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김금 장흥군보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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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김금 장흥군보건소
  • 장강뉴스 기자
  • 승인 2016.04.18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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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 설헌(許蘭雪軒)은 누구인가

허난설헌은 1563년 강원도 강릉 동지 중추부사를 지낸 허엽과 그의 부인 강릉 김씨 김광철(金光轍)의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양천(陽天)으로 본명은 초희(楚姬)이고 자는 경번이며 호는 난설헌이다.
허성은 이복오빠이고 이복 언니 2명과 친오빠 허봉이 있었다. 또한 홍길동전의 저자 교산 허균(許筠)은 그의 친 남동생이었다.
후일 동생인 허균이 명나라에 난설헌의 시고를 편찬할 때 기록되어 이름과 자가 전하는 여성으로 당시 여성 중 이름과 자가 전하는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본명은 초희 다른 이름은 허옥혜(許玉惠)였다.
난설헌은 그의 호인데 여자의 이름을 부르지 않은 조선시대의 관례에 따라 그는 허난설헌, 허난설재, 난설헌 허씨라고 불리게 되었다.
아버지 허엽이 첫 부인 청주한씨에게서 허성과 두 딸을 낳고 사별한 뒤 다시 강릉 김씨 김광철의 딸을 재취로 삼아 처가가 있던 강원도 강릉에서 허봉, 초희 ,허균 3남매를 두었다. 그밖에 선조 때의 유명한 의관인 어의 허준이 먼 친족으로 11촌 아저씨뻘이었다.
일찍부터 허난설헌 그녀는 신동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글재주가 뛰어났으며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 났다. 어릴 때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다.
허난설헌은 기억력이 좋고 어린 나이에도 글을 잘 써서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그녀의 나이 8세 때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짓는 등, 신동이라는 평을 들었다.
딸의 제주를 아깝게 여긴 허엽은 직접 글을 가르치고 서예와 그림도 가르쳤다.
허엽은 서경덕과 이황의 문인으로 그가 서경덕의 문하에서 배운 도학적 사상이 난설헌과 허균 남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여동생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오빠 허봉의 주선으로 남동생 허균이 허성 허봉과 평소 친교가 있었던 중인 시인 손곡 이달에게 시와 들을 배울 때 그녀도 함께 글과 시를 배울 수 있었다. 또한 그림에도 뛰어나 여러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이후 그는 자호를 난설헌 또는 난설재라 하였다. 허난설헌은 1577(선조10년) 김성립과 결혼했으나 결혼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시(詩)작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의 시 세계를 이루하였다.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여류문인의 한사람이며 300여수의 시와 기타 산문 수필 등을 남겼으며 213수 정도가 현재 전한다. 서예와 그림에도 능했다.
남편 김성립과 시댁과의 불화와 자녀의 죽음과 유산 등 연 이은 불행을 겪으면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1608년(선조41년) 남동생 허균이 문집을 명나라에서 출간함으로써 알려졌다.
사후 남편 김성립(임진왜란때 전사)이 이조참판에 추증되면서 그 역시 정부인으로 추증된다.
오빠 허봉이 율곡이이를 비방하다가 변방으로 귀양 가고 동생인 허균마저 귀양 가는 등 비극의 연속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먹으로 시름을 달랬다.
1589년 초 그녀의 나이 27세 때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사람들에게 유언과 비슷한 시를 남겼다고 한다.
허난설헌은 그림에도 능하여 풍경화와 수묵 담채화, 난초화 등을 남겼다.
죽기 직전 방안에 가득했던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소각시켰다.
그의 작품들은 친정에 있었는데 자신의 작품을 소각하라 명했으나 그의 서재를 아깝게 여긴 허균이 이를 보관했다고 한다.
오늘날 전해지는 허난설헌의 작품 대부분은 그녀가 죽고 난 후 허균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허난설헌은 1577년 15세 김성립과 결혼하여 1579년 큰 딸이 사망하고 이듬해 또 아들 희윤 죽음을 맞이했다. 허난설헌의 삶은 27년 너무나 아까운 여성의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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