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칼럼 - 최일중(성균관 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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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칼럼 - 최일중(성균관 전인)
  • 장강뉴스 기자
  • 승인 2016.08.05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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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光復)과 분단의 과정

7월은 옷과 책을 햇볕에 말림. 중원(中元) 백종일(百種日) 백중일(白衆日) 망혼일(亡魂日)에 승려들이 부처님께 제를 올림. 경사대부(卿士大夫) 집에서는 올벼로 삭망차례(朔望奠)를 지냄. 시암(샘)제를 지냄.
71년 전 오늘 우리민족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았다.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 조국광복을 맞이한 참으로 기쁜 날이다.
뜻 깊은 날을 맞아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선열들께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하며 독립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께 충심으로 존경과 위로의 말씀을 드리는 바이다.
돌이켜 보면 기나긴 반만년 민족사의 발전과정에서 우리겨레는 이민족의 그치지 않은 침입으로 많은 위란을 겪어왔다.
하지만 조국 강토가 위기에 처 할 때 마다 호국선열들께서는 분연히 일어나 온 몸으로 나라와 민족을 구해냈다. 나라를 잃은 어둠속에서도 우리 선조들은 항일 독립투쟁을 멈추지 않았으며 민족의 생명과 국가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선열들의 희생과 공로가 있었기에 오늘날 자유와 활력이 넘치는 번영된 대한민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고 이제 또다시 한반도 평화의 대전환점이 되어 기쁨마음을 금할 수 없다.
자랑스런 광복절을 맞게 되는 우리는 선열들이 쌓아온 영광의 위업을 이어받고 조국의 밝은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모든 국민의 힘과 지혜를 하나로 모아 나가야 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 민족은 조국을 잃은 지 35년 만에 마침내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종전이 가까워지자 미국과 소련은 일본국의 무장해제를 위해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북에 각각 미군과 소련군을 임시로 주둔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미군과 소련군이 남한과 북한에 각각 주둔하게 됨으로써 우리 민족은 광복의 기쁨이 체 가시기도 전에 38선으로 조국강토의 허리가 끊기는 국토분단의 비극을 맞게 되었다. 38선을 경계로 우리나라를 남북으로 분할 점령한 미국과 소련은 영국과 함께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에서 3국 외상회담을 개최하고 한국 민이 자치 능력을 갖출 수 있을 때 까지 5년 동안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나라에 전해지자 대다수의 국민이 단결하여 이에 반대했다. 35년간이나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아온 우리민족이 이제 또 다시 강대국들에 의해 신탁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탁통치 안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일부 있었다. 이들은 우리의 당시 국내외적 상황으로 볼 때에 신탁통치 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되어 우리민족은 강대국들이 결정한 신탁통치 안을 놓고 찬탁과 반탁으로 크게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다.
한편 이미 냉전 상태에 들어가기 시작했던 미국과 소련은 한국독립에 관한 공약의 실천보다 반탁세력과 찬탁세력들을 각각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했다.
이와같은 우리민족 내의 분열과 미?소간의 대립은 임시정부수립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에서도 계속되어 결국 두 차례에 걸쳐 개최되었던 회담이 모두 결렬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북한은 1946년 김일성 중심의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시켰고 이듬해에는 북조선인민위원회라는 그들만의 사실상의 정부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남한의 미군정 역시 북한의 이런 움직임에 자극을 받아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할 것을 추진했다.
1947년 11월 유엔총회는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고 그들의 감시 아래 인구비례에 따라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 정부를 구성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북한 지역에 들어오는 것조차 거절했다. 이에 따라 유엔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했다.
이 때 김구선생과 김규식박사를 비롯한 일부 민족지도자들은 민족의 분단을 막아보려고 끝까지 노력했었다. 이들은 통일 정부의 구성을 위해 북한 측에 대하여 남북협상을 제의 하였고 이 제의에 따라 남북한 지도자들이 평양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러나 북한의 김일성 일파는 이들의 민족을 위한 애국적인 노력을 무시하고 마치 이들이 북한의 입장을 지지하기 때문에 평양을 방문한 것처럼 정치선전에 이용하려고만 했다.
남북협상이 실패로 끝난 뒤 남한에서는 유엔의 결의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했다. 그리고 그해 7월 17일에는 헌법을 공포하고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의 정부수립을 정식적으로 내외에 선포했다. 또 그 해 12월에 파리에서 개최된 유엔총회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 내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한편 남한보다 앞서 사실상의 단독 정부를 구성했던 북한은 1948년에 대한민국정부의 수립이 내외에 선포되자 곧바로 선거를 실시하여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고 이어서 이른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이와 같이 하여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키기 위한 군사적 필요에 의해 잠정적으로 설정되었던 38선은 분단의 장벽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통일을 절실히 원하던 우리민족의 바람과는 동떨어진 미?소간의 대립과 우리민족 내부의 분열이 빚어 낸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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