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칼럼 - 최일중 성균관 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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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칼럼 - 최일중 성균관 전인
  • 장강뉴스
  • 승인 2017.06.12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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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精神)

▲ 최일중
선비는 유교사회의 꽃이요 조선왕조시대는 선비가 출현하면서 그 모습을 갖게 되었고 선비가 당당하게 자리잡으면서 정신을 부여받았고 선비가 타락하면서 나라가 쇠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한마디로 선비를 국가의 원기 곧 생명력이라 자각하였다.
선비가 열렬한지 무심한지 따라서 조선왕조의 핏줄에는 피가 뜨겁게 흐르거나 차게 흐르거나 하였다. 선비가 온화한지 신랄한지에 따라 조선왕조의 날씨가 봄이 되기도 하고 가을이 되기도 하였다.
선비는 지배자의 줄과 백성의 줄이라는 두 가닥의 줄에 걸쳐 있는 매듭이었다.
천자제후대부사서인(天子諸侯大夫士庶人)의 봉건제도에 따르면 지배자의 맨 아래에 매달려있다.
사농공상의 사민(四民)구성에 따르면 백성의 맨 앞에 나서고 있다. 백성을 가장 가까이서 만나면서 큰 은택을 줄 수 있는 것도 선비였다.
그러나 선비는 사회의 계급적, 신분적 질서 속에 머무르는 세속적 존재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선배와 대부를 함께 일컬어서 사대부라 하는 것은 계급적 존재로서의 선비를 가르킨다.
선비와 군자를 함께 일컬어서 사군자라고 하는 것은 인격적 존재로서의 선비를 가르킨다. 선비가 다 같은 선비가 아니라 세속된 권력과 사회적 신분을 향유하면서 살아가는 사대부만 내세우는 선비는 조선시대의 자부심이 강한 선비들이 더럽게 여겼다.
벼슬을 주어도 마다하고 산속에 물러나서 학문연마에 힘쓰면서 음성이 부드럽고 안색이 화기에 넘친 수도하는 선비가 제대로 된 선비라 했다. 이 사군자의 선비는 상하가 없이 두루평등하며 학처럼 고고하고 순결하다.
사대부로서의 선비는 사군자의 덕을 함께 지나지 못하면 선비의 고고한 대열에 참여하기가 어렵다. 선비의 정신은 온화한 기상에서 인(仁)의 화합함을 보여주며 강개한 기상에서 의(義)의 준엄함을 보여준다. 선비가 사회에 나서서는 불의한 현실에 대하여 온화함보다 준엄한 의리정신을 두드러지게 드러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조선시대의 선비정신은 의리 정신으로 대표되는 것이 사실이다.
선비의 의리정신은 크게 3가자 형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잇다. 개인이 사회에 대한 처신의
정당성을 평가하는 기준 은 출처의 의리이고 사회적 문제에 대한 판단의 정당성을 펼가하는 기준은 의 이(利)의 분별이다. 이러한 의리정신은 선비가 개인의 작은 문제에서 국제관계의 심각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에 대해 판단과 실천의 원리가 되고 있다.
선비가 의리를 소중히 지키고자 하지만 위기를 당하여 의리와 실천을 회피한다면 그것은 공허한 관념속의 의리에 불과하다. 의리는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속에서 신념과 용기를 동반함으로서 비로서 강인하게 나타난다. 조선후기의 역사적인 위기로서 외적의 침략을 당했을 때 선비들은 불굴의 의지로 의리를 실천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조헌(趙憲)은 7백의사와 함께 금산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죽음에 앞서 마지막 훈시를 하면서도 오늘은 다만 한번 죽음이 있을 뿐이다. 죽고 삶과 나아가고 물러섬을 의라는 한 글자에 부끄럽지 않게 하라고 언명하였다.
이처럼 의는 국가존망의 위난에 처했을 때 생명을 버리면서 투쟁하는 용기의 원천이요 정당성의 근거가 되고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국가간에 신의를 지켜서 국제질서를 유지한 원리로서 춘추대의가 존중되었다.
병자호란때 척화파와 주화파의 논란 가운데 척화파는 만주족의 오랑캐에게 항복할 수 없다는 의리론을 내세우고 주화파는 무력침략앞에서 국가의 존속을 확보하려는 실리론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인조 임금도 남한산성에서 한 때는 이제 오랑캐가 대의(大義)를 참칭하고 우리나라를 모욕하니 내가 천하대의를 위해 그 사신을 거절하였다. 이 때문에 환란이 일어나서 지금 군신상하가 한성을 함께 지키고 화의를 거절하였으니 결국 주화파를 따라 항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삼학사나 김상헌은 척화의리를 굽히지 않았고 홍익한은 심양에서 청 태종의 심문을 받으면서 내가 지키는 것은 대의일 따름이니 성패와 존망은 논할 것이 없다고 대의를 내세워 순절하였다. 국가의 존망이 중요한가 대의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가의 문제는 이념과 현실사이에서 영원히 남을 선택일 수 있다.
여기서 조선사회의 유교이념을 신봉하는 선비의 의리론에 따르면 국가의 존망에 대한 집착보다 대의를 버리고 존속하는 것은 진정한 생존이 아니고 또한 생존의 보장도 못되는 것이라 본다. 불의속에 생존하는 것은 역사 속에 조만간 멸망할 뿐이고 대의를 지킨다면 한 때 죽음을 당한 것 같아도 영원한 생존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의리의 정당성이 생존을 보장해 주는 것이요. 생존의 요구가 의리를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된다.
조선후기는 춘추대의에 따른 역사적 복수의식 속에 이끌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춘추대의의 기본주제는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을 구분하고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이다. 곧 화. 이의 분별의 의리요 존화양이(尊華攘夷)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병자호란 이후 효종의 북벌정책을 거치면서 조선사회의 선비들은 청나라를 오랑캐로 배척하고 중화문화의 계승을 주장하는 배청존명의 의리론이 시대이념을 이루고 있을 만큼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만주족의 침략에 저항하던 화(華). 이(夷)의 분별의리를 조선말기에 이르러 서양과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세력을 맞이하면서 이른바 위정척사론이 대두되었다. 한말의 선비들이 서양과 일본의 침략앞에서도 위정척사론을 내세우는 것은 침략세력을 불의(不義) 의사로 규정하고 우리의 역사적 전통을 정도로 인식하는 데 근거를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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