대로 멍들어 있었다.

1920년 일본 청산학원 중등부에 편입해서도 혁명가 박열과 같은 방에서 하숙하며 투사적 기질을 폭발할 기회는 다시 한 번 있었으나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성악공부를 하려다 부친의 반대로 학자금 지원 송금이 지원되지 않자, 청산학원 영문과를 택한 것이 시인으로서의 대성의 기반을 닦는 데 도움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영랑 김윤식 시인-1949년 12월 14일 서울 경회루에서
영랑 김윤식 시인-1949년 12월 14일 서울 경회루에서

 

영랑은 그때부터 시를 쓰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청산학원 수학과에 재학 중인 용아 박용철에게 시를 쓸 것을 권유했다. 강진 본가에는 서울에서 온 교사 마재경이라는 여인이 하숙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무용가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의 처재였던 것이다.

영랑은 고향에 돌아와서 최승일과도 잘 아는 처지였으므로 마 여인과도 가까이 지낼 수가 있었다. 그사이 영랑과 마 여인의 관계는 꽤 깊은 관계까지는 알 수는 없으나 마 여인도 얼마 후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하는데 그 뒷일은 수수께끼로 남았다.

영랑 김윤식 시인-1950년 4월 1일 서울 근교에서
영랑 김윤식 시인-1950년 4월 1일 서울 근교에서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 강진으로 돌아왔다. 또 이 무렵 최승희 씨와도 열애에 빠져 결혼 직전까지 갔으나 영랑 부친의 반대로 맺지 못한 사랑이 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20세 청춘을 아픈 상처로 보내던 영랑은 개성 호수돈 출신 20세 규수 안귀련과 결혼을하게 된다.

당시 그가 울적한 심사를 달랠 길 없을 때는 광주 송정리에 사는 용아 박용철에게 편지를 띄우고 그것도 안타까우면 용아 박용철에게 찾아가 둘은 산천을 두루 돌아보았다.

영랑 김윤식 시인 - 시문학 창립기념사진
영랑 김윤식 시인 - 시문학 창립기념사진

 

영랑은 소년 시절에도 축구선수라는 관록을 지니고 있었지만, 연식정구에도 뛰어난 재질과 실력을 갖추고 있어 강진군내에서도 으뜸가는 스포츠맨이었다. 사랑채 옆 연식 정구장에는 이제는 잔디광장으로 뒤바뀌었지만, 그의 취미는 다양하였고 사랑채에는 시집, 소설과 함께 서양 명곡 레코드판이 하루하루 늘어났고 서울에 음악회가 있을시 지체없이 천릿길을 하루 꼬박 열차를 타고 달려갔다.

영랑생가-가을
영랑생가-가을

 

마침내 영랑의 서정시가 세상에 뿌려진 것은 1930년 3월 5일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등 동인이 되어 내놓은 창간지「시문학」으로부터 시작된다. 2호에 그해 5월 변영로, 김현구가 참여하고 신석정, 허보가 참여, 3호 발행 후 「시문학」은 종간을 하였다.

아홉 시인 중 유일하게 강진 출신인 김현구 시인(1904. 11. 30.~1950. 10. 3)은 항렬이 영랑의 조카뻘이 된다. 영랑의 추천으로 시문학 2호에 「님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렇습니다」 「물위에 뜬 갈매기」 등 4편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온 현구는 그「문예월간」과 「문학」지를 통해 1934년까지 8편의 시를 더 발표하였다.

영랑생가-겨울
영랑생가-겨울

 

1949년 공보처 출판국장으로 있던 영랑에게 시집 발간을 의뢰하였으나 6.25가 터지자 또 좌절되었다.

그 후 1970년에 아들「원배」씨 등에 의해 「현구시집」(유고 70편, 발표작12편 등 총 82편 수록)이 비매품으로 출판되었다. 이 시집을 계기로 현구시집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영랑의 시작품은 「시문학」지에 29편 「문학」지에 8편이 발표되었다. 영랑은 처음부터 사행소곡이라는 짧은 시를 많이 썼는데 오늘날 그것은 하나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1935년 박용철의 후원으로 영랑시집을 만들고 그의 능력을 확고하게 만들었다. 영랑은 모란이 필무렵에 맞춰 해마다 생가 사랑채에서 전국의 유명 문인들과 문인 지망생들을 초청하여 시 창작대회를 열었다고 전해진다.

1930년대 초 어느 봄날 열렸던 창작대회에서 영랑 사랑채에 에워싸듯 화려하게 핀 모란을 보며 시 한 편을 썼다. 하지만 그 시가 마음에 안 들었던지 공개도 하기 전에 시를 쓴 종이를 비벼 쓰레기통에 던지려 했다.

영랑 김윤식 시인
영랑 김윤식 시인

 

이를 본 선배 춘원 이광수 선배께서 “그걸 왜? 버려” 하고는 종이를 빼앗아 읽어보니 깜짝 놀랄만한 대작이 아닌가! 그 자리에서 춘원은 그 시를 크게 낭송을 하여 만장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명시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1948년 강진지역에서도 좌익세역의 활동이 활발해서 우익 인사들을 기습, 살해하는 사건 등이 빈번했다. 경찰은 방화사건을 예방할 수가 없으므로 24시간 청년 단원들을 집 주변에 배치하지만, 경찰은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한다.

