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흠 시인과 떠나는 감성여행32
상태바
이대흠 시인과 떠나는 감성여행32
  • 장강뉴스
  • 승인 2023.10.16 12: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작시 - 압력솥은 세계의 짝퉁이라서

눈이 흐려지고 갑자기 앞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나귀 때문일 것입니다 

내 몸이 터져버릴 것 같습니다 수많은 발굽소리
소리들이 압력솥 안의 수증기처럼 날뜁니다
끓어 넘쳐 쓰러질 것 같아서 문을 열고 나옵니다

간판들이 흔들립니다 병원에 가면 병을 주겠지?

*

쉭쉭 냄새를 풍기며 꼭지가 돌고 있었을 거야 때죽 꽃의 지독한 향기를 지나 죽 쑤고 있는 솥단지를 가운데 두고 사람들은 둘러앉았지 조문의 형식 중 빼먹지 않아야 할 것은 기다리는 것 꼭지가 팽팽 돌아버릴 때까지 죽은 자에 대한 얘기는 되도록 하지 말 것

그 여름 날 닭들의 장례식은 닭의 내력을 흐물흐물해지도록 고아버리는 것

먼저 비명이 새어나가지 않게 풍선 꼭지를 비틀 듯 닭 모가지를 비틀고 고전음악은 어울리지 않아 피가 틔는 축제에는 타악기 소리 스피커의 침묵에 감사할 것 탕탕 도마를 내리치는 타악기 소리 인간이 만든 음악이라는 것도 다 자연이니까 깃털을 뽑고 날개를 꺾고 발목을 자르지

*

다녔던 길이었는데 길이 휘어지면서 자꾸 하늘과 충돌했습니다 
마음의 허허벌판을 뛰어가는 당나귀들이 출렁, 한쪽으로 쏠립니다

누웠다 일어서는 전봇대를 들이 받지 말아야 해 명랑한 보도블록은 음악도 없는데 엉덩이를 들썩였어 내가 내 안에 구겨 넣은 건 기껏해야 몇 개의 감정

네가 떠나고 나는 잠깐 분노하고 있었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았지만
나를 설득하는 데는 실패 했어 웃겨
가장 가까운 나를 납득시키지 못하다니 그러고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

압력솥에 닭이며 오가피나무며 마늘 같은 것을 욱여넣고 뚜껑을 닫고 끓이면
열대야도 그런 열대야가 없을 거야

폭염이 계속되고 가뭄이 끝나지 않을 때
시뻘건 태양 아래 왕을 눕히고 목을 따는 기우제
가장 귀한 것을 바치라 하시매
사람들은 시뻘건 태양, 그 솥뚜껑 꼭지를 꺾어버리고 싶었을 거야
솥뚜껑, 태양, 솥뚜껑 꼭지, 왕의 목
시뻘건 뚜껑을 따 버리자!
달려들었겠지

*

병원에 들어서자 간호사들이 내 몸을 눕힙니다 목을 따지는 않겠지만 희생제에 쓰이는 동물의 몸처럼 나는 공손합니다 눈을 까 뒤집어보던 의사는 내 입을 따서 알약 하나를 혀 밑에 넣어줍니다 치이칙 몸부림치는 솥뚜껑 꼭지를 젖히는 것처럼

끓어오를 때면 혼자서 손가락 끝을 따기도 했지
꼭지만 비틀면 견딜만 해지는 압력솥 속의 세상

왕의 목을 딴다는 것도 하늘 꼭지를 재낀다는 것 
태양 살해 사건의 짝퉁이야
태양을 죽일 수 없어서 왕의 목을 딴 거지 

솥뚜껑 꼭지 같은 왕
꼭지 부러진 솥뚜껑을 다시 쓰려면 꼭지를 붙여야 하는데 그 옛날 왕국에서는 용접기가 없어서 쉽지 않았을 거야 태양은 다시 떠오르지만

처형이 끝난 왕은 살아나지 않았겠지 그런 이별도 있어 완전히 끝나서 재생할 수 없는 사랑 말이야 

*

왕 대신 죄수를, 꿩 대신 닭이 아니라 봉황 대신 닭을 내민 건
분노의 효용성 법칙

봉황이 없어서 닭을 쓴 거야 목을 비틀고 죽은 닭을 봉황처럼 만들기도 했지 닭은 어차피 봉황의 짝퉁이니까

닭을 삶는 것도 아닌데 치직치직 소리가 나
도대체 이렇게 날뛰는 이별들이라니!

왕 대신 죄수의 목을 자른 것도 마찬가지 선택된 죄수는 왕의 짝퉁이 되어 목을 내밀어야 했지 피를 바치는 희생제는 어차피 붉은 피만 바치면 되는 것이니까 

처형은 끝났어 
제사는 냄새만 피우면 되는 거야 죽은 자들은 몸이 없으니까
 
짝퉁의 역사를 보면 진짜 왕이 죽고 죄수가 왕의 탈을 쓴 느낌

사랑을 잃고 이별을 구겨 넣은 나
늑골 아래의 산을 타고 뛰어다니는 당나귀 떼
당나귀들은 마구 달리고 마구 똥을 싸지르고
나는 냄새를 풍기지 폭발 직전

간호사는 단추를 풀고 
김을 빼네
뚜껑을 따지 않아서 다행

혈압이 200까지 올랐다는 말
200마리의 당나귀들
200도가 넘는 압력솥 안의 열기

생각해보면 단추는 머리의 짝퉁
단추를 따서 심장박동을 재고 혈압을 재고
혈압약이란 건 박동하는 심장에게 게으름을 선물 한다지

사랑에 게을러지자 폭발하지는 말고
터질 것 같으면 솥뚜껑 꼭지 제치듯 당나귀들을 새어나가게 하자

그렇습니다 
내 안에서는 당나귀가 넘칠 것 같았는데
짝퉁 꼭지를 땄습니다

이제는 사랑도 짝퉁으로 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이대흠 시인
이대흠 시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