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문 작가가 직접 격은 여순반란사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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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문 작가가 직접 격은 여순반란사건〈2〉
  • 장강뉴스 기자
  • 승인 2014.04.22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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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반란사건…남로당 중앙당 지령 받은, 여수 14연대내 남로당원들의 계획적 반란

“군함 함포사격 여수 시가지는 완전 불바다…국군과 공산당이 서로 가담자 색출한다며 우리가 보는 그 자리에서 즉결총살 시키는 현장을 목격, 여수 인구 6만여명 중 3분의 1이 죽었을 정도”

▲ 이형문 작가
여순 반란사건당시 필자의 경우 중학 1학년생이지만, 매일같이 상급생들이 강제 동원으로 참여치 않을 수 없었는데 이후 국군이 여수를 다시 점령하였을 때 시가행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학생들이 무모하게 많이 총살당했다.
필자도 불타는 여수 시가지에서 시민들이 전부 진남관으로 모이게 하여 그 중에서 중학생 이상은 무조건 나오라하여 서 초등학교에 끌려가니 교실마다 100여명 이상 약 4~5백명이 잡혀온 학생들 중 반수이상이 끌려 나가 서편 쪽 운동장에 구덕을 파둔 곳에다 즉결처분 파묻어 개죽음을 당했고, 다행히 이 때 필자는 1학년생이라고 풀려났는데 이 때 여수 시가지는 완전히 불바다가 되어 있었다.
필자가 잊을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여수 중학교 교정에 아침 조례시간에 모여 있을 때 오동도 쪽에서 군함이 여수 시가지 쪽을 향해 함포사격을 하여 그 길로 학교 뒤 언덕인 종고 산 쪽으로 도망가던 중 곁에 한 여인이 아이를 없고 산으로 올라가다가 오른팔에 관통상을 입어 피를 많이 흘려 필자가 급하게 까만 교복 옷을 찢어 지혈시켜준 다음 종고 산을 넘어 연등동 화장장(火葬場)을 내려오니 시가지가 이미 불바다로 누구 한사람 불 끌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당시의 실정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중앙동 집에 돌아오니 장군도 뒤편 연도 쪽에서 군함이 발사한 함포사격이 심해 사람들 10여명이 한 집안에 피해있는 순간 포탄 파편이 떨어져 내 바로 곁에 분이 하필 지붕에서 떨어진 쇠붙이에 머리를 맞아 그 자리에서 혼절해 버려 어디론가 급히 업고 나간 뒤였고, 계속 불타오는 시가지에 우리 집 곁에까지 불이와 창고에 쌓아둔 석유드럼을 500여 미터 거리의 바다로 굴려서 던지고, 나머지는 급하여 우선 진남관으로 피신했는데 마치 기름이 드럼 차 폭발하니 그 위력이 하늘로 치솟아 대단했습니다.
아버님은 경상도 쪽에 장사 차 떠나버려 없을 때라서 어머님 따라 그 현장에서 형님과 여동생 둘과 제가 숨어 있다가 중학생이상은 무조건 나오라 해서 자수하여 끌려갔으나 구사일생으로 개죽음을 면했습니다.
당시 시가지는 불바다일 때 집집마다 숨어있던 사람들을 손들고 다 나오라 해서 오사카(동정으로 올라가는 언덕길, 일본말)쪽에 국군이 여수 시가지를 점령했을 당시 공산당에 가담한 자들을 색출한다며 우리가 보는 그 자리에서 즉결총살 시키는 현장을 목격했고, 죽은 시신은 그대로 10여구를 가마니로 덮어두기만 했습니다. 완전히 거리가 아스라 장이 되었습니다.
국군이 여수 시가지를 점령 후 공산당에 가담한 사람들을 색출한다고 죽이고, 또 공산당 때 죽이고 하여 당시 여수 인구 6만면정도 중 3분의 1이 죽었을 정도입니다. 지금도 여수에서 제사가 제일 많은 달이 10월말에서 11월 사이 지요.
여수역 터널 굴(屈)을 지나 만성리 쪽 가는 길 산 아래 깊은 골짜기에 우익인사들이나 순경집안들 혹은 학생들을 색출해 끌고 가 산체로 2백여 명을 구덕아래에다 총으로 쏴고 불을 질러 생매장 시킨 곳이기도 하지요. 그런 속에서 당시 한 사람이 살아나온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곳에서 이들의 명복(冥福)을 비는 위령제를 매년 올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14연대 반란군은 순천(順天)과 경상도 하동 쪽으로 이동, 서(西)로는 벌교와 보성, 북(北)으로는 구례일대를 휩쓸었지요. 가는 곳마다 시내의 관공서(官公署)와 경찰서할 것 없이 불 지르고 붉은 인공기를 휘날렸습니다. 여수와 순천에서는 우익단체 가족들이나 지주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살육과 난동을 자행했습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관경이었습니다.
필자는 반란사건당시 직접 총살시키는 현장을 수십인 목격했는데 뇌리에서 아직도 80의 나이가 되었어도 지워지지 않는 두 사건이 있는데 오사카 하나는 진남관입구의 가림 길 언덕 쪽에서 14연대 반란군이듯 한 20대 젊은 군인이 급하니 군복을 벗고 옷을 보자기에 싸 군중들 속에 숨어 있다가 발각되다보니 국군이 끌고나와 사람들 보는 앞에서 총을 뒤에서 쐈는데 앞으로 창자가 튀어나온 모습이었고, 처음 반란사건 나던 첫날 아침 파출소앞 바다에 죽은 까만 정복 입은 순경의 시신이 바닷물에 둥둥 떠 피를 흘리고 있는 참혹한 현장모습입니다.
14연대 반란군을 진압 차 출동한 광주 4연대, 대구 6연대, 마산 15연대들이 오히려 연쇄적으로 반란에 가담하는 자가 많았고, 대한민국은 건국 2계월 만에 나라가 전복될 큰 위기로까지 직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때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국가보안법을 개정(1948년 12월1일에 법령통과)로 이 때 군내부에 거미줄처럼 침투돼있던 좌익 빨갱이 세력을 10,317명(숙청 4,749명, 탈영 5,568명)이나 색출 정리해 버렸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들은 나중에 국군들의 여수 시가지 점령으로 광양 백운산, 지리산등지로 도주 양민학살과 밤마다 기습으로 파출소 순경들을 사살하고 도주해 밤이면 잠을 잘 수 없는 마을로 변해버려 이들 빨지 산 반란군들을 색출하고 치안을 안정시키는데 몇 개월이 걸렸지요.
# 이를 증명하는 태백산맥 소설의 작가 조정래(동국대학교 국문학과 필자의 후배)가 벌교를 중심으로 빨치산들의 동태를 파헤친 실화 같은 내용을 밝혔으나 부족한 점이 많았음.

