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장흥 지역인물 삶의 여정과 후손에 끼친 영향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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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장흥 지역인물 삶의 여정과 후손에 끼친 영향 ⑤
  • 조창구 기자
  • 승인 2017.11.20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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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농민군 ‘절암 윤세현 접주와 후손’

윤세현 ‘장흥 강진 완도지역 천도교 부활에 공헌’
장흥전투 참여 패전…40일간 산속생활 ‘목숨보존’

▲ 윤세현 접주
강진 대구면 출신으로 동학농민혁명 장흥전투 등에 참여했다 패전 후 피신해 숨어살다 생환 장흥과 강진, 완도지역 천도교 부활에 공헌한 사람이 있다.
강진 대구면 수동마을에 살고 있는 윤재라씨의 증조부 절암 윤세현 접주.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해 목숨을 바쳐 기울어가는 조선을 개혁하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기록이 전하지 않고 있다. 이렇듯 안타까운 죽음들이 많은 가운데 절암 윤세현의 기록은 후손 윤재라씨의 자료수집 노력과 장흥지역 천도교 지도자 김재계씨가 쓴 천도교회 월보 환원동덕 등에 기록으로 전해져 그 발자취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갑오동학혁명혈사’에 의하면 수만 명이나 되는 농민군과 관군 일본군이 대치한 석대들 전투에서 농민군은 처참하게 패배했다. 전투경험이 풍부한 일본군이 기관단총 등 최신 무기의 화력 앞에 농민군들은 우수수 쓰러졌다.
전의를 상실한 일부 농민군들은 뿔뿔히 흩어졌지만 윤세현 등 일부 농민군은 남면(용산면), 고읍면(관산읍)으로 전투를 이어갔다.
대흥면(대덕) 대접주 이인환과 합세한 윤세현 접주는 고읍천(古邑川)을 사이에 두고 3∼4시간 싸운 옥산촌 전투에서 패해 일본군과 관군에게 쫓기게 됐다. 12월이라 눈이 엄청나게 오는데다 날도 저물어가자 추격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 윤세현 접주 자료
쫓기는 신세가 된 윤세현은 40여일간 산속에 숨어있다 살던 동네를 찾았다. 바로 위 형님집을 찾아갔다. 형수가 앉았으라고 하면서 대접을 했다. 그리고 형수가 나가서 ‘육도왔다네’라고 소리를 질렀다. 관군들이 모여 총 노리쇠를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나자 황급히 피신했다.
▲ 윤세현 접주 증손 윤재라씨 은동장 설명
윤세현 접주의 가족들도 죽음의 위기를 맞은 적도 있었다.
윤세현 접주가 피신간 사이 관군이 집에 찾아와 부인과 자식들을 방안에 놔두고 불을 질러버렸다. 이때 마을사람 한 분이 봉창(창문)으로 구해줘 살아놨다. 더 이상 동네에서 살기 힘든 형편이 되자 가족들이 대덕 연정리로 피난갔다.
▲ 갑오동학혁명혈사
식구들을 피신시키고 농민전쟁의 수습도 끝나고 세상의 눈초리가 잠잠해지자 다시 교단활동을 벌였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장흥교구의 세를 확장해나가 김재계에게 장흥 성신포를 완도 약산 인지포를 신명희에게 관리자격을 부여 했다.
일제강점기 멸왜기도운동을 벌여 황해도까지 잡혀가 고난을 겪기도 했으며 1919년 기미독립선언때는 전남지역 독립자금 모금위원으로 활동했다.
절암 윤세현이 강진지역 접주로 활동했었던 사실은 1896년 용담 최제우와 해월 최시형 교주의 연명으로 된 문서에 ‘강진 전 집강 겸 접주 윤세현’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밖에도 동학교주 최제우, 최시형 천도교 손병희, 박인호 교주의 영정사진과 신명희, 김재계와 함께 윤세현 교구장의 사진도 보관되고 있으며, 4대 천도교 춘암 박인호 교주가 수여한 포장도 잘 보관돼 현재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윤세현 증손자 윤재라씨

▲ 증손자 윤재라
부친의 병간호를 위해 고향으로 내려와 정착하게 됐다는 윤재라씨.
절암 윤세현의 후손 윤재라씨는 구전으로 하신 부친 윤건하씨의 말씀들을 적다가 과연 남에게 떳떳하게 얘기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어 자료를 찾고 기록을 뒤지게 됐다고 한다.
당시 장흥교구장 김동철씨를 찾았는가 하면 직접 천도교 수련관인 봉황각을 방문해 자료를 찾아 복사해올 정도로 정성을 쏟았다.
동학에 대해 윤재라씨는 “실제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은 사회를 바꾸자는 개화목적의 운동성격이 강했다고 본다”며 “일제의 탄압 때문인지 3대 손병희 교주에 가서 종교적 색채가 강해졌다”고 설명했다.
윤씨는 “증조부님이 동학과 천도교 활동하시면서 가족들은 제대로 돌보지 않아 가족들은 궁핍하게 사셨다고 들었지만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증조부님은 특별법으로 유족 인정돼 명예회복은 됐지만 아직 신청 못한 분들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며 “그분들을 위해서는 과거사 진실규명위원회의 복원도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또 “유족자격도 손자까지만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세월이 흐른 점을 감안 고손자까지 등록해줄 필요가 있고 동학농민유족들에게 국가유공자나 항일운동에 준하는 배려가 있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 천도교 교주와 윤세현 접주 초상화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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