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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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⑥
  • 장강뉴스
  • 승인 2022.01.10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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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기억(記憶)하고 바다처럼 해원(解冤)하길...

장흥군은 현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따라 한국전쟁 전후 장흥에서 벌어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 조사·기록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조사에 따라 진실규명신청서를 작성하여 관계 기관에 접수한다. 이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사)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은 본지 지면에 이 아픈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

장흥군 안양면 해창마을=사진 마동욱
장흥군 안양면 해창마을=사진 마동욱

나무처럼 기억(記憶)하고 바다처럼 해원(解冤)하길...

그 날 해창마을 팽나무는 무엇을 보았을까.

탕탕탕.

잠이 어쩐지 안 와서 뒤척이던 14살 소년 최금옥 씨(가명)는 총소리를 듣자마자 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늘 야경 당번이라 저녁밥 일찍 먹고 집을 나선형이었다. 어쩐지 무섬증이 나 벌떡 일어나지 못하고 그저 침만 꿀꺽 삼켰다.

그때 옆방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이게 뭔 소리여. 금석이 아버지, 금석이 아버지!”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어머니, 아버지가 나가는 소리가 나자 최금옥 씨는 방문을 열고 나섰다.

어머니,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지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덧 총소리는 그치고 이윽고 정신을 차린 아버지와 어머니, 최금옥 씨는 총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갔다. 달려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던가.

아니, 너무 많은 생각이 나서 아무 생각이 없었던가. 총소리가 난 곳은 동네를 내려다보는 팽나무 쪽이었다. 고작 집에서 300m 정도 길인데 그 길이 하염없이 길었다.

그렇게 달려간 팽나무 아래에는 총을 맞고 쓰러진 세 사람과 총소리를 듣고 달려 나온 동네 사람들이 있었다.

피를 흘린 채 숨을 거둔 형의 시신을 보는 순간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울부짖는 부모님들의 울음소리, 웅성거리는 동네 사람들의 말소리들이 웅웅거렸다.

장흥군 안양면 해창마을 팽나무=사진 마동욱
장흥군 안양면 해창마을 팽나무=사진 마동욱

 

지금은 한적한 바닷가마을이지만 한때 부산에서도 쌀을 실으러 왔던 큰 항구였던 장흥군 안양면 해창마을.

일제강점기부터 주변 4개 군에서 온 쌀이 해창마을로 모여서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가곤 했다, 쌀이 모이니 돈도 모이고 사람들도 모였다.

그래서 해창마을에는 하역하는 일감이 많아 하역 꾼은 많아도 어부는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바닷가마을이지만 고기를 잡지 않아도 먹고 살 만했기 때문이다. 그 쌀을 보관하기 위해 해창마을 항구에는 큰 창고들이 네 개나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마을 사람들은 그 쌀 창고를 지키기 위해 동네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야경을 섰다.

경찰들이 마을에 있긴 했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 불안했고 그만큼 치안은 불안했다.

배고픈 산 사람들이 민가를 습격해 양식을 빼앗아 가는 일이 허다했기 때문이었다.

설을 20일쯤 앞둔 그 날밤 야경꾼은 최금옥 씨의 형인 최금석 씨(가명, 당시 24세)와 이태문 씨(가명, 당시 47세), 그리고 다른 마을에서 온 학도병 한 명이었다.

그날 밤 죽은 세 명은 마을을 돌며 야경을 서다가 쌀 창고에 있는 쌀을 훔쳐 가기 위해 산에서 내려온 산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함께 있던 경찰들은 산사람들이 내려오자 도망가 버리고 비무장이었던 마을 사람 두 명과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학도병 한 명이 죽었다.

세 명의 죽음을 지켜본 팽나무는 지금도 그 고개 위에서 마을과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내가 도망가면 가족들이 대사리 당할꺼인디...”

제1회 장흥군 보도연맹 희생자 합동 위령제=사진 마동욱
제1회 장흥군 보도연맹 희생자 합동 위령제=사진 마동욱

‘제1회 장흥군 보도연맹 사건 희생자 합동 위령제’ 가 열린 안양면 수문리 키조개 거리에 신문을 들고 찾아온 김병문 씨(가명, 1946년생). 접수를 받기 위해 어떻게 오셨는지를 물었다. 그는 신문을 내밀며 말했다.

“누가…. 신문을 보여줘가꼬. 우리 아부지가 여그서 죽었응께”

너덜해진 신문이다. 몇 번을 보았을까.

