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칼럼 - 새해에는 어떤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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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칼럼 - 새해에는 어떤 삶을
  • 장강뉴스
  • 승인 2021.02.22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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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중(논설위원)

봄 춘(春)자는 석 삼(三)+ 사람 인(人)+ 날 일(日)자의 합성어이다.

최일중
최일중

갑골문(甲骨文) 자전에서 봄춘(春)자를 찾아본다. 석삼(三) 자란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 천지인(天地人)을 뜻한다.

그렇다면 봄춘(春)자는 사람이 하늘과 땅(자연(自然)) 그리고 부모조상의 가르침과 그 뜻을 깨우치는 날이 아니겠는가? 하늘을 우러러 경천심(敬天心)을 갖추며 생명의 바탕이 되는 대지(大地)를 감싸고 보호하는 외경심(畏敬心)과 지금의 나를 생존케한 부모님과 조상님께 감사하는 효행심(孝行心)을 새롭게 깨우치고 궁행하는 날이라 생각한다.

인간의 삶의 목적은 네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투쟁의 삶으로 유한한 자원과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삶이다. 투쟁의 삶은 이번 경쟁의 결과에 따른 보상이 연속되는 경쟁에서 승리의 발판이 되는 승자독식의 삶이다.

이 삶은 먼저 된 자가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리라는 예수의 가르침과는 달리 패자부활전이나 역전의 삶이 보장되지 않음으로 한번 밀리면 끝장이다라는 불안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한경쟁 하고 현재의 순위를 유지하거나 상승시키기 위해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을 보여야 하는 삶이다.

두 번째 정의로운 삶이다. 이 삶의 모습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율에 압축되어 있다.

황금율에는 호혜성 또는 상호성의 원리가 담겨 있는데 쌍방이 행위를 동시적으로 할 수 없는 경우의 호혜성은 네가 하면 나도 하겠다가 아니라 내가 하면 너도 하라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황금율이 지향하는 바가 온전히 달성될 수 없다. 100m 달리기 경주를 예로 든다면 어느 선수가 심판 몰래 출발선에서 50m 앞선 지점에서 출발한다고 해서 다른 선수도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반칙으로 인한 이익이 경기규칙의 준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클 때 반칙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고 공정하게 경쟁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반칙한 선수에 대해서는 정당한 응보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우직하게 출발선에서 기다려야 한다.

한편 공정하게 경쟁한 이상 1위부터 꼴찌까지의 순위 매김은 있을 수 밖에 없으므로 승자가 그에 대한 보상을 받더라도 불만을 품어서는 안된다. 결국 정의로운 삶은 공정한 경쟁의 결과에 대하여 겸허하게 승복하는 삶이다.

세 번째로 에로스적 사랑의 삶이다. 이 삶은 공동체 구성원 상호간의 호혜적인 보상이나 응보와는 상관없이 인간 자체에 대한 존귀함을 인정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삶이다.

능력이나 노력에서 천차만별인 인간 상호간의 경쟁은 권력, 지위, 부에 있어서 차이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차이를 방치하면 불평등이 심화될 가능성이 크고 불평등이 심화되면 공동체의 연대와 통합은 기대하기 어렵게 될 것이며 그에 따른 결과는 투쟁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가 초래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선 공동체 구성원들이 정의로운 삶을 살아야 하겠지만 그런 삶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사랑의 삶으로 보완해야 한다.

사랑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은 증세 등 빈부격차를 줄이기 위한 법적제도를 만드는 것을 지지할 뿐만 아니라 제도의 미비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들에게 자발적으로 호의를 베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의 삶에는 자기애(自己愛)라는 한계가 있다. 나는 설령 굶어 죽더라도 이웃에게는 먹을 것을 주겠다는 것은 자기애와 양립할  수 없다. 

네 이웃을 너 자신같이 사랑하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는 예수의 가르침에 자기애가 전제되어 있다.

네 번째 아가페적 초월의 삶이다. 이 삶은 자기애를 넘는 자기 부인(否認)과 희생의 삶이다. 사랑의 삶이 나르시스즘이 아닌 에로스적 자기 긍정을 바탕으로 한다면 이 초월의 삶은 아가페적 자기부정을 바탕으로 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는 가르침이 지향하는 삶이다.

예수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초월의 삶은 오른 눈에 잘못을 저지르면 빼내어 버리고 오른 손이 잘못을 저지르면 잘라버리는 삶,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도 돌려 대주는 삶, 고발하여 속옷을 빼앗으려고 하면 겉옷까지도 내주는 삶, 억지로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동행해주는 삶, 소유물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삶,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 종이 되는 삶,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는 삶,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삶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삶이다.

우리 사회의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은 올 한 해 동안 주로 몇 번째의 삶을 영위하였다고 할 수 있을까? 공동체의 통합과 연대를 위한 삶이었는가 아니면 분열과 대립하는 삶이었는가?

어느 신문사의 제목과 같이 저출산이라는 국가재앙을 물려받아야 할 다음 세대에게 어떤 삶의 모습을 남겨두고 싶은가?

지금 이 모습 그대로를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인가? 그런 마음은 추호도 없을 것이다.

다음 세대가 기성세대의 영향으로 회복이 불가능한 분열과 대립의 역사를 상속하게 된다면 한 마음이 되어도 대응하기 어려운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겠는가?

새해에는 다음 세대에 부끄럽지 않은 보다 성숙한 지도층의 모습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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