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칼럼 - 장흥 회령포(회진앞바다)에서 장흥백성들은 부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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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칼럼 - 장흥 회령포(회진앞바다)에서 장흥백성들은 부서진
  • 장강뉴스
  • 승인 2023.07.24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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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길(장흥군 문화관광해설사협회 회장)

'전선12척을 고쳤고, 명량해전에 이순신을 따랐다.'

문병길 회장
문병길 회장

장흥 회령포는 배설 경상우수사가 거제도 칠천량 해전에서 패전하자 전선 12척을 도피시켜 은닉한 장소이며,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된 이순신이 회령진성에서 수군(군사) 120여명을 규합하고 향선(민간인 배)수십척을 얻고; 부서진 전선(판옥선) 12척을 고쳐서 명량해전으로 출정했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1597년 8월 18일부터 8월 20일까지 3일간이 한국사 맥락에서 살펴보면 별스럽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명량해전 전쟁사 측면과 장흥지방에서는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데 그 의미가 인식되지 않고 있어 문화관광해설사 필자는 안타깝기만 하다.

■ 장흥 회령진성,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 숙배(취임)했던 곳

백의종군(白衣從軍)하던 이순신은 1597년 8월 3일(음력)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재임용)되어 수군재건 대장정을 했다.

이순신의 대장정 길은 군관 송대립 외 9명 장수와 함께 병선과 군사도 없이 맨손으로 경남 진주 수곡(손경례 집)에서 시작해 구례~압록~곡성~옥과~석곡~순천 부유창~순천~낙안~벌교~보성 조양창~보성을 거쳐 장흥 회진면 회령진성으로 이어진 330km 거리를 도착해 명량해전을 앞두고 전진기지로서 지휘했다.

충무공 이순신은 1597년 8월 19일(양력 9월 29일)에 장흥 회령진성에서 선조임금이 내린 삼도수군통제사 임명교서에 여러 장수(수군)들이 돌아가면서 숙배(임금이 계신 곳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공수한 손을 무릎 아래까지 내려 공손히 하는 절)함으로써 삼도수군통제사에 대한 위엄과 권한을 부여하며, 지휘에 복종하며 나라를 위해 충성하겠다는 의식이었다.

그 당시 김억추 장흥부사(府使:종3품직, 수군의 첨절제사를 겸임하여 해남군수, 강진현령, 해남현령을 지휘)가 관할하는 회령진성(종4품직 무관 만호:萬戶가 주둔하던 곳)에서 이순신은 장흥 회령진성에 도착해 1597년 8월 18일부터 8월 20일까지 2박 3일간 머무르면서 수군을 정비하고 부서진 전선을 전함으로 고치도록 했다.

■ 장흥의 백성들이 모여들어 전선을 전함으로 고쳤다.

이순신이 1597년 8월19일(음력) 삼도수군통제사(현 해군참모총장)으로 복직되어 장흥 회진에 도착하자 장흥도호부 문영개. 임영개, 정명열, 김택납 등 10여명이 향선(민간인 배) 수십척을 모았고 김세호 등 300여명이 부서진 전선(판옥선)과 향선을 전함으로 고쳤다.

◆ 이순신이 전선(판옥선)을 수습하고 고치라고 명령했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 <이 충무공 행록>과 이항복 ‘백사집’ 제4권 <고(故) 통제사 이순신 유사(遺事)>자료에 의하면

경상우수사 배설이 도망오면서 이끌고 온 전선을 회진 앞바다에 버렸던 전선을 이순신이 1597년 8월 19일 전라우수사 김억추를 불러 장수 5명을 소집해 전선을 수습하게 하고, 장수들에게 분부하여 전선을 전함같이 꾸며서 군세(軍勢)를 돕게하도록 하면서, 약속하기를 “우리들은 함께 임금의 명을 받았으니, 의리상 죽기를 각오하고 함께 하여야 할 것이다.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한번 죽음을 아끼겠는가. 오직 충의에 죽는다면 죽어도 영광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 하니 모든 장수들이 모두 감격하여 두러워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 초계변씨 13충훈 유허비

이순신의 외갓집인 초계변씨 13충훈 유허비(1968년 3월 세움) 일부 내용을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충무공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 임명하자 변홍원 등 여러 형제들과 더불어 백진남, 문영개, 마하수, 정명열, 김성원 등은 향선 10여척 제공했으며, 장흥출신 김세호외 민초 300여명이 전선 10여척을 전함으로 수리하여 회령포(회진 앞바다)의 이순신의 군진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충무공 이순신은 크게 기뻐하며 “이와 같이 나라가 어지러운 시절에 자기 몸을 희생하고 있는 힘을 다하는 공들에게 충성스러운 사람의 기상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 장흥 회진에 있어야 할 조형물이 해남에 있다.

