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에세이 - 이형문 선생이 말하는 요지경 세상(世上)-Ⅵ
상태바
장강에세이 - 이형문 선생이 말하는 요지경 세상(世上)-Ⅵ
  • 장강뉴스 기자
  • 승인 2015.12.28 12: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라가 있어야 이 민족이 있다.(일본의 만행을 잊지 말자)-中

필자는 여기에서 일본의 식민사관(植民史觀) 뿌리에 대해 자료조사에 의하면 일제(日帝)는 ‘한일합방조약’으로 대한 제국을 강탈했고,(1910년) 영구 식민지로 만들려고 ‘조선사편수회’를 설립(1922년)했으며 식민사관을 날조한 증거가 있다. 총독부 정무총감이 편수회장, 한국인 역대 고문과 위원은 이완용, 박영효, 권중현, 어윤적, 최남선이었다.
수사관(修史官)3명과 수사관보 4명은 일본인 ‘이마니시 류우’(今西龍)를 비롯하여 홍희, 신석호, 이병도씨 등이다.
일제는 일본신화 4천년 사에 맞춘(조선 4천년) 책 858쪽으로 우리 역사를 왜곡하여 한글과 한자 혼용으로 발행(1918년)된 식민사관을 보급했다. 그 내용이 한반도가 고대 일본 영토였다는 내용이다. (상기 자료는 겨레의 시조 황궁 천제 원, 일봉 곽춘근 선생이 보내준 자료임)
그 내용은 일한합방(日韓合邦)은 일한의 정치적 복고(復古)니 그 역사는 즉 대일본제국 일부의 역사가 되니라. 신라왕국은 일본인의 건설한 것이오. 가야금관국의 수로왕은 일본의 황족(중략) 만주는 증전(曾前) 아(我) 고구려 고(高)씨의 옛 영토임을 설 하니라 등이다.
편수회는 식민사관(植民史觀)을 날조했고, 우리고서(古書)들을 수거하여 불태웠다. 광복이후에도 ‘편수회 수사관보’였던 이병도 씨의 저서 ‘한국사대관 한국사 고대 편’은 금과 옥조 처럼 사학 강단을 식민사관으로 물 들렸다. 이병도 박사는 40년후 단군은 신화가 아닌 우리의 국조(國祖)라고 조선일보(1986. 10. 9)와 조선상고사에 1988년 발표했다.
식민사관 거두가 회개했음에도 그 후세들이 모르는 척 지금까지 외면해온 부끄러운 사학이다. 그러나 식민사관 회개는 우리 역사 광복운동의 시작 종소리였다고 한다. 또한 고증 조사 자료에 의하면1965년 일본 놈들은 한국을 대신하여 강압적으로 행사한 그때의 간도협약은 무효라고 선언했다. 그 이유는 일본이 만주를 침략할 목적으로 철도건설권을 따내기 위해 간도협약을 체결하고, 간도의 길림지역을 청나라(중국)에 떼어주었다. 존선 말기의 한국전도는 남북 합친 땅과 3분의2가넘는 땅을 일본이 제멋대로 떼어주고 잘못했다고 하면 그 땅이 되돌아올 것인가? 간도는 현재 중국 연변 길림지역을 말하며 우리 민족 교민 175만 명이 살고 있다. 그곳은 우리 땅 임이 틀림없다.(자료 1831년 바티칸 천주교 교구 분 활도, 출처 프랑스 까또라즘 앙꼬레)
우리 민족의 조상은 이때부터의 일본 놈들의 철저한 침략으로 인한 처절한 아픔을 당했음에도 그 깊은 상처만을 안고 나라를 되찾을 생각조차 갖지 못하는 침략만 당한 민족이다.
한편, 한국은 이상의 자료를 밝혀내 세계만방에 호소하여 일본 놈들의 만국 적 만행의 근성을 밝혀야하고, 대학살 박물관을 만들어 미국에도 세계인들에게 하루속히 보여줘야 한다. 원수를 갚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와 자유가 넘치는 세계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고 우리 고유의 땅을 찾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궐기하고 하루빨리 서둘러 시행해야할 첫째의 임무여야 한다.
일본의 마지막 외무대신 마모루 시게미쓰가 천황 히로히토를 대신해서 동경 만에 정박 중이던 미조리 함상에 미국 측 대표 멕아더 장군 앞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할 당시 일본국 중장 우매주도 함께 서명했다. 그런 패망의 일본전범의 나라가 그때의 굴욕을 잊고 있다.
현재 야스쿠니 신사에 태평양전쟁A급 전범 도죠히데키(東條英機)를 비롯하여 14명을 비밀리에 합사(合祀)시켰고, 기시 노부스케 외330명의 명단을 알 수가 없음.
따라서 포스탐 선언6항에 근거 극동 국제재판소 소례제5조항에 근거 유죄판결 받은 14명.
마지막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의 예언(그의 친 손자가 현재 일본의 아베총리)라는 사실.
1879년 일본 이시가와 현(石川縣)에서 태어난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는1944년7월24일 일본 제9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해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 마지막시기 조선 총독을 지냈던 인간이다.
참고: 필자가 초등학교 4학년시절 일본인들이 1945년 8월15일 해방으로 항복하던 몇일 전 한국을 떠나가면서 일본이름(오야마 지로 大山 次郞)을 사용하던 당시 여천소학교(麗川小學校)담임 기무라 여자선생이 교실에서 했던 마지막말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는데 고주넨 아도 미마쇼, 가내모찌산가 되끼대 구루, 소노도끼 미마쇼 네(50년 뒤에 만나자. 돈 많이 벌어 그때 온다)라는 말을 남기고 눈물을 흘리던 당시의 의미를 어려서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몰랐음.
아베 노부유끼는 1897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마치고, 육군 참모본부, 총무부장, 군무국장을 거쳐 1929년 육군차관에 임명,1939년 일본 제36대 수상이 되었지만,5계월 만에 총사퇴 한 후, 여러 직을 거치다가 1944년에 제10대 마지막 조선총독으로 취임하여 전쟁 물자를 지원키 위해 인력과 물자를 일본으로 강제로 착취해갔다.(이유는 비행기와 군함 건조에 필요하다고)
참조: 필자 집에도 당시 수저, 놋 싯기 제사용 조상이 쓰던 그릇 등 구장(지금의 이장)을 동행해 일본 헌병(겐빼따이)이 집안을 삿 삿이 뒤져 강제로 착취해간 것이 한가마 정도였고, 선친은 강제 징용에 붙잡혀 갔음(여수 신월리 해군기지로)이때 당시가 물적, 인적 자원수탈에 혈안이 돼 총력을 기우리던 때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