결국, 영랑은 신변 안전에 불안감을 갖게 되어 마침내 서울로 이주하기로 결심하고 전 재산을 헐값에 정리하고 9월 서울 신당동으로 부인과 함께 이사를 하였다.

그해 「영랑시선」을 출간하였고 영랑선생은 조국해방이 이루어 질 때까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및 삭발령까지 거부한 채 흠결없는 대 조선인으로 외롭고 의롭게 살았다.

해방되자 영랑은 새 조국 재건사업에 일익을 담당하기로 마음을 먹고 초대 제헌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영랑은 군/면민들의 민심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

영랑 김윤식 시인 부친 김종호 기념비(1911년 강진군 칠량면사무소 내에 세워줌)
영랑 김윤식 시인 부친 김종호 기념비(1911년 강진군 칠량면사무소 내에 세워줌)

 

서울에서 친척이 자가용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자가용으로 군/면민을 만나 선거운동을 하였다. 그게 잘못된 생각이었고 농민의 민심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영랑은 후보 4명이 출마하였는데 낙선하고 말았다. 광복 후 신생 정부에 참여해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냈던 그는 1950년 9월 29일 서울 자택에서 47세 일기로 타계하였다.

9월 28일 서울 시내 신당동 지인 집에 깊숙이 날아든 파편으로 중상을 입은 영랑은 전쟁에 동원된 탓으로 외과 의사를 찾을 수가 없었다. 겨우 한 분을 찾은 게 내과 의사였다. 28일 입원한 영랑은 결국 복막염으로 9월 29일 오후 1시 운명하였다 6·25전쟁 중이라 가족끼리 장례절차 없이 자택 가까운 한남동 남산 가까운 남산 기슭에 임시로 가매장 1954년 남하했던 문인들이 상경하자 시인 김광섭 평론가 이헌구 등이 주도하여「장충공원」광장에서 문인장을 치른 후 당시 망우리묘역으로 이장했다.

유족은 1989년 안귀련 여사가 돌아가시자「천주교 용인 추모공원」묘원으로 유족은 영랑을 다음 해(1990)부인 곁으로 모셨다.

영랑 김윤식 시인을 망우역사 문화공원으로 이장을 하면서

2024년 6월 18일(화) 영랑 김윤식 시인의 묘지를 천주교 용인추모공원묘원에서 파묘하여 용인평원숲 나래원 화장터에서 화장하였다.

전, 용인천주교 공원묘원(전, 영랑 김윤식 시인, 부인 안귀련 여사 묘지)
전, 용인천주교 공원묘원(전, 영랑 김윤식 시인, 부인 안귀련 여사 묘지)

 

망우리 공동묘지에서 천주교 용인묘원에 이장한지 34년만이다. 천주교용인공원묘원에서 파묘를 하고 나래원화장터에 서류를 안귀련으로 보냈다. 처인구청 발행허가서에는 김귀연으로 되어있다.

화장터 관리담당자는 성씨가 바뀐 확인서류이기에 화장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당시 안귀련의 어머니가 귀련의 어릴적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재가하였다.

재가한 집이 김씨 성을 쓴 집이었다. 안귀련에서 김귀연으로 성을 바꿔 호적에 올릴 수밖에 없었다. 영랑은 돌아가실 즈음에 자신의 소원을 자식들에게 밝혔다.

그래서 자식들이 비석에 김귀연이 아니라 원래 이름 ‘안귀련’으로 새겼다.

2024년 6월 19일 영랑 김윤식 시인과 부인 안귀련 여사의 막내딸 김애란 여사)
2024년 6월 19일 영랑 김윤식 시인과 부인 안귀련 여사의 막내딸 김애란 여사)

 

개성 호수돈여고 졸업하고 산 넘고 물 건너 살아가는 팔자라 천 리 먼 길 호야 불을 쓰는 강진으로 시집을 왔다. 그것도 꼬마 신랑으로 첫 번째 부인을 병으로 잃은 홀아비와 결혼을 하였다.

「영랑시인」의 묘 재이장은 과거 나무 한 그루 없이 허허 민둥산에 묘이지만 망우리 공동묘지에서 타 지로 이장한 시인 김동명, 동요 ‘우리나라 꽃’의 작곡가 함이영, 영화 ‘아리랑’의 영화감독 춘사 나운규, ‘우리의 소원’ 작사가이자 삽화가인 안석영 등 유명 인사들이 묘를 이제 수목이 울창하여 아름답게 재탄생한 ‘망우역사공원’으로 복원을 다시 기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날로 급증하는 관광객 수 급증에도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기대가 크다는 것이다.

김영랑 시인 묘 재이장으로 대한민국 근현대사 박물관으로써 ‘망우역사문화공원’ 아우라와 함께 방문객 수 증가에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생애 87편의 시와 번역본 3편을 남겼으며 정부에서 2008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현재 영랑생가는 1948년 영랑시인이 서울로 이사한 후 몇 차례 전매되었으나 1985년 12월 강진군이 매입하여 1986년 2월 전라남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2007년 10월 국가지정 문화재로 승격되었다.

이석우 강진시문학파 기념관
이석우 강진시문학파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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