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칼럼 - 문제는 공공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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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칼럼 - 문제는 공공성이다
  • 장강뉴스
  • 승인 2023.10.17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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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균(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부위원장)
김진균
김진균

사회가 해체되지 않게 하는 가장 중요한 구심력은 공공성 실현에 대한 기대이다. 갈등 없는 사회는 없다. 갈등을 공공성 원칙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만 남아있다면 갈등이 사회를 해체하는 원인으로 작동할 리가 없다.

국가는 공공성 실현을 위한 도구이다. 개인들의 욕망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은 언제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를 지향하지만, 구성원들의 욕망을 통제하여 반사회적 요소를 제거하고 타협점을 찾아낼 수 있는 힘은 공공성 실현에 대한 기대에서 나온다. 국가가 제 역할을 못하여 그 기대가 꺾이면 사회는 스스로 소멸할 길을 찾아 나선다.

하필이면 이익을 말하시는가

근대 중국의 국학대사(國學大師)로 칭해지며 루쉰(魯迅)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장타이옌(章太炎)은 유가사상의 공사 구분론을 기반으로 “공(公)”을 욕망과 이익으로 규정된 “사(?=私)”를 등진(八) 형상으로 파악하였다.

유가사상에서 공은 하늘의 이치인 천리(天理)를 따르는 것이고, 사는 개인적 욕망인 인욕(人欲)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공은 욕망과 이익의 반대편을 지향하는 공동체의 보편적 도덕률이다. 공이 이익의 반대편에 있는 개념이므로 현재 많이 쓰이는 “공익(公益)” 같은 개념이 장타이옌에게는 형용 모순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유가사상이 지배이데올로기였던 중세에도 “공”은 구두선에 불과했을 테지만, 적어도 개념적으로 공공성을 이익으로 저울질하는 상황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공은 이익의 무게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도덕의 옳고 그름으로만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작에 맹자가 말했던 것이다. “하필이면 이익을 말하시는가(何必曰利)?” 구두선으로라도 인정되던 공공성이 보라는 듯이 부정되는 사회에서는 각자도생의 원심력만 작동하게 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지만, 공공성을 부정하면 인간은 반사회적 동물이 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적 원리를 충실히 수호하자며 이익을 신성시하는 경향을 가속화하면서, 사회 자체를 붕괴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사회가 붕괴되면 자본주의는 누구와 더불어 수호할 것인가.

반사회적 동물과 더불어 죽을 수만 있다면

사람이 먹는 빵을 만드는 업체에서 사고가 안 나도록 공장 시설을 안전하게 개선하는 데 사용할 비용을 아껴서 그 빵 공장에서 빵 만드는 사람들이 빵 만드는 기계에 끼이고 빨려 들어가 여전히 죽고 다치고 있는데, 그 공장에서 만든 빵을 여전히 사람들 먹으라고 시장에 내놓고 있다.

사람 살 집을 만드는 건설 현장에서는 자재를 아끼느라 사람 살 수 없는 집을 만들고, 거기에 고용되어 할 수 없이 사람 살 수 없는 집을 만들던 사람들도 날마다 떨어지거나 떨어지는 물건에 맞아 죽고 다친다.

세상 밝힐 전기를 만드는 발전소에서 관리자가 규정을 지켜주지 않아 홀로 깜깜한 작업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는 사업장의 사고위험성을 알리겠다며 대통령 만나 달라 했지만 끝내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죽는다. 모두가 이익을 신성시하여 감히 제 이익과 남의 목숨을 저울질하는 반사회적 동물들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그들의 파괴적 이익 추구를 막을 힘이 있는 자들 역시 이익을 신성시하는 대열에 서면, 터무니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성인도 견디기 어려워 사표가 족출하는 사업장을 운영하는 반사회적 동물들에게 고등학생을 내어주기도 한다.

특성화고를 졸업하려면 우선 필수로 되어 있는 실습 과정에서 죽지 않아야 한다. 아무런 사전 교육 없이 위험한 기계 수리에 투입하여 생명을 거두고, 수영을 못하는 학생에게 배 밑의 이물질 제거를 지시하여 익사시키고, 고객들의 살인적 욕설에 노출시켜 자살하게 만드는 반사회적 동물들로부터 살아남아야 한다. 국가가 반사회적 동물들의 사적 이익에 조력하는 또하나의 반사회적 동물로 등장한 것이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정당을 가리지도 않는다. 그러고는 역대 정부도 인구가 감소한다고 아우성이었고, 지금도 대한민국이 소멸될 것이라고 아우성이다.

살아서 멀쩡히 일하러 다니던 사람들도, 이제 막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서려는 청춘들도 여기저기서 죽어나가는 사회는 방치하면서, 공공을 대표해야 하는 국가가, 혼자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셋이 낫지 않느냐고 공공재를 써서 광고한다.

이건 조롱이다. 공공성에 대한 조롱이고, 사회에 대한 조롱이다. 공공성과 사람 목숨과 사적 이익이 저울질 될 수 있다고 믿는 반사회적 동물들과 싸울 힘도 조롱을 받아칠 힘도 없는 사람들이 이제 마지막 힘을 다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마음먹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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