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 동학농민혁명 장흥 지역인물 삶의 여정과 후손에 끼친 영향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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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 동학농민혁명 장흥 지역인물 삶의 여정과 후손에 끼친 영향①
  • 조창구 기자
  • 승인 2017.10.11 15: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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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동학농민군 장군-이방언 장군과 그 후손의 애환

‘남도장군 이방언 장군과 증손자 이종찬 전 유족회장 그리고 아내 박회림 여사’

■‘남도장군’ ‘장태장군’ 이방언 장군

▲ 남도대장군 이방언
‘남도장군’,‘장태장군’으로 불렸던 이방언 장군은 장흥군 남면(현 용산면)에서 부유한 유학자집안에서 태어났다. 조선말 외척들의 세도정치와 수탈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원성이 높던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장흥지역 동학접주로 동학농민혁명군을 이끌고 장성 황룡강전투에 참가 장태를 만들어 승리로 이끌어 전주화약과 폐정개혁안을 관철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해 동학농민혁명 1차기포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인물이다.
집강소 설치와 개혁적 조치를 벌이고 있던 이방언 장군은 일본의 침탈에 맞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 2차기포에서 우금치전투에 참여했다 조일연합군에 밀린 후 철수해 장령성과 강진읍성, 병영성을 차례로 함락시켜 동학농민혁명군의 부활을 시도했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의 신식무기 앞에 동학농민혁명 최후의 대규모 격전지인 석대들 전투에 패해 체포당해 나주로 압송 서울 권설재판소에서 무죄방면됐으나 친일개화파 전라감사 이도재의 체포령에 의해 장대(장흥서초등학교 자리)에서 아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이방언 장군 증손자인 故 이종찬(前 장흥군동학농민유족회장)

▲ 이종찬 회장
이방언 장군의 증손자로 동학농민혁명 당시 증조부(이방언 장군)와 조부(이성호)를 한꺼번에 잃은 故 이종찬 전 장흥군동학농민유족회장.
지난 7월 중병으로 인해 고인이 되신 이종찬 회장은 장흥동학농민혁명 명예회복과 기념탑 건립 등에 일등공신으로 통한다.
28살 군제대후부터 동학에 대해 관심을 갖고 묻혀진 진실을 찾고 유족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막내로 태어난 부친에 이어 자신도 막내로 태어났지만 가족이나 친척들도 동학에 대해 외면하던 터라 자신이 팔을 걷어붙였던 것이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석대들 전투 등에서 패한 후 이방언 장군의 가족들도 피난에 나섰는데 막내였던 부친이 갓난아기였다.
가족들은 갓난아기를 기저귀에 싸서 집 인근 월림마을 다리밑에 버리고 가버렸다. 피난 도중에 아기가 울면 가족들이 다 죽게 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집에 데리고 있던 종이 불쌍하다며 도복에 싸서 품속에 데려와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용산면에 살면서 사업수완이 좋았던 이 전 회장은 가게며 집안일은 아내인 박회림 여사에게 맡기고 동학 관련 일이라면 열일을 제쳐놓고 돌아다녔다.
유족회의 활성화를 위해 각 읍면마다 다니며 후손을 찾아 설득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동학관련 행사를 위해 모금에도 앞장서서 기부금을 내는 등 추진력도 인정받았다.
전국에 있는 동학농민혁명유족회와도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중앙회 상임이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2015년 몸이 좋지 않아 병원을 찾았다 큰 병원을 찾아가라는 말에 전남대병원에서 검사와 수술을 받았지만 1년만에 재발해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했다.

■故 이종찬 회장 부인 박회림 여사

▲ 이종찬 회장 박회림 여사
고인이 되신 남편 이종찬 전 장흥군동학농민유족회장이 활발하게 활동하는데 적극적인 내조로 뒷받침해온 박회림(76)여사.
22살에 관산 용전마을에서 이 전 회장에게 시집와 면소재지에서 15년 동안 리어커도 팔고 자전차포, 철물점, 다방, 탁구장에 용달차사업도 운영하는 등 억척같이 남편을 뒷바라지 해왔다. 남편이 39살에 용산면의용소방대장이 된 후부터는 외부활동이 많아지면서 거의 아내인 자신이 직접 자전거의 빵구를 떼우고 용접도 하면서 살림살이를 도맡다시피 했다.
동학관련 모임이나 행사에 간혹 십시일반 모금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자비로 다녀야 했다. 남편이 유족회장으로 있을 때 도시락 등 준비해주는 등 챙겼다. 1년이면 몇 백만원씩 들었다는 얘기가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 이종찬 회장과 박회림 여사
장흥 동학에 대해 박회림 여사는 “나는 같이 다니기만 했지 내용은 잘 모른다. 남편은 기억력이 좋아 한번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는 양반이었다” 며 “남편은 젊어서부터 돌아가시기 한달 전까지 온통 동학농민혁명의 명예회복과 선양, 유족들에 대한 예우 등에 대해서만 생각했던 사람이었다”고 회술했다.
박 여사는 “장흥동학농민혁명의 상징적 존재인 증조부 이방언 장군 동상 하나 세웠으면 좋겠다며 1년만 더 살았으면 쓰것네 하다 돌아가셨다. 그 점이 아쉽다”고 했다.
이방언 장군 생가를 관광객들이 찾는 장소로 했으면 좋겠다는 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선조들은 부패척결과 평등사회를 통해 인간답게 살기위해 동학농민혁명을 했다면 그 후손들은 동학농민혁명의 진정성과 선조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 동학농민혁명기념식

★취재에 협조해 주신 박회림 여사에게 감사드리며, 故 이종찬 회장님 명복을 빕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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