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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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⑤
  • 장강뉴스
  • 승인 2021.12.20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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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탕수배기에서 학살당한 독립운동가

장흥군은 현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따라 한국전쟁 전후 장흥에서 벌어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 조사·기록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조사에 따라 진실규명신청서를 작성하여 관계 기관에 접수한다. 이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사)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은 본지 지면에 이 아픈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

안양면 수문리 득량만 바다_1950년 7월 21일 밤 11시 무고한 민간인들이 이곳에서 경찰에게 수장, 학살되었다.
안양면 수문리 득량만 바다_1950년 7월 21일 밤 11시 무고한 민간인들이 이곳에서 경찰에게 수장, 학살되었다.

안양 탕수배기에서 학살당한 독립운동가, 수문 앞바다 득량만에서 수장당한 민간인들
장흥군 국민보도연맹 사건(1950년 7월 21일 밤 11시)

1949년 6월 전국 국민보도연맹이 서울에서 결성되고, 전라남도 국민보도연맹준비위원회 결성식은 1949년 12월 13일 전남도청 회의실에서 개최되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국민보도연맹은 이승만 정부가 국가보안법을 제정 시행(1948년 12월)하면서 이른바 좌익 전향자를 보호하고 지도한다는 명분으로 결성한 단체이다.

장흥군 국민보도연맹은 1950년 3월 8일 장흥경찰서 앞 광장에서 1천여 보도연맹원과 각 관공서, 사회단체, 중학 상급생 등이 참석하여 결성되었다.

결성식에서 장흥경찰서장의 개회사로 시작해 결성식 후 시가행진을 벌였다. 가입대상은 주로 한국전쟁 발발 전 1948년 전후 포고령 위반죄 등으로 수감생활을 하였거나, 군대에서 탈영 후 자수한 사람 등이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전남 국민보도연맹 사건(2)’)

장흥경찰은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각 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을 관할 지서에 예비검속 하여 수감한다. 이 가운데 수십 명이 곧이어 장흥경찰서로 이송된다. 아무런 법적 절차도 없는 예비검속이란 명목이었다.

1950년 7월 21일 밤 11시. 후퇴를 앞둔 장흥경찰은 감금되어 있던 민간인 45명을 여럿이 묶어서 한 트럭에 싣고, 안양면 수문리 앞바다로 가기 위해 출발한다.

유재성(1908-1950) 선생_1930년대 대표적인 장흥독립운동가(1950년 그날 보도연맹사건으로 수문 앞바다로 끌려가기 전)
유재성(1908-1950) 선생_1930년대 대표적인 장흥독립운동가(1950년 그날 보도연맹사건으로 수문 앞바다로 끌려가기 전)

 

장흥읍과 안양면 경계인 미륵댕이는 당시 비포장에다 구부러지고 조금은 가파른 길이라 트럭이 천천히 갈 수밖에 없었다. 미륵댕이 근처에서 한 사람이 탈출한다. (이 사람의 증언으로 수문으로 향했던 민간인학살 사건의 일부가 밝혀진다.)

다시 트럭은 수문리로 향해 가는데, 안양 해창저수지 앞을 지나 이른바 탕수배기(산에서 깨끗한 물이 흘러내려 목욕을 할 수 있는 웅덩이가 있었다)에서 다시 아홉 명이 탈출을 시도한다. 그 가운데는 독립운동가 유재성도 있었다.

이들은 이내 경찰의 총구에 쓰러지고 탕수배기에 묻힌다. 며칠이 지나 큰비에 시신들이 노출되고, 가까운 마을 사람들이 그 자리에 나란히 임시로 묘를 쓴다. 얼마 안 지나 이 소식을 들은 유족들이 찾아들어 옷가지나 여러 표식을 보고 시신을 수습해 간다.

깜깜한 어둠 속 겁에 질린 나머지 수십 명의 사람들은 꼼짝없이 수문리 선창으로 끌려간다. 속울음으로 흐느껴야 하는 공포였다.

돛이 달린 선박에 강제로 태워진 사람들은 여러 명씩 굴비 엮듯 결박되어 있다. 득량도 오른쪽 물살이 센 곳으로 선박이 천천히 움직인다. 순간 깊은 침묵 속에 잠겨있던 수문리 마을 사람들은 멀리서 개구리가 떼로 우는 소리를 듣는다.