75세 할아버지는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눈이 발갛게 충혈된 채 눈에 눈물이 가득하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는 지금도 아버지의 마지막을 똑똑히 기억했다.

김병문 씨(가명)의 아버지는 수문 보도연맹 학살의 피해자이다.

제1회 장흥군 보도연맹 희생자 합동 위령제=사진 마동욱
제1회 장흥군 보도연맹 희생자 합동 위령제=사진 마동욱

김병문 씨의 아버지 김홍진 씨(가명, 1950년 당시 34세)는 좌익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보도연맹으로 가입되어 있었다.

똑똑하고 잘생긴 인물이라고 지금도 친척들은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한다. 그러던 그가 ‘좌익 머리’를 쓰게 되고 비극이 시작된다.

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으로 가입하라고 억지로 끌고 가더니 이제는 보도연맹 가입한 사람이라고 끌고 갔다.

집에서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들에게 끌려가면서 아버지는 울면서 큰딸의 이름을 불렀다. “병남아, 병남아….” 김병문 씨의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 이야기를 하곤 했다.

잡혀간 아버지는 장흥경찰서에 구금되었고, 어머니는 애가 달아 아침저녁으로 밥을 갖다 주러 가면서 두려움에 떨었다.

어느 날 경찰서에 사람이 별로 없던 날, 평소에 아버지를 잘 아는 형사가 아버지를 풀어주면서 “나가서 개를 좀 찾아오라”고 했다고 한다. 아마 그대로 죽이기엔 아까운 인물이라고 생각해서였을까.

제1회 장흥군 보도연맹 희생자 합동 위령제=사진 마동욱
제1회 장흥군 보도연맹 희생자 합동 위령제=사진 마동욱

그런데 김홍진 씨는 경찰서 근처를 돌아다니다 그냥 경찰서로 돌아왔다. 개가 안 보인다고. 왜 다시 왔냐고 물었더니 “내가 도망가면 가족들이 대사리 당할꺼인디….” 라고 했단다.

죽을 자리인 줄 알면서도 가족들을 지키고 싶어서 다시 죽을 자리를 찾아 들어간 것이다.

그 후에 김홍진 씨는 수문 지서로 끌려갔다. 그리고 1950년 7월 22일 밤에 득량도가 바라보이는 수문 앞바다에서 수장되었다. 시신을 수습하지 못해서 어머니는 나무에 아버지 이름만 써서 묘소를 마련했다.

“수문 지날 때마다 그냥 거시기 했는디, 위령제 하는 걸 보니 아부지 생각에...”

김병문 씨는 위령제가 끝나고 만났을 때도 말을 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더 묻는 일조차 잔인한 것 같아 그냥 돌아 나왔다.

제1회 장흥군 보도연맹 희생자 합동 위령제=사진 마동욱
제1회 장흥군 보도연맹 희생자 합동 위령제=사진 마동욱

우리 아버지가 저기서 죽었노라고 대놓고 말도 못 하던 시절을 살다가 이제 겨우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처음으로 기리게 되었으니, 말을 더 물어 무엇 하겠는가.

그날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본 바다는 지금도 말이 없이 그저 함께 흐를 뿐이다.

한국전쟁 당시 장흥은 1950년 8월부터 9월 27일경까지는 인민군이 점령하였고, 그 뒤에 치안 공백이 10월 초까지 이어지다 경찰과 국군이 수복하였다.

그러니 그사이에 민간인들이 얼마나 희생되었겠는가. 몇 달 사이로 수도 없는 사람들의 목숨이 스러져갔다.

하지만 아직 장흥에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들에 대해 진실규명을 신청한 숫자는 많지 않다.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거나, 고향과 인연을 끊고 멀리 떠나간 이들도 많기 때문이다.

그 사정이야 듣지 않아도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제1회 장흥군 보도연맹 희생자 합동 위령제=사진 마동욱
제1회 장흥군 보도연맹 희생자 합동 위령제=사진 마동욱

하지만 이번 ‘제1회 장흥군 보도연맹 희생자 합동 위령제’를 통해 묵은 원혼을 달래고 이제라도 제대로 해원(解冤)하자고 한 것처럼, 더 많은 진실들이 밝혀지고 더 많은 희생자들의 이야기가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한다.

아프고 괴로운 사실이지만 우리가 회피하지 말고 마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역사는 지우고 싶다고 해서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기억하는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 법이다. (제공=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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