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성 장흥군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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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성 장흥군수〈2〉
  • 임순종 기자
  • 승인 2014.06.18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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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서로 다졌던 결심들과 마음들,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지 반성해본다”

■가난과 역경을 딛고

 
◇어린 어깨 위에 얹힌 가난
김 당선인은 1959년 장흥 관산에서 태어나 관산에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마친 뒤 광주 금호고등학교, 건국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했다.
6남 1녀 가운데 넷째로 태어난 김 당선인의 어린 시절은 참 가난했다. 아버지는 해직 경찰공무원으로 농사를 짓던 사람이 아니어서 직장을 잃고 난 뒤 그야말로 사는 일이 막막했을 것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공무원 하던 가락과 일곱이나 되는 자식들이 전부였으니, 하루에 세 끼 모두 찾아먹는 날은 극히 드물어서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김 당선인은 그 시절 우리에게 가난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 할 친구였다. 하지만 가난은 때로 비수가 되어 어린 가슴에 꽂히고는 했다. 가난했다고 해서 주눅 든 적도 없었고, 밥을 굶는다고 해서 부모님을 원망해본 적도 없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김 당선인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딱 하나의 기억을 회상하면 여전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사건이 있었다. 돈 없는 설움이 어린 초등학생의 가슴을 멍들게 했던 최초의 사건은 초등학교 1학년 때 미술시간에 사용할 그림을 그리는 도화지를 준비해야 했다. 당시 도화지는 1원에 두 장 이었다. 1원으로 도화지를 산다는 것이, 그 당시 우리 집 형편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어머니께 말을 하지 않고 도화지를 가져가지 못했다. 친구들은 도화지를 준비해 왔다. 선생님은 어쨌느냐고 물으며 교실 밖으로 쫓아냈다. 차디 찬 복도에 무릎을 꿇린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손가락 뼈 마디마디를 날카로운 자로 맞았다. 그때 무릎에 와 닿았던 마루 복도의 거칠고 차디찬 느낌과, 손가락 마디를 끊을 듯했던 아픔을 지금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도화지뿐이었으랴. 학년이 올라갈수록, 상급 학교에 진학할수록 가난은 더욱 실감나게 다가왔다. 고등학교 때 수업료를 내지 않아 선생님에게 얼마나 심하게 맞았는지 몇 일간 학교에 갈 수 없었던 시절도 있었다. 가난의 슬픔과 설움을 몸서리쳐 지도록 실감했다고 한다.
그 시절을 겪고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김 당선인은 “내 아이들이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설움만은 겪지 않도록 하자”라는 것이 그때 한 결심 가운데 하나였다.
김 당선인은 세상에서 제일 큰 설움이 돈 없어 밥을 굶는 설움이고, 그보다 더 깊고 큰 상처는 돈 없어서 못 배우는 설움이라고 말한다.
배고파본 경험,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할 위기에 처해본 경험들이 서민들을 위한 정치의 밑바탕이 되었다.

 
◇민주주의의를 염원한 아버지
김 당선인의 아버지는 해방 이후 초등학교 교사로 교편을 잡고 있었다. 당시 장흥 용산이 유독 좌익 활동이 활발했었다. 좌익에 끌어드리려고 갖은 회유와 협박, 좌, 우 이념대결이 극심해지자 경찰이 되면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을 거란 생각에 교사를 그만두고 경찰이 되었다. 그러나 경찰이란 직업은 아버님 성품에 전혀 맞지 않았다. 경찰에 재직하면서 선거개입과 범인검거 같은 상부의 지시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고, 오직 공부에만 전념하여 시험으로 승진을 했다.
박정희 군사 쿠테타가 일어나며 경위로 재직당시 강제해직을 당했다. 그 때 나이 겨우 서른 살이었다. 퇴직 이후 야당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인생의 고난과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김 당선인 아버지는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이룩되어 다시는 나처럼 억울하게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 한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어서는 안된다”라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갈망했다.
김 당선인은 “아버지가 20년 동안 일관된 지조와 신념으로 야당생활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아버지가 원했던 민주주의의 대한 염원이었으며, 이 땅의 진정한 자유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었다”고 말한다.

