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문 작가가 직접 격은 여순반란사건〈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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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문 작가가 직접 격은 여순반란사건〈5〉
  • 장강뉴스 기자
  • 승인 2014.06.07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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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일 반란 성공, 좌익 단체 등 600여명이 합세…대한민국 정부 모든 법령 체제를 무효로 한다는 선언”

“반란군에게 학살당한 양민 1,200여명, 반란군에 부상당한 양민 1,150명 소실 및 파괴된 가옥 1,538동 행방불명자 3,500여명, 이재민 98,000여명으로 공식 집계”


 

▲ 이형문 작가

■여수인민위원회 소속23명의 반란가담
한국 전쟁사(1) 45쪽 편 기록에 의하면 1948년 10월 19일 20시경에 14연대 정문 앞 식품점에서 반란이 성공하기를 기다렸다가, 성공했다는 연락을 내부 남로당원들에 의해 받자 영내(營內)로 들어와 합세하고,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며 반란을 기다렸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날 밤 11시 30분경에는 그 여세를 몰아 여수 읍내로 들어와 먼저 경찰서를 습격하고, 계속하여 우체국, 경찰서, 관공서와 공공건물 등을 접수 방화하고, 우익인사, 우익 청년단 간부들을 무차별 학살하였음. 예기치 않은 반란의 한 밤은 시체가 곳곳에 산더미같이 집집마다 쌓았다고 함.
학살은 대부분 좌익 학생들과 ‘민애 청년단’이 가담했었기 때문이라고 기재됨. 특히 경찰관 및 경찰관 가족을 모조리 찾아 이들의 총탄에 쓰려졌음. ‘파도는 내일도 친다’ 는 글의 상관 (박성환 동아 출판사 119쪽 1965년 발간 참조)
이후 이들 반란군은 반란에 성공한 새벽 1시로 시작 약 5시간만이 었음.
한편 10월 20일 01시 해군함장은 해군 사령부에 무전보고 “현재 여수 읍은 불바다. 반도들은 약 400여명, 경찰서는 방화로 연소중이며 수십 명의 연대 장교 및 하사관이 피살 됨” 반란군이 시내로 들어와 좌익 단체 및 단체 합 600여명이 합세하여 인민 공화국 만세와 인민 해방군 만세를 외쳤음 (대비 정규전사 1946~1950) 33에 기록 참조.
20일 03시 30분 여수 경찰서가 반란군에 점령 담함. 동 20일 09시~10시 보안서(保安署)를 설치하고, 당시 조선은행 여수지점을 장악 인민공화국 중앙은행으로 바꾸어 부르고 당시 돈 3,550만원을 강탈하였고, 각 은행 지점 및 금융조합에도 거액의 현금을 몰수 강탈함. 인민위원회가 조직되고 인공기가 나부끼고, 거리마나 포스터가 나부꼈다.
제주도 출동 절대반대, 미국도 소련군을 본받아 즉시 철퇴하라. 인민공화국 수립만세등 거리에 벽보가 나부낌. 인민대회는 20일 15:00시경에 열려 추모가 ‘해방의 노래’등 인민대회를 한집에 한 사람씩은 꼭 나와야지. 안 나오면 반동분자로 몰아 즉결처분으로 넘김. 당시 여수 남로당 위원장 이용기의 연설이 있음. 6개 항목 결정문 낭독하며 인민공화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대한민국 정부 모든 법령 체제를 무효로 한다는 선언.
이 당시 경찰서 뒤에 반공호가 있었는데 경찰관 30여명을 몰아넣고 집중사격 사살하고도 모자라 지하실에 아직 처형되지 않은 경찰 가족 등 30여명까지 휘발유를 뿌려 전원 태워 죽임. 23일 오후 3시에는 필자의 집 근처 중앙동 대판 통 로타리 사거리에서 인민대회를 통한 인민재판을 열어 800여명의 경찰 가족 등 우익이사를 가려 구타 혹은 처형시킴. 당시 천일 고무 공장 김영준 사장, 대한 노총 여수지구위원장 박귀한, 사찰 계 형사 박찬길, 박기남, 경찰서 후원회장 연창희, 한민당 간부 차활원 등 주요 우익인사들이 처형당했다.
당시 처형당한 사람 중에서 항만노조 조직위원장 김창업은 처형 전 노래하나 불러 보라고 하니 ‘울 밑에선 봉선화야’를 불러 울음바다가 되었음.

■여수 경찰서장 고인수의 처형
10월 20일 오전 11시경 고인수 서장은 정복차림으로 읍사무소 앞 공토에서 총으로 무장한 남학생 2명에게 검문에 끌려가 유달산 호랑이라는 서중현이란 자에게 사살됨.
특히 여수 경찰서 여경인 정현자(鄭玄子)는 폭도들이 옷을 찢고, 벗겨 목에 쇠사슬을 메어 여수 시내를 1시간동안 일주했고, 다시 경찰서로 끌고 와 총탄 두발을 쏴 죽인 잔인무도한 짓을 저질렀음. 서종현 이라는 자는 세 명의 학생을 대동하고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있던 우익인사들을 향해 창살 틈으로 총격을 가해 총탄을 피하느라고 아수라장이 되어 결국 다 죽었음.
10월 20일까지 이틀 동안 여수 경찰서 안에서만 희생당한 인원만 경찰관 59명, 의용경찰 20명, 의용 소방대원 5명, 우익계인사 10명, 기독교인 7명, 경찰관 가족 40명(여수 반란 편, 광복 30년사 56쪽 57쪽 붉은 대학살 125에 수록됨)
당시 여수 수산 중학교 학생 90%는 좌익에 가담. 순천 사범학생 40% 순천 농 중생 30%등 엄청난 가담자였다고 함. 여수중학교는 김처빈이란 6학년생 대표가 지휘했음.
이후 순천 경찰서, 장성 경찰서, 등지를 장악했고, 순천 경찰서장 양계원 총경도 처형당했음. 여수를 거쳐 순천까지 점령한 반란군은 각처 지서를 장악했고, 광양, 남원, 조성, 구례, 보성 등 경찰서를 무혈(無血) 점령(占領)하고 고흥에서는 순천에서 돌아온 반란군과 합세 고흥읍을 점령하고 경찰관 7명과 주민 6명을 직결 총살 (銃殺) 혹은 살해(殺害)하였음 (광주신보 1948년 10월 31일자)
다음에 여수에서 민간 희생은 반란군에게 학살당한 양민 1,200여명, 반란군에 부상당한 양민 1,150명 소실 및 파괴된 가옥 1,538동 행방불명자 3,500여명, 이재민 98,000여명으로 공식 집계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전쟁사 자료 452쪽 참조) 기타 행방불명자 818명이고 사살된 반란군 392명, 포로가 1,512명임. 기타 타 지역광양, 보성, 구례, 고흥, 곡성 등 피해도 1천명이 넘으며 여수 14연대는 1948년 10월 28일부로 영구히 해체되었음.
송효준 저서 ‘붉은 대학살’ 104쪽 자료를 참고해보면, 남로당 빨치산 군사책 이중엽은 남로당원 이재복에게 여수 주둔 제 14연대에 침투해 있는 프락치들로 하여금 폭동을 일으키도록 지령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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