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칼럼 - 가을은 사색의 계절(思索季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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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칼럼 - 가을은 사색의 계절(思索季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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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10.04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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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중 논설위원
최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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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국군의날, 2일 노인의 날, 3일 개천절, 4일 기러기가 초대받아 모여든다. 8일 한로(寒露), 9일 한글날, 10일 참새가 줄어들고 조개가 나온다. 15일 국화 노랗게 핀다. 20일 승냥이가 산짐승을 잡는다. 23일 상강(霜降), 25일 초목이 누렇게 시들다. 30일 동면하는 벌레가 땅속으로 숨는다.

가을은 하루의 국면에서 봄이 새벽에 해당하고 여름이 대낮에 해당하면 가을은 저녁에 해당하고 겨울은 밤에 해당한다. 저녁은 해가 지는 일몰의 시간이고 따라서 가을은 생명이 시드는 노쇠, 전락, 소멸, 고립, 비극을 상징한다.

부쟁이선승(不爭而善勝), 가을은 인생의 가을, 사색의 계절, 가을은 밤이 점점 길어지는 시기이다. 가을은 추수와 풍요를 알리기 위한 신호탄일 뿐만아니라 겨울나기 준비를 해야 하는 시기 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계절에 벌어지는 행사들의 가장 중요한 태마가 감사와 노동인 것은 당연하다. 사실상 가을이 시작되는 것은 추분, 9월 23일 부터이다. 추수감사절, 추석(秋夕)을 가을을 대표하는 추석을 말한다. 가을은 낙엽 떨어지는 가을 형형색색 된 모습을 바라본다.

푸르렀던 시간을 지나 낙엽 되어 땅에 내려와 지난 세월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오늘의 시간이 지나고 내일의 우리도 낙엽처럼 낙화 되어 땅에 묻힐 때 많은 사람들로부터 아름다움을 줄 수 있을까? 배려와 나눔속에서 이해하고 격려하는 삶이 인간세계에서는 얼마만큼 허용하는 한계인가?

인간이라는 동물은 생각이라는 단어가 존재한다. 그리고 생각을 자유로 행동화 하기도 하고 절제하기도 한다. 그 생각이라는 단어로 이해 많은 사람들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서로가 행복해지고 서로가 갈등을 쌓기도한다. 생각이라는 단어를 우리는 마음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불가에서도 말한다.

고요한 산길에서 마음의 평온을 얻고 세상 살아가는 길을 열고자 하는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길 때마다 기도하는 것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세상에서 서로 갈 길을 가며 모두가 행복했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조들의 세상은 지금같이 과학문화가 발전되지 않았지만, 마음만큼은 서로가 이웃ㅎ며 나누고 베풀면서 평화로움 속에서 살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가을은 외롭고 슬픈 영혼들의 합주로 완성된다. 달이 가을밤의 지휘자라면 물은 겸손하게 낮은 곳에서 저음의 음역(音域-매우 넓은 악기))대로 믿고 밤의 정적을 깨며 우는 풀벌레들은 높은 소프라노 파트를 맏는다. 가을에는 누군가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싶다.

나는 시골에서나고 풀숲에서 새 둥지를 찾고 봉분이 무너진 무덤가 구덩이에서 뱀이 떼를 지어 엉겨있고 비 온 뒷마당에서 물고기들이 파닥거리는 걸 보며 자랐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연민하는 일은 시골 사람의 덕목이다. 그리고 도시 사람은 도덕적 완성이다.

영혼의 점진적 성장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도시에서의 성공은 자신을 극복하는 게 아니라 타인과의 경쟁에서 승리한다는 뜻이다. 도시 사람은 땅에 씨를 뿌리거나 열매들을 땀 흘리며 손으로 딴 적이 없다. 그들은 마트에서 잘 익은 봉숭아와 향기로운 포도를 고르고 도정된 쌀과 포장육을 산다.

그리고 가을의 열매들을 데리고 돌아온다는 것은 기쁜일이다. 만물은 만물로써 무르익고 슬픈 것들은 슬픈 것대로 제 영혼을 정돈한다. 내 영혼이 숱한 실수를 저지르고도 끝내 성숙하지 못했음은 슬프다. 잘 못살았다. 회한을 잘벼린 칼이 되어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벤다.

가을밤의 풀벌레들은 다른 세상을 포기하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이 세상 너머의 다른 세상이 있는지 없는지를 나는 모른다. 생명의 불꽃을 소진한 것들에게 가을은 제자리를 찾아준다. 열매들은 제 무게를 못 이겨 땅에 떨어지고 이 생이 처음이라고 울던 풀벌레들은 돌연 죽음을 맞는다.

무릇 생명을 품은 것들이 제 생명을 연소하며 장엄한 소멸을 맞는다. 내 안의 생체 시계는 외로움을 동력 삼아 째각거리는데 나는 외로움을 도약대(跳躍臺-도약의 발판이 되는 대) 삼아 질문을 던진다.

나는 삶을 두 번 살 수 있을까? 두 번째 삶이 주어진다면 또다시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을까. 똑같은 삶을 두 번 살더라도 나는 실수를 되풀이하고 허둥거리게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슬플 때 홑이불을 적시며 우는 여린 사람으로 살기를 바란다.

지금 찰나의 삶을 생동으로 죽음을 영원한 부동으로 분별하고 작은 생명들을 더 연민으로 품게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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