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문 작가가 직접 격은 여순반란사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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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문 작가가 직접 격은 여순반란사건〈4〉
  • 장강뉴스 기자
  • 승인 2014.04.2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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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14연대 반란 거사날 대대장 김왈영 대위 등 장교 23명, 하사관, 사병 40여 사살”

“지창수 상사 뛰어난 언변으로 연변장에서 병사들에게 반(反) 경찰 감정을 교묘히 자극하며 허위사실을 유혹하고 반란을 선동”

 

▲ 이형문 작가
■주모자 지창수 상사의 반란 선동
드디어 제주도 폭동 진압을 거부하는 여수 14연대 반란의 거사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주도 폭동 진압에 필요한 모든 무기를 비롯한 준비물을 선박에 이동시켜 이미 실어놓고 난 뒤 10월 19일 화요일 저녁, 제 1대대가 제주도 출정 대대에 환송을 위한 송별회, 그리고 박 승훈 신임 연대장이 부임한지 1주일밖에 되지 않았던 때라 저녁에 1대대의 출발 직전 장교식당에서 회식을 할 때 장교들 약 30명 이상이 모여 식사를 했고, 박승훈 연대장도 참석하고 있었으며 (예비역 김형운 대령 증언) 김지회 중위와 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는 모의 끝에 장교 회식 때를 이용하여 장교들을 공격 후 반란을 시도하려 했습니다.
회식을 잘 마친 후 장교가 그 자리에 남아 제주도를 떠나는 1대대 장교들에게 진압을 잘 하라고 용기를 주며 여러 이야기가 오고 간 후 주변 영내 장교 식당 도로가 둘러싸인 곳이 있었는데 갑자기 도로 쪽에서 장교 식당 정문을 향해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개들(將校)을 소탕하고 여수로 진격이다” 라고 외치는 소리와 함께 갑작스런 총소리가 나는 것을 알고 김 형운 소위는 반란이 틀림없다고 판단 얼른 연대장에게 가서 “저놈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어서 중대 인원부터 파악해야 할 것 같습니다.” 라고 보고하니 연대장이 거기 모여 있던 장교들에게 “이대로 방치하지 말고 각 중대로 돌아가서 부대 인원수를 파악하고 책임지고 잘 지켜라! 1반란이 더 커져서는 안 된다”고 다급하게 명령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김승훈 소위는 “지금 식당이 완전 포위되었으니 창문으로 빨리 도망치라”고 지시 장교들이 흩어져 도망치던 장교들을 반란군들도 나머지 장교들 대부분이 사살되었습니다.
이들 핵심 세포조직 40여명은 사전 계획대로 무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하여 비상 나팔을 10월 19일 오후 8시에 울리자 출동사병들은 출발시호인줄 알고 지체 없이 연병장에 집합하여 실탄지급을 받고 난 뒤 지창수 상사는 병사들의 반(反) 경찰 감정을 교묘히 자극하면서 허위사실을 유혹하고 반란을 선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인사계 선임 하사관 지 상사다. 지금 긴급 정보에 의하면 여수 경찰이 평소 우리와의 사소한 충돌로 반감을 품고, 전 일본 해군을 동원하여 여수에 상륙해 14연대를 포위하여 우리를 도살하려고 한다. 그러니 이러한 횡포를 우리는 용서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제주도 출동에 앞서 이들 악질 반동 경찰부터 타도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그 앞잡이 이승만 일당에게 항거하여 용감하게 싸워야한다. 우리는 결단코,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싸움에 끼어들 수 없다. 우리는 온 겨레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원한다. 지금 제주도에서도 제국주의 이승만 일당과 맞서 용감하게 싸우고 있다. 지금 북조선은 38선을 넘어 남진 중에 있다는 소식이다. 우리는 인민 해방군으로서 북상한다. 남조선의 해방은 성공하고 조국의 통일은 달성된다. 탄약고와 무기고는 우리 손에 있다. 실탄을 각자 가질 수 있는 한 최대한 가져라. 미 제국주의 앞집이 장교들을 모조리 죽여라! 모두 나의 뒤를 따르라” 고 하였습니다.
이때 죄악들이 일제히 “올소”하면서 박수를 쳤습니다. (박윤식 예비역 대령(당시 소위)은 평소 지창수 조직선동을 위한 말솜씨가 아주 뛰어나 유창했다고 증언함)
그때 하사관 2명과 사병 1명이 경찰을 타도하고, 제주도에는 안 간다 해도 인민해방군은 안된다고 고함을 쳤다고 합니다. 그러자 좌익 하사관들이 병사들보는 앞에서 이들을 총살 해버리자 어리둥절해 있던 장병들은 지창수를 따르고 반란군에 가담 합세하여 맹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반란에 장병들이 쉽게 합세 동조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14연대 핵심 장교들의 죽음

당시 장교들을 발견되는 즉시 사실시켰습니다. 1948년 여수 14연대 반란 당시 14연대 2대대 5중대장 박윤식 소위(육사6기)는 반란 당시 대대 주변사령(대대장 퇴근 후 야산 및 휴일 대리 근무, 제 2대대장은 김봉철(金 鳳喆)대위였는데, 바로 직전에 김지회 와 교대한 것임.
반란 당시 박 소위는 비상 나팔소리를 이상스럽게 생각하고, 주번 총사령의 비상명령 수령 차연대 본부로 향하던 중 탄약고에 다다르자 캄캄한 중에 누가 갑자기 총을 겨누면서 “누구냐? 암호?” 하기에 “주번사령이다”라고 외쳤을 때 쏴라! 하는 소리와 동시에 곳곳에서 일제히 사격이 시작됐고, 그 자리에서 여러 장교들이 총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유재환 소위가 즉사하고, 박윤민 소위는 간신히 대퇴부 관통으로 죽음을 면했음(2012년 현재 생존 사실 확인), 조병모 소위(육사6기)가 “이 놈들아 어째서 장교를 구타하고 총을 쏘느냐?”고 하자 총검으로 등 뒤까지 찔러 전사하고, 김정덕 소위가 한쪽 팔에 관통상을 입어 저놈들이 나를 쐈다면서 쓰러졌다는 당시의 증언임. 그리고 김왈영 대위(육사2기)는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음. 한편 14연대 반란군이 여수로 진격한 후 김남수(육사6기)소위는 평소 애인 사이처럼 친하게 지내던 한 여자에 의해 죽임을 당했음.
홍순석은 순천 경찰서를 습격하기 위해 순천지구(順天地區) 반란 주모자임을 알았고, 14연대 내부의 남로당은 저항하는 하사관과 사병 40명을 그 자리에서 사살했고 장교들은 발견하는 대로 무조건 사살하였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참변이었습니다.
이때 당시 살해된 장교들의 명단의 기록에 의하면 육사 2기 출신 대대장 김왈영을 비롯해 23여명이나 됩니다. 한편 그 당시 참모장 오덕준 중령은 여순 반란 사건의 진상을 보고하기 위해 급히 목포에서 서울로 올라가 다시 제 5여단 사령부가 있던 광주로 갔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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