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운현은 이웃동네에 있는 일본인 소유의 과수원에 다니면서 머슴처럼 일했다. 배 밭에서 일할 사람을 구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찾아갔었다.
과수원집에는 자신과 같은 또래의 딸과 아들이 있었다. 어렸을 때에 가끔 배 밭 구석에서 과수원집 아이들과 소꿉장난을 하며 친하게 지냈었다.
언젠가 배나무 밑에서 놀다가 똘기 배를 따먹었다. 주인에게 붙잡혀 꾸지람을 들었다. 그 일로 심부름을 하는 대가를 치렀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배나무 가지치기, 배꽃 속구기, 배 속구기, 배 싸주기, 잡초제거하기 등의 일을 도와주며 끼니를 해결하기도 하였다.
이제는 사정이 달랐다. 아버지가 병으로 일할 수 없기에 가족을 책임져야할 가장이 되었다. 늙으신 할머니, 병든 아버지, 어머니, 어린 동생들이 자신의 손에 달려있었다.
자신의 행동여하에 따라 가족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였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도 살아남아야 되었다.
‘나와 가족이 살아가려면….’
운현은 가마솥 같은 삼복의 더위 속에서 작업했다. 배 밭에서 낫으로 풀을 베며 잡초를 제거하였다. 땡볕 속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일했다.
“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시냐?”
돌쇠는 어린 운현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날이 갈수록 더 심하신 것 같아요.”
운현은 풀을 베다가 허리를 폈다.
“소학교에 다닌다면서?”
돌쇠는 과수원에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다. 소학교에 다녔다는 어린 운현이 대견하고 부러웠다.
“학교에 다니고 싶지만….”
“아버지가 병들어 어린 네가 가장노릇을 하는구나?”
“어쩔 수 없지요.”
“소학교에 다니지 못하겠네?”
“어떻게든 졸업을 해야 하는데….”
“꼭 졸업하고 싶어?”
“끝을 보아야지요. 포기는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다시 다닐 겁니다.”
“몇 학년인데?”
“6학년을 며칠 다니다가….”
“정말 안 되었구나 몇 개월만 견디었으면 졸업은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운현은 아쉬워 입술을 빨았다.
“아버지의 병이 나으면 졸업은 해야지?”
“물론이죠. 무슨 일이 있어도 졸업은 할 겁니다.”
운현은 낫자루를 힘껏 움켜쥐고 풀을 베기 시작했다. 매미는 배나무가지에 앉아서 시원하게 노래했다. 답답한 가슴이 뚫리는 것 같았다. 바람이 지나가면서 이마의 땀을 씻어주었다. 하늘에는 잿빛 구름이 덮어 햇빛을 가려주었다.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제비들이 배나무 위를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저기 주인 온다. 빨리 일하자.”
돌쇠는 운현에게 눈짓을 하며 푸새를 베기 시작했다.
“저 구름에서 소나기라도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운현은 저고리의 옷깃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입술을 깨물며 허리를 굽혔다. 칠칠하게 자란 풀을 낫으로 쳐댔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살갗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괴롭혔다.
5
태양은 서산의 해넘이를 찾아 기어들어갔다. 저녁노을이 검붉게 물들어갔다. 어느새 땅거미가 찾아와 내려앉더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어둠은 대지 위를 포장처럼 감싸 덮었다. 휑뎅그렁한 마당의 공간에는 어둠이 가득 담겨 캄캄해졌다. 하늘에는 별들이 찾아와 자리 잡고 앉아서 반짝거렸다. 어두워졌는데 뒷집 텃밭에 있는 감나무 가지에서는 매미가 한을 토해내듯 울어댔다.
‘어두워진지가 한참 되었는데….’
행동 댁은 큰아들을 기다리다가 어린 자식들이 칭얼대어 저녁밥을 먹이었다. 시어머니는 한 숟가락 뜨더니 수저를 놓아버렸다. 남편에게는 미음을 쑤어서 한 그릇을 억지로 먹였다. 설거지를 막 끝냈다.
‘두 째 아들 순조까지 아프니….’
행동 댁은 부엌에서 나가 사립문을 바라보았다. 순조는 시어머니가 옆에서 돌봐주고 있었다.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으니 불안했다.
‘전 생애에 내가 무슨 죄를 많이 지었기에…?’
행동 댁은 마당을 서성거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샛별이 국사봉 위에서 푸른빛을 뱉어내며 반짝거렸다.
‘해가 졌는데 무얼 하고 있지. 빨리 오지 않고!’
행동 댁은 해가 지자 과수원으로 품팔이 간 큰아들 운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 올 시간이 되었는데 오지 않아 애가 탔다. 눈동자가 빠질 것처럼 아팠다.
‘어린 자식은 남의 집에서 품팔이 하는데 어미라는 년은 집구석에서….’
행동 댁은 고생할 자식을 생각이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여자인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고 핑계를 대며 위로했다. 속이 쓰리고 가슴은 미어지는 듯 아팠다. 해거름이 되면 자식을 기다리며 애태우는 것으로 아픈 마음을 달래며 위로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자식이 다니고 싶어 하는 소학교는 보내지 못하고….’
행동 댁은 옷고름으로 눈가를 닦았다. 어미인 자신이 미워졌다. 무능하여 죄만 짓고 있는 못 된 여자였다. 뾰쪽한 해결책이 없어 더욱 안타까웠다.
‘나라는 빼앗겼고 세상은 어지럽고 삶은 고달프고….’
행동 댁은 사립문을 나섰다. 북두칠성을 찾으며 속으로 흐느꼈다. 나라 잃은 서러움까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겼기 때문에 삶이 더욱 고달팠다. 먹을거리까지 공출로 갈취당하여 가족이 굶주릴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어떻게 될까?’
행동 댁의 근심은 앓아 누워있는 남편에게로 옮겨갔다.
‘돈이라도 있으면 한약이라도 원 없이 달려 먹였으면 좋겠는데….’
행동 댁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만약에 행동양반이 죽게 된다면…?’
행동 댁은 사립문 앞에서 저승사자를 본 것 같은 상상을 하며 깜짝 놀랐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면서 고개를 저어댔다.
‘남은 식구들은…?’
행동 댁은 생각도 하기 싫어 하늘의 별자리를 찾았다. 눈에서는 서러움이 끊임없이 솟아났다. 바로 이것이 슬픔인 것 같았다. 아무런 대책이 애간장이 타고 가슴이 터지려고 하였다. 〈다음주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