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장흥 지역인물 삶의 여정과 후손에 끼친 영향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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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장흥 지역인물 삶의 여정과 후손에 끼친 영향 ④
  • 조창구 기자
  • 승인 2017.11.13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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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수성군 ‘오학인 오위장·오필근씨 후손’

후손 오춘기씨 증조부·조부…장흥부 장령성 사수하다 사망
오춘기씨 부친 오철호씨 ‘당시 4살… 장롱속에 숨어 살아’

▲ 오춘기씨와 김금순 부부
동학농민혁명 당시 수성군으로 장령성을 지키다 사망한 96인 중에 증조부와 조부님을 잃었다는 후손을 만났다. 장흥군 장흥읍 연산리에 살고 있는 오춘기(82)씨다.
본향이 화순 동복으로 동학농민혁명 당시 65세(1830년생)인 증조부 오학인씨가 오위장으로, 조부 37세(1858년생)인 오필근씨가 장흥부가 위치한 장령성을 지키는 수성군에 참여해 1894년 12월 5일 두 사람 모두 사망했다.
당시 장령성을 지키다 사망한 수성군의 후손들은 장흥읍 남산아래 영회당을 짓고 매년 음력 3월 15일 조상들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당시 오춘기씨의 부친인 오철호씨는 외동아들로 4살밖에 안된 어린 나이였다. 장흥부 공무원이었던 증조부, 조부와 함께 관아 근처 동동리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농민군들이 들이닥쳐 목숨이 위태로운 전투 와중에 잘못했다간 대가 끊길 수도 있는 상황에서 오철호씨의 어머니가 장롱속에 숨어있으라는 말에 숨어있다 그곳에서 잠들어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시아버지와 남편을 잃은 오 씨의 할머니가 성안에 얼마간 살다가 집을 팔고 ‘북밖에(장령성 북문밖)’라 불리던 장흥읍 연산리로 이사했다.
▲ 수성장졸 순절비
연산리에는 할머니의 자매가 살고 있어 오게 됐다. 할머니의 친정은 송씨로 당시 동동리에서 짱짱한 집안이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음에도 오씨의 부친은 관서제라는 서당엘 다니며 공부할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때 장흥군은 인근 지역에서 군수부터 법원 근무자 등 일본인들이 제일 많이 살았던 곳이었다고 한다. 장령성과 강진읍성, 병영성이 함락돼 행정마비 상태에 빠졌었던 지역인 데다 석대들전투의 현장이 있었던 곳이다보니 일제의 주요 관리지역이었던 셈이다.
그렇다 보니 일제의 수탈과 공출로 더 힘들었다고 한다. 일본인 군수가 총독부의 공출요구대로 바치는데 강진은 한국인 군수가 하소연해 적게 냈다. 부족한 식량은 강진서 팔아다 먹어야 했다고.
오춘기씨는 46살부터 80살까지 34년간 계속해서 마을이장을 특별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만큼 동네사람들의 신임을 받았는데 비결은 집안일 제쳐두고 마을일에 솔선수범하고 동네사람들의 애로점을 해결하는데 누구보다 앞장섰기 때문이었다고.
요즘은 관공서업무가 컴퓨터로 처리되지만 그전에는 모든 문서를 수기로 작성해 처리하던 시절이라 이장이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글을 모르는 사람도 많던 시절이라 농사관련은 물론 출생이나 사망신고 등 행정이며 농협업무, 경찰서, 검찰관련 일도 도맡아 처리하다시피 했다. 계속 할 수도 있었지만 30만여평 마을소유의 산 매각문제로 이장직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재작년 마을이장직을 내려놓은 오씨는 강진 병영에서 노둣길을 건너 시집온 부인 김금순(78)씨와 3남2녀를 낳아 모두 대학을 졸업시켜 키워내고 부인 김여사와 농사일을 하며 고향집을 지켜오고 있다.

 

 

■수성군 후손 오춘기씨

▲ 족보를 설명하는 오춘기씨
오춘기씨는 동학농민혁명 당시에 대해 “조정이 엉망진창이던 시절 고부군수가 보를 또 만들어 수세를 걷는 것이 발단이 돼 터진 것으로 알고 있다”며 “중국 장개석정부 미국이 무기대주면 다음날 공산당에게 팔아 먹어 결국 부정부패로 패망했듯 동학농민혁명 발생도 정부의 부정부패가 근본원인이다. 나라가 부정이 없어야 튼튼하고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진단했다.
▲ 오춘기씨
오 씨는 “당시 수성군의 가족중에는 유복자를 가진 미망인도 있었는데 휘교의 부인이 마을뒤 산속에 산신당을 만들어 지내면서 자식들을 키워낸 사람도 있다”고 소개하며 “옛날엔 호랑이가 밤에 내려온다는 말도 있었는데 어떻게 살아냈는지 모른다. 열녀비라도 세워드려야 할 사람”이라고 말했다.
123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증조부와 조부님이 돌아가신 것에 대한 비통함 느낀다는 오춘기씨.
오 씨는 “오위장이셨던 증조부님과 조부님이 돌아가시고 아무 보상도 없었다”며 “영회당도 국가보조 없이 후손들이 돈을 걷어서 지은 건물”이라고 말했다.
이어 오 씨는 “동학혁명은 조정(정부) 잘못으로 발생한 일로 농민군이든 수성군이든 양쪽 다 피해자라고 생각한다”며 “그때와 같은 그런 일은 다시는 생기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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