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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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18〉
  • 장강뉴스
  • 승인 2022.05.1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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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1월 경찰은 대덕국민학교 선생 조정순을 왜 죽였을까

장흥군은 현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따라 한국전쟁 전후 장흥에서 벌어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 조사·기록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조사에 따라 진실규명신청서를 작성하여 관계 기관에 접수한다. 이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사)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은 본지 지면에 이 아픈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

천관산 아래 대덕읍 연지리 오산마을 전경-사진 마동욱
천관산 아래 대덕읍 연지리 오산마을 전경-사진 마동욱

 

1950년 11월 경찰은 대덕국민학교 선생 조정순을 왜 죽였을까

-대덕 오산마을 조씨 삼 형제가 죽은 이유는-

“어째 이런 일이 있으까. 살아온 일을 생각헝께 아침부터 무단히 눈물이 나서...”

대덕읍 내저마을에 사는 조순자(1949년생) 할머니는 짓무른 눈자위를 연신 닦아내며 말을 잇지 못했다.

대덕 앞바다는 이미 초봄의 칼바람을 거두고 길모퉁이 작약 봉오리들에 따순 햇살을 넉넉히 안겨주는데 그녀에겐 어떤 역사의 한파가 그리 깊고 시려 눈물 바람을 거두지 못하는 것일까.

“아무 죄도 없는디 경찰들이... (내가) 돌도 안 넘어서 돌아가싰어. 나는 아부지 얼굴도 몰르요. 오산서 살았는디 천관산 아래 청다리 거그 논이 서마지기 생기서 나락을 심었답디다. 큰 아부지랑 아침묵고 논에 나락 지러 가시갖고, 엄니가 꿈자리가 이상타고 가지 말라캤다는디...”

조정순 국민증(1950년)
조정순 국민증(1950년)

 

대덕면 연지리 오산마을에 살았던 조순자 씨의 아버지 조인철(1928년생)은 형 조봉래(1920년생)와 함께 마을 청다리 인근 산배미에 추수한 나락을 지러 갔다가 경찰에게 사살 당했다. 그날 근처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같은 마을 사람 김안심(1938년생)은 70년 이상이 지났어도 그날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13살인가 묵었는디 엄니가 일찍 돌아 가시서 내가 밭일을 다 했제. 우리 밭이 청다리 근처에 있어서 내가 풀을 뽑고 있었는디 시꺼먼 옷을 입은 경찰 여럿이 저 밑에서 막 올라오는 것이여. 그라는디 좀 있다가 쩌그 논에서 총소리가 탕탕 나드만 무서버서 내가 숨어갖고 요래 보니께 사람이 엎어졌는디 대님 맨 흰 조선옷 바지자락이 보이드랑케”

김안심 씨는 나중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자신도 시신 가까이 가보니 평소 잘 아는 마을 사람임을 알게 됐고, 얼마 후 조인철 씨의 가족들이 울면서 시신을 확인하러 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조정순 대덕인민학교 신분증명서(1950년)
조정순 대덕인민학교 신분증명서(1950년)

 

지금도 오산마을에서 살고 있는 김안심 씨는 핀엿을 만들어 장에 내다 파는 일을 하는데 장터에서 조순자 씨를 우연히 만나 그녀와 그녀의 부모에 대한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고 한다. “내가 쪼깐할 때 니를 업어주고 그랬어. 느 아부지도 엄니도 사람이 순하고 아담하니 이삤어. 느 엄니는 재가를 했단 얘기는 들었는디 어째 다른 자슥은 없고 딸 하나만 키운다고...”

22살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조순자 씨의 어머니는 몇 년간 친정집 신세를 지다가 그것도 여의치 않아 혼자 장터 근처에서 장사하며 어린 딸을 데리고 억척같이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어머니는 재가했는데 새아버지와 그다지 화목하게 지내지 못한 조순자 씨는 그 모든 힘든 세월이 아버지의 죽음에서 비롯되어 더 설움이 복받치는 듯했다.