한편 여수, 순천의 14연대 반란사건은 하사관 세력이 독자적으로 일으킨 봉기(蜂起)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으나 그것은 사실과 전혀 다릅니다.
여순 반란사건의 주동자들은 사건의 동기자체가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을 받고, 여수 14연대안의 남로당원들이 계획적으로 일으킨 반란이라는 사실입니다.
여수 인민위원회소속 23명은 1948년 10월 19일 20시경에 신월리 14연대 정문 앞 식품점에서 사전에 반란의 성공을 위해 모의했고 기회를 기다리던 중 선발대가 성공했다는 연락을 받자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고, 즉시 부대 안으로 들어가 함께 무장하고 반란에 가담한 것이지요. 이는 여수 남로당에서 반란지령을 내렸다는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당시 여수 사람들의 죽은 수가 공식적인 집계에 1200명이 사망하고, 순천에서도 1134명이나 사망하였다고 하나 실지로는 그 배 이상일 것이 확실시되고, 알게 모르게 사살된 억울한 죽음이 여수 시민의 가슴을 찢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끔직한 사실을 은패하려고 여수 시민의 봉기라고 왜곡할 수 있는가.
그 두해 뒤 6,25전쟁의 동란이 나기까지(필자가 중학교 3학년 시절) 북한 김일성의 적화야욕과 박헌영의 지령대로 움직인 남로당 세력 때문에 나라가 혼돈상태에 빠지고, 살인을 밥 먹듯 자행 소름끼치는 공산당의 만행을 우리국민들은 기억하여야 할 일인데,오늘 날은 다 잊고 오히려 지하 조직당원들이 아직도 공산화를 노리는 불순단체 세력들로 들끓고 있습니다.
여순 반란사건 같은 경우를 깊이 반성하고, 시대의 흐름에 절대 왜곡(歪曲)당해서도 안대며, 공산당이라는 무시무시한 사상에 철저한 앙갚음으로 우리 민족의 혼(魂)의 뿌리와 5천년 역사의 정신을 지키며 살려나가야 할 때입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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