장흥보도연맹 사건으로 안양면 탕수배기와 수문리 득량만에서 경찰에게 희생된 사람 가운데 지금까지 파악된 명단이다. 증언에 따르면 탕수배기에서 9명, 수문 앞바다에서 35명인데, 그 가운데 27명의 신원이다.

조성섭(용산 풍길) 김선중(용산 풍길) 오경봉(용산 차동) 김남철(안양 사촌) 유경관(안양 사촌) 이월출(용산 풍길) 신영배(용산 풍길) 손광식(안양 사촌) 김형환(관산 죽청) 조갑진(용산 풍길) 김만옥(용산 풍길) 김오진(용산 풍길) 안경복(장흥 건산) 백웅선(용산 상금) 유재성(용산 접정) 임여계(안양 비동) 마상춘(안양 장수) 박옥순(관산 죽청) 정문기(용산 풍길) 위찬(관산 옥당) 위작(관산 옥당) 위경양(용산 어산) 김사촌(용산 풍길) 이수동(용산 풍길) 유경만(안양 사촌) 김만행(안양 사촌) 정재경(관산 농안) _총 27명(제1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 파악한 희생자와 최근 발굴한 희생자까지 포함한 명단)

유재성 등 민간인 9명이 학살당한 안양면 탕수배기_왼쪽부터 정종숙(독립운동가 정진수 후손) 이영권(장흥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장) 유영복.
유재성 등 민간인 9명이 학살당한 안양면 탕수배기_왼쪽부터 정종숙(독립운동가 정진수 후손) 이영권(장흥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장) 유영복.

 

장흥의 여러 마을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 해방 후 농지개혁과 통일 정부를 주장하는 농민운동을 주도했던 유재성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각 읍면 지역에서 주동자급들이 아닐까 짐작한다.

장흥보도연맹 관련 민간인 피해자 유재성(당시 43세)은 1934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비밀결사 ‘전남운동협의회’ 사건 등으로 두 차례 구속되어 3년여 옥고를 치른 장흥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유재성은 독립운동을 같이했던 동지들과 장흥군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각각 문화부장으로 활동한다.

하지만 미 군정기인 1947년 10월 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받고 목포형무소에 수감된다.

판결문을 보면 “강제공출반대” “고율세반대” 등 당시 미 군정 정책을 비판하는 전단을 살포하고 농민시위를 조직한 혐의였다.

출옥 후 1950년 광주에서 거주하던 유재성은 노모의 병환이 깊어 고향 마을 용산면 접정리로 내려온다.

장흥보도연맹에 자신의 의사와 달리 가입되었던 유재성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예비검속되어 용산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장흥경찰서 유치장에 불법 감금된다.

그해 7월 21일 밤 경찰 트럭에 실려 가는 데 죽음의 공포를 느낀 유재성은 몇몇 사람들과 안양 탕수배기에서 탈출을 감행한다. 경찰은 곧바로 이들을 사살한다.

유재성도 사살된다. 이후 며칠이 지나 부인이 시신을 수습한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동지고 벗이었던 독립운동가 정진수(해방 전 사망) 가족이 임야를 내놓아 용산면 인암리에 묘소를 썼다. (진실화해위원회에 접수한 ‘유재성 진실규명신청서’ 가운데)

유재성을 포함한 장흥보도연맹 희생자들에게 화인처럼 찍혀있는 ‘빨갱이’란 낙인을 이제는 훌훌 벗길 때가 되었다.

또한, 당시 장흥 곳곳에서 자행되었던 이른바 적대세력(지방 좌익과 인민군)에 의한 민간인학살도 진실규명 되어야 한다. 이들은 ‘반동’이란 낙인 속에 죽음을 맞이했다.

장흥에서 처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의 원혼을 달래는 위령제가 안양면 수문리 키조개 선창에서 열린다(2021년 12월 22일 수요일 오후 2시). 이른바 좌우를 떠나 무고하게 돌아가신 모든 이들을 해원하는 씻김굿이 될 것이다. 엊그제 위령제를 준비하러 간 수문 앞바다는 서늘하고 따뜻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제공=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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