조정순 씨 목포사범학교 졸업증서
조정순 씨 목포사범학교 졸업증서

 

그런 회한은 비단 그녀만의 것은 아니었다. 같은 날 같은 현장에서 사망한 큰아버지의 아들 조상현 씨는 눈물 대신 쓴 소주잔을 털어 넣으며 녹녹치 않았을 시간들을 삼키고 있었다. 남편이 그렇게 비명에 간 후 조상현씨의 어머니는 자식들을 남겨두고 재가를 했고 그는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고 했다. 그러나 할머니 역시 멀쩡하던 아들 둘을 한꺼번에 잃고 나서 정신적 충격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 테니 혼이 반쯤 나가버린 사람처럼 되었다고 했다.

경찰에 의해 조인철 형제가 사살당한 사건은 인민군이 한차례 내려왔다가 국군이 다시 수복을 한 1950년 10월 31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당시는 산사람(빨치산)으로 오인 받은 민간인들이 경찰들에게 억울하게 죽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다. 그래서 후일 어머니에게 얘기만 전해 들은 조순자 씨도 어린 나이에 현장을 목격한 김안심 씨도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경찰을 피해 숨다가 억울하게 당한 일로만 알고 있었다.

목포사범학교 재학시절 조정순(뒷 줄 맨 오른쪽 1949년)
목포사범학교 재학시절 조정순(뒷 줄 맨 오른쪽 1949년)

 

그러나 사건의 전말은 우연한 불행이 아니라 경찰에 의해 의도되고 계획된 학살이었다는 것이 곧 밝혀졌다. 조순자와 조상현에게는 조대근(1901년생)이라는 작은할아버지가 계셨는데 인공시절 잠시 대덕면 서기를 지낸 이력이 있었다.

당시 경찰은 사실 조대근을 잡으려고 그곳을 들이닥친 것이었으나 당사자는 이미 딸 집으로 피신을 간 상태였다. 그래서 상관없는 다른 일가친척을 대신 사살한 것이었다. 이른바 ‘대살代殺’이었다.

그리고 불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조대근에게는 아들 조정순(1927년생)이 있었는데 10월 31일 조인철 형제가 사살당하고 두어 주가 지난 11월 11일 그 역시 경찰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대덕국민학교 23회 졸업사진(1949년)
대덕국민학교 23회 졸업사진(1949년)

 

조정순의 막내 여동생 조연심(1933년생)의 진술에 의하면 1950년 가을 추수가 끝난 시점 장흥경찰서 대덕지서 경관들이 집에 찾아와 오빠 조정순을 끌고 가려고 했다고 한다.

그 사실을 들은 조정순의 매형 박일동은 관산 남송리에서 급히 달려와 경찰과 실랑이를 벌였는데, 경찰은 잠시 얘기만 나누다 돌려보내겠다고 하면서 조정순을 데려갔다고 한다.

경찰은 그렇게 끌고 간 조정순을 조대근의 소유였던 오산마을 인근 소나무밭에서 사살하였다.

조정순은 조인철 형제와 같이 조대근의 인공시절 활동 전력과 관련되어 희생당한 부분도 있지만, 그의 죽음은 더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다.

조정순은 목포 사범을 나온 엘리트였는데 49년부터 대덕국민학교 교사를 하다가 인공시절엔 어쩔 수 없이 두어 달간 인민학교에도 근무한 적이 있었다.

조정순의 아들 조현(1950년생)씨가 가지고 있던 아버지의 유품 속에는 인민학교 교사자격증과 장흥경찰서에서 요주의 인물로 지목해 발급했을 것으로 보이는 국민증이 남아 있었다.

조현 씨는 아버지의 사진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 역시 너무 어린 나이에 돌아가신 탓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아무것도 없지만, 사진 속 젊은 아버지는 다감하고 멋쟁이였음이 틀림없었다.

당시에는 드물게도 자신과 동료들의 사진을 수십 장이나 찍어 소중히 모아둔 분이었으니 말이다.

살았다면 아들과 손자들에게 자신의 육성으로 전하고 싶었을 그의 얘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유품 속 노랗게 빛바랜 사진과 신분증을 조심스레 들어 가만히 귀 기울여본다.(제공: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사진:마동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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