1986년에 해남 우수영국민관광단지를 조성하면서 회령포의 결의, 폐선을 전선으로 라는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어 필자는 미칠듯한 심정으로 그 조형물에 새겨져 있는 내용을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 회령포 결의

명량해전이 눈앞에 닥쳤을 때 장흥 회령포에 당도한 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김억추 등 관내 장수들과 더불어 최후 결전을 맹세했다.

“나라의 위태로움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우리가 어찌 한 번의 죽음을 두려워하라. 이제 모두 충의에 죽어서 나라 지킨 영광을 얻자” 하며 비상한 결의를 다진 수군 장수들은 격전이 기다리는 우수영 바다를 향해 진군했다.

◆ 폐선(廢船)을 명량의 전함으로

칠천량 패전이후 우리에게 남은 병선은 부서진 판옥선 아홉 척 뿐이었고, 엄청난 왜군 함대는 전라도 해역에 쳐들어오기 시작했다.

온전한 병선이 없어 해전이 불가능했던 이때 밤낮으로 폐선을 수리하여 마침내 명량해전을 가능하게 한 사람들이 있었다.

김세호, 정충양 등과 함께 전쟁 준비에 혼신의 힘을 쏟은 이들이 바로 저 무명의 선장과 목수들이었다.

■ 차별화된 관광상품을 만들어야 한다.

앞으로 행정당국에서는 관심을 갖고 장흥 회령포와 층무공 이순신 관련된 부족한 부분은 바로 채워야 한다.

우선 장흥 회진 앞바다에서 수습했던 전선을 전함으로 정비했던 곳 그 당시 내덕도(현 덕산마을)의 조선병창((造船兵蒼)이 자리했던 곳에 ‘폐선을 명량의 전함으로’ 라는 표지석을 세우고, 회진 앞바다 적당한 곳에 차별화 된 조형물(회령포 결의, 폐선을 명량의 전함)을 설치하며 향후 장흥 회령포 전시관을 건립해야 한다.

참고적으로 ‘회령포 결의’, ‘폐선을 명량의 전함으로’라는 표지석이나 조형물을 설치할 때 8월 19일(음력)을 선택했으면 한다.

왜냐하면 1597년 8월 19일(음력)은 충무공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 받아 취임(숙배)을 회령진성에서 거행했고, 전라우수사 김억추(장흥도호부사 겸임)에게 경사우수사 배설이가 이끌고 온 전선을 전함으로 고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 하고 싶은 말

칠천량 해전에서 패주한 경상우수사 배설이 이끌고 온 전선을 장흥출신 김세호(金世浩) 조선감(造船監)은 직접도끼를 이용해 전함으로 개조했던 곳은 그 당시 장흥도호부 내덕도(內德島) 덕산 해안 현재 전남 장흥군 회진면 덕산리 땅재 끝)에 위치한 조선병창이 있었다. (※자료출처: 호남절의록)

그 당시 이름 없는 백성들은 파손된 전선을 전함으로 고치면서 많은 고난을 겪었을 텐데 관련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아쉽다.

명량해전에 충무공 이순신 혼자 노를 젓고, 혼자 포를 쏘고, 혼자 활을 쏘며, 혼자 일본군 전선 133척과 싸운 것이 아니다.

장흥해안에 살아가면서 평생 바다에서 생계를 꾸려왔던 수많은 백성들은 소중한 목숨을 뒤로한 채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을 따랐다.

늦었지만 이름 없는 수많은 백성들의 호국영령을 달래주기 위해서 무명용사 비석을 장흥 회진면에 세우데 아무 글자도 새기지 않은 ‘백비(白碑)’를 건립해야 한다.

끝으로 명량해전을 앞두고 부서진 전선을 전함으로 고쳤던 곳 주변이 1960년대에 간척지사업으로 현재는 들판으로 변했지만 관광객들에게 스토리텔링으로 해설해주고 향후 관련 영상물을 제작해 홍보하면 그 당시 상황의 내용을 이해하고 쉽게 기억할 수 있어 방문객들은 다른 사람에게 알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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