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속이는 개별성에서 벗어나려는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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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속이는 개별성에서 벗어나려는 학문
  • 장강뉴스
  • 승인 2022.03.28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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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호(고려대 명예교수)
심경호
심경호

“인간은 바로 그 자신 이상의 것이기를 바란다. 그는 전체적인 인간이기를 원한다. 그는 고립된 개인임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개별적 삶의 부분성으로부터 벗어나 그가 느끼고 요구하는 완전성을, 여러 제약과 더불어 그를 속이는 개별성으로부터 벗어나 삶의 완전성을, 더욱 이해할 수 있고 정의로우며 사리에 맞는 세계를 추구한다.” ― 에른스트 피셔, 『예술이란 무엇인가』(독일어 원서 1959년 간행, 영역본 1978년 간행. 한글번역본, 한철희 옮김, 돌베개, 1993년 개정판)

에른스트 피셔는 예술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기만적인 개별성으로부터 벗어나 삶의 완전성을 확보하게 한다고 했다. 예술만 그러하겠는가? 학문도 삶의 부분성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다. 실험실에 머물러야 하는 과학자라고 해도, 그가 매수되거나 포획된 인간이 아니라면, 자신을 속이는 개별성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방법이 다를 뿐이다.

지난 2021년에 퇴직을 했다. 그간 나로서는 근대 이전 학문과 예술의 실상을 파악하고자 시도해 왔는데, 모르는 것만 늘어났다. 중요한 자료들도 겉핡기로 읽은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우선 『성호사설』을 되읽기로 했다. 그러다가 이익이 임진전쟁 때 명나라 직방청리사 주사 원황(袁黃, 자 了凡)이 건상(乾象)과 시기(時氣)를 살필 줄 알았다고 평가한 사실에 눈이 멎었다. 1593년 1월 7일의 이자(移咨)에서 이익이 주목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왜인들이 기세를 부리나 그 형세는 반드시 멸망할 것이요, 너희 나라는 비록 미약하나 그 형세는 반드시 흥왕할 것이다.

[근거 1] 천도를 논하면 조선 분야는 석목(析木)의 자리이니 지난해 목성(木星)이 인(寅)에 자리[躔] 했을 때 일본이 침노해 왔으니, 이것은 우리가 세(歲)를 얻은 것이요, 저들은 하늘을 거스렸으니, 저들이 비록 강하지만 또한 약하다. 이것이 첫째 이유이다.

[근거 2] 왜인의 성품은 추운 것을 두려워하는데, 금년은 궐음풍목(厥陰風木)이 하늘을 맡고 양명조금(陽明燥金)이 기세를 얻을 시기이다. 입춘이 지난 지 20~30일이 경과했는데도 한기가 가시지 않으니 천시(天時)를 탈 수 있다. 이것이 둘째 이유이다.

[근거 3] 너희 나라 임금과 신하가 모두 이 성[의주, 용만]에 모여 있는데, 새벽에 일어나 천기를 살펴 보면 울울총총하기가 희게 바랜 명주 같기도 하고 이불 같기도 하여 왕성한 기운이 우리에게 있으니, 형세는 반드시 회복될 것이다. 이것이 셋째 이유이다.

이익은 “이 몇 가지가 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몰랐던 것으로, 저들이 ‘사실’에 의거하여 자세히 알려 주었으며, 마침내 크나큰 적을 소탕하고 옛 땅을 되찾았은즉 그 말이 과연 증험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 하겠다.”라고 했다.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3일) 풍신수길이 군대 약 20만으로 조선을 침공했다. 선조는 보름 만에 개성으로 피난하고 결국 의주로 몽진했다.

일본군이 5월 2일(양력 6월 11일) 서울을 점령하고 6월 13일(양력 7월 21일) 평양을 함락하자, 조선 조정은 명나라로 사절을 잇달아 보내 원병을 요청했다. 이에 9월 2일 행인 설번이 명나라 신종의 칙명을 갖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12월에 신종은 제독군무 이여송에게 남북 정병을 통솔하게 하고, 병부 시랑 송응창을 경략 군문으로 삼은 후, 송응창의 청으로 병부원외랑 유황상, 병부주사 원황을 찬획에 임명했다.

1593년 초 원황은 유황상과 공동 명의로 조선 조정에 발송하는 공문들을 여럿 작성했다. 그런데 원황은 그 조선 관료들이 “단지 잠견지를 자르고 낭호필을 놀려, 우리 명나라 군사의 마음만 상하게 할 뿐”이라면서 신경질을 냈다. 명나라와 조선 사이의 불평등한 외교관계가 그런 오만한 언사를 용납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원황은 양명학자로, 선서(善書) 『요범사훈(了凡四訓)』을 저술했으며, 주자 비판의 『사서산정(四書刪正)』을 출간하여 명나라 사상계에서 주목받은 인물이다. 정약용도 『논어고금주』에서 원황의 설을 인용했다.

그런데 원황은 조선 관료들에게 학관에서 주자학을 버리고 양명학을 강학하라고 강권했다. 이때 성혼은 조신들을 대신하여 답사를 그의 주제 넘은 간섭을 배척했다.

사실 원황은 군사활동의 결책에 참여할 수 없었으며, 화의를 주장하여 제독 이여송과 갈등을 빚다가 이임했다. 영조 때 황경원은 이여송의 업적을 포장하는 반면, 원황의 군무 실적은 언급조차하지 않았다.

이익이 원황의 경학 이론에 어두웠을 리 없고, 원황이 조선의 관학에서 양명학을 가르치라고 강요한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더구나 원황이 후찰법(候察法)으로 전황을 분석했던 말이 경험적 사실에 의거했다고 여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후찰법을 적극 비판하지 않은 것은 과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적 한계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익은 후찰법을 존신했던 것이 아니다.

조선의 관료-문신들이 국가 위기의 시기에 어떠한 희망의 말도 건립하지 못했던 것을 개탄하여 저 착상에 주목했던 것이라라.

남송의 주희는 여러 갈래의 학파들과 투쟁하면서, 고전학과 경세학을 종합하여 현실의 문제를 혁신시키는 방안을 마련하고자 각투했다. 조선의 진보적 학자들은 주희의 실천에 주목하고, 부화(附和)나 억결(臆決)을 피하기 위해 박학을 중시했다.

박학은 개별적 삶의 우연한 테두리에 갇혀 자신을 소모시키지 않기 위한 책략이었다. 정의로우며 사리에 맞는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 혼돈의 시대에 나는 그 점을 다시 학인하게 된다. 47년전 대학노트 표지에 인쇄되어 있던 장자의 “나의 삶은 한계가 있지만 앒의 대상은 끝이 없다.[吾生也有涯, 而知也无涯.]”라는 어구를 되뇌이며 그저 무력감을 느낄 수만은 없지 않은가.

참고 : 심경호, 「명나라 찬획 원황(袁黃)의 임진전쟁 당시 공문, 그리고 조선 관료와의 학술 쟁변에 대하여」, 『동아한학연구』 16, 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 202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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