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문 작가가 직접 격은 여순반란사건〈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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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문 작가가 직접 격은 여순반란사건〈6〉
  • 장강뉴스 기자
  • 승인 2014.06.07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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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주동자들의 최후(김지회, 홍순석, 지창수)”

“이들 14연대 최초 반란의 엄청난 작란의 주동자들 3인에 분노를 금할 수 없습니다”

 

▲ 이형문 작가

■이북에서 계획적으로 훈련시켜 남파한 간첩
박윤식 저서에 의하면 김지회는 1925년 3월 25일생으로 그의 본적은 함남 함주 삼평면 삼태리 137번지이며 함흥 농업학교를 졸업하였고, 이남의 군 내부 반란을 목적으로 이북에서 계획적으로 훈련시켜 남파한 전형적인 간첩이다.
김지회는 1946년 11월 그리고 1947년 1월 13일 함흥 중학교 선배이자 국방경비대 내에서 북로당 프락치 총책이었던 이병주의 도움으로(이병주는 함남 정평(正平)이고 만주 군관학교를 나와 국군 내 체포조직 임무를 띠고 잠복 된 자임) 무난히 육사 제 3기생으로 입학, 동년 4월 19일 소위로 임관하여 광주 4연대에 배속 된 자로 4연대에서는 작전 및 정보장교로 1948년 6월 1일 여수 14연대로 전속된 뒤 중위로 진급됐다.
제주 4.3사건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제주조의 제 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피살되자 (동년 6월18일)연대내의 좌익인사에 대한 숙청이 시작돼 이 대 14연대 연대장 오동기 소령은 김지회 중위가 좌익 주요 인물임을 통보받고, 상부에 그의 구속을 건의하였을 때 그 내막을 알아차린 김지회와 지창수 등 좌익 세력들은 구속이 임박된 것을 인지하고, 그에 대한 대비를 하게 된다.
이후 김지회는 1948년 10월 19일 여수 14연대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순천을 빠져나와 광양과 백운산, 구례를 거쳐 반란군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으로 활동한다.
구례는 지리적으로 반군이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이자, 곡성, 광양, 순천, 보성, 남원 등지와 연결되는 요충지로 구례에서 활동하던 좌익인사 등 구례주민 일부가 김지회부대와 함께 입산하기도 했다.
당시 14연대의 사병으로 있다가 반란 주동자들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반란에 가담하게 되었던 서형수(전남 무안군 청계면 출신으로 호적상 1933년생으로 목포 문태중 3학년 때 지원병으로 경비대에 입대한 보병임)는 나중에 그 당시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기를 김지회와 함께 지리산으로 붙잡혀 들어가, 그가 겪었던 두 달간(11~12월) 추운 겨울 산 속 생활은 배 고품과의 싸움이었고, 비참함 그 자체였다고 증언했다.
빨치산 부대가 아군 토벌군과 교전을 거듭하는 동안 전사자는 늘어나고 산중 추위 때문에 도망병이 많았다고 중언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김지회는 살기등등한 만행에 치를 떨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당시 지리산에는 하루에도 추위를 견딜 수 없어 몇 명씩 죽거나 도망자가 생겨 김지회와 산 생활을 함께 하면서 도망치다 잡히면 공개처형 당하는 일이 많았다. 나중에는 총알이 아깝다며 총 대신 무자비하게 눈 뜨고 볼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당시 김 지회만 떴다하면 겁에 질려 절로 발이 멈춰졌다고 증언하고 있다.

■김지회의 죽음(반선리 전투에서)1949년 4월 9일
여순 사건이 있은 후 약 5개월이 지난 1949년 4월 9일 새벽 2시 30분 쯤 김지회, 홍순석 일당 40여명은 산내면 반선리 선술집에서 사복을 입고 찾아왔던 3대대 정보과 김갑순 상사로부터 “밤에 군복을 입고 오는 자들이 있으면 술을 많이 먹이고 부엌에 호롱불을 켜 주세요”라고 부탁받은 것을 기억하고 김지회 일당이 찾아왔을 때 식사 전에 막걸리를 많이 주어먹게 한 후 부엌에 호롱불을 켰습니다.
한웅진 대대장(3연대 3대대)은 부엌에 호롱불이 켜졌다는 청년단장의 연락을 받은 후 즉시, 아군 대대병력을 이끌고 6키로 미터 떨어진 현장으로 달려가, 이미 자동차 소리에 놀라 도망가기 시작한 김지회 일당에게 집중 사격을 하여 이때 홍순석을 비롯된 정치부장, 후방부장 등 17명이 사살되었고 7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후 생포된 공비들이 김지회와 그의 처 조경순도 같이 있었다고 진술하였지만 부부의 시체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4일이 지난 4월 13일 3연대 3대대 정보과 선임하사 김갑순 일등상사는 5킬로 남서쪽으로 떨어져 지리산에 더 가까운 덕동리 달궁 마을에서 빨간 스웨터를 입은 여자 한 명을 포함한 수명의 공비 일당이 나타났다는 첩보를 입수하게 된다.
이후 기갑순 상사는 두 명의 대원과 경찰 두 명을 대동하여 달궁 마을에 잠복 중 김지회의 처 조경순 일당을 생포해 다시 조경순을 심문하여 김지회의 행방을 추궁하자 그녀는 산선리 전투 후 김지회와 헤어져 그를 찾아다니는 중이라고 말했다.
다시 김갑순 상사는 반선리 주민들의 정보를 입수 연정(蓮井) 마을 골짜기 지리산 뱀사골 입구를 차단, 주막집에서 600미터 정도 떨어진 야산에서 시체 1구를 찾아냈다.
김지회는 반선리 전투 중 총상으로 창자가 밖으로 나오는 등 그 시체가 너무 훼손이 심하여 신원조차 확인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래서 이자가 김지회임을 처 조경순이 가 알아보고 얼굴을 돌리며 울음을 터트렸다.
김지회는 창자가 밖으로 나와 나중에 까마귀의 밥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그의 나이 25세. 이자는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고 군경을 죽인자로 여순 반란을 일으킨 지 약 5개월 20일 만에 비참하게 죽고 말았다.
한편 김지회의 아내 조경순(제주도 조천면 1930년 6월 21일생)의 부친은 목사였으며 이재복의 지령을 전달하는 연락병 역할을 했다. 조경순은 김지회를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닌 ‘빨간 스웨터를 입고 다닌 공비 여두목’이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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