◇소년, 정치에 눈을 뜨다
김 당선인은 아버지의 생각과 활동이 삶에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이다. 아침조회시간에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교장 선생의 훈시를 하는 시간이었다. 마침 그때가 국회의원 선거가 있던 때였다. 교장 선생은 선거와 관련 여당 사무총장이었던 모 후보를 홍보하며 여당후보를 지지하는 말을 했다. 그 때 교장 선생의 훈시가 끝나고 4학년 꼬마인 김 당선인은 구령대에 뛰어 올라가 “여당 후보가 떨어지고 야당 후보가 당선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아버지가 복직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한술 더 떠 “야당 후보가 당선되면 우리 아버지는 다시 경찰에 복직 될 수 있고, 경찰서장이 될 것입니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학교는 난리가 났지만 어린 꼬맹이이의 돌발행동 정도로 치부되어 큰 문제로 번지지는 않았다.
김 당선인은 “그 때 행동은 결코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맹이의 돌발행동이나 어린아이의 우발적인 행동이 아니었다”며 “아버지의 복직이 간절했고, 아버지가 그토록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란 행동이었다”고 회상했다. 그 사건이 김 당선인이 세상에 내지른 첫 번째 고함이었다.
김 당선인의 생에 최초의 본격 선거운동은 1971년 중학교 1학년 때 김대중 후보가 박정희 후보에게 맞서 대통령 후보를 출마할 때였다.
김 당선인은 대통령 선거 유세가 한창이던 어느 날 가방에 김대중 후보의 유인물을 가득 집어넣고 학교에 가 교실을 돌며 아이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었다. 유인물 사건으로 학교가 발칵 뒤집히고 결국 교무실에 끌려가 엄청 많이 맞으면서도 해야 할 일을 했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맴돌았다고 말한다.
김 당선인은 “초등학교, 중학교 때 이 두 가지 사건은 내가 앞으로 어떤 길을 가야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일종의 암시였다는 생각이 든다”며 “어린 내 눈에도 참 불합리하고 정의롭지 못했던 사회에 대한 환멸이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 당선인은 “스스로의 에너지로 최초의 정치적 행동들을 과감히 펼쳤고, 그 때의 그 경험들을 지금도 나에게 커다란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온몸으로 광주를 만나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집안 형편에 광주로 고등학교를 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지만 부모님의 교육열이 광주 유학의 길로 이끌었다.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 아버지가 무리해서 벌인 사업이 부도가 나고, 가족들이 뿔뿔히 흩어지게 되었다. 고향으로, 외가로, 서울로 제각기 흩어져서 우선 각자 살 길을 찾아야 했다. 부모님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셨고, 대학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더 큰 문제는 중학생, 고등학생 동생 2명이 학업을 중단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그 때부터 일을 시작했다. 시외버스 터미널 매표원으로 취직. 비록 적은 월급이었지만 동생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보태 그나마 학업을 중단하지 않아도 됐다. 그러던 중 김 당선인 인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사건을 맞게 되었다.
1980년 4월 당시 광원여객 매표소 소장과 한일여객 기사 사이에 시비가 생겨 두 사람 모두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때 매표원으로 일할 때 일어난 사건으로 두 사람의 싸움을 말리는 역할를 했다. 싸움을 말리다가 생애 처음으로 파출소라는 곳을 가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한달 뒤인 5월 5·18광주민주화항쟁이 일어났다. 5월 17일 광주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 전두환 독재정권이 광주를 폭력진압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김 당선인의 가슴속에서는 무언가가 치솟아 올랐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직 광주 생각뿐이었다. 지금 당자 가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광주를 눈으로 확인하기로 결심하고 친구와 함께 광주에 갔다. 그날이 바로 5월 17, 18일이었다. 이틀 동안 금남로와 충장로 일대를 돌아다니고, 19일 20일에는 산수동일대에서 시위대에 참가한다. 21일 군인들이 온다는 소문과 진압군의 움직임은 심상찮았고, 사태는 더욱 급박하게 돌아가고 시위는 더욱 치열해져 이대로 광주에 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친구와 같이 고향으로 내려오는 버스를 타고 가는 중 검문소에서 불심검문으로 경찰서에 연행되고 말았다. 경찰은 광주에서 시위참여자라고 구타와 함께 무섭게 추궁했다. 그렇게 광주에 대해서 계속 부인하자, 한 달 전에 있었던 광원여객 소장과 한일여객 기사의 싸움을 들추며 “너도 공범이지”하며 ‘싸움 장소에 같이 있기만 해도 공범’이라는 것이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데다 공권력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한 나머지 광주에서 데모하고 내려왔다고 하는 것보다 싸움에 관여했다고 하는 것이 더 가벼운 죄로 취급당할 것 같아 그 싸움을 했다고 거짓 자백해 버리고 말았다. 싸움에 연루됐다는 거짓 진술 덕에 김 당선인은 어이없게 구속당한다. 재판을 받고 집행유예 1년에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김 당선인은 그 날 경찰서에서 떳떳하게 “광주에서 시위에 참여했다”고 말하지 못한 자신을 스스로 용서하지 못해 한 동안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야 했다.

 
◇산 속 오두막의 혈서
아버지의 사업 실패, 흩어진 가족들, 대학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매표원으로 일하다가 싸움에 휘말려 원치 않게 경찰서 구경을 해야 했고, 광주 항쟁의 소용돌이까지 휘말렸던 삶. 10대의 끝과 20대의 시작은 그렇게 암울하고 암담한 시절이었다.
김 당선인 부모님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자갈밭에서 허리를 구부리며 삽과 호미질 하는 모습에 큰 충격으로 받았다.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하는 깨달음과 “언제까지 불평과 불만만 늘어놓고 살 수는 없다. 나는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위해서 더더욱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결심한다. 몇날 며칠을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대학진학이었다. 그렇게 결심하고 부모님이 생활하는 산 속으로 들어가 7개월 동안 하루 15시간씩 공부한다.
김 당선인의 산 속 생활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순전히 태양 빛에 의지해 공부하고 밤에는 등잔불을 켜놓고 공부했다. 공부가 힘들고 지겨워질 때면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되뇌었다. “부모님의 슬픈 눈동자를 외면하자 말자, 쓰러지는 순간까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최선을 다하자”라는 글귀를 노트에 혈서로 쓰기까지 했다.
그렇게 혈서까지 쓰면서 공부한 끝에 대학입시에 합격할 수 있었다. 김 당선인은 정치외교학과를 지원하고 싶었는데 어머님이 완강하게 반대해 건국대학교 무역학과에 지원 합격했다.
김 당선인은 대학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그냥 되는대로 살자고 인생을 자포자기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한과 설움을 풀어드리겠다는 결심을 가슴에 품고 달려왔다. 김 당선인은 혈서로 다졌던 결심들과 마음들 지금은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지 반성해본다고 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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