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문 작가가 직접 격은 여순반란사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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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문 작가가 직접 격은 여순반란사건〈3〉
  • 장강뉴스 기자
  • 승인 2014.04.22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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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하고 있는 자료는 필자가 직접 반란사건의 체험한사실과 정보처에서 수집한 많은 사실중의 정확한 증거들만을 토대로 선별 수집한 내용임을 먼저 밝혀둡니다.

“여수우체국 직원(남로당원)에 의해 기밀누설, 이중엽(남로당 빨치산 군사 책) 기회를 놓칠세라 폭동 지령”

“제주 9연대에 중파할 계획, 여수우체국 일반 전보를 통해 ‘14연대 1개 대대는 1948년 10월 19일(화) 20시에 여수항을 출발하여 제주도 폭동을 진압하라’ 출동명령”

 

▲ 이형문 작가
■여순 반란사건 심층 분석의 개요(槪要)

국방 경비대가 여수 신월동에 과거 해방 전 일본군 해군기지로 사용했던 곳에 14연대가 정착 출발하였고, (현재 한국화약 여수공장으로 사용 중) 제주 4.3사건과 맞물려 발생한 사상 초유의 유혈폭동(流血暴動)사건입니다.
제주의 폭동 진입을 위해 출동준비 중이던 여수 14연대의 인사계 지창수상사와 대전차포 중대장 김지회 그리고 순천파견 2개 중대 신임중대장 홍순석중위 일당의 주도로 좌익 북한 남로당의 지령을 받고, 40여명이 일으킨 엄청난 군 반란입니다. 이 사건은 성격상 국가정복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전쟁을 방불케한 엄청난 계획적 반란이었습니다.
대학민국 근 현대사 시리즈 제2권 박윤식 작가(황해도 사리원 출생 1928년생)가 쓴 여수 14연대 반란 사건 자료 참조에 의하면, 여수 14연대는 1948년 5월 4일 광주 4연대 (1946년 2월 15일 창설)에서 차출된 1개 대대를 근간으로 신편(新編)돼 반란 당시에는 박승훈(朴 勝薰) 중령(일본 대좌, 일본 육사 제 27기생)이 연대장으로 이희권(李 喜權)소령이 부연대장으로 있었습니다.
제 14연대 기간요원으로는 하사관 출신 50여명이 근간이 되었고, 지창수 상사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으며 광주 제 4연대 보병 때 입대했던 자(者)입니다. 광주 4연대 1대대에 남로당원 홍순석 중위(육사 3기, 군번 10583) 김지회(육사 3기 군번 10505) 둘이 있었는데 이들에 의해 밤마다 내무반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가르쳤다는 증거를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한편 당시 여수를 중심으로 여천일대 도서(島嶼)에는 지주계급에 반대하여 결성된 좌익 빨갱이들 모임의 세력들이 상당수로 확대 돼 가고 있었고, 당시 여천 지방(麗川地方) 역시 대대로 이어온 지주세력에 대한 반감 때문에 많은 서민층이 은밀하게 가담하여진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홍순석 중위는 순천 파견대장이라는 요직을 맡고부터 지창수 상사를 인사과 선임하사로 정낙현 상사는 정보과 선임하사로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반란음모는 암암리에 깊이 무르익어가고 있었습니다. 1948년 10월 초 평양에 있는 북괴 외무성에서는 이미 이중엽(남로당 빨치산 군사 책)의 보고를 통해, 여수 14연대 내 남로당 조직책 지창수 상사가 폭동을 일으킬 만반의 준비를 완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수 우체국 일반전보를 통해 하달된 제주도 출동 명령

1948년 10월 11일, 육군에서는 제주도의 폭동 진압을 위해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신설하여 대구 6연대와 부산 5연대에서 각각 1개 대대를 배속하도록 지시 하달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10월 15일에는 여수 14연대 1개 대대를 제주 9연대에 중파할 계획을 세우고, 연대장 박승훈 중령에게 여수 우체국(경찰서 옆 고소동 소재) 일반 전보를 통해 “14연대 1개 대대는 1948년 10월 19일(화) 20시에 여수항을 출발하여 제주도 폭동을 진압하라”(우체국 확인자료)는 출동명령을 하달, 국방 경비대는 창설 된지 얼마 되지 않아 당시 시설면(施設面)에서 경찰보다 뒤떨어진 열악(劣惡)한 환경이어서 자체 통신시설이 갖추어있지 않은 상태여서 불가피하게 여수 우체국을 통해 명령을 하달(下達)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박승훈 중령은 기밀누설을 염려하여 출항 시간을 변경 4시간 뒤인 24:00로 변경하였음.
예상한 대로 하달된 명령은 박승훈 중령이 보기도 전에 우체국에서 일하던 남로당 직원에 의해 여수 인민 위원장이 먼저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여수 인민 위원장 김백동(전남 도당 책임자)는 즉시 이재복(남로당 군사부장)에게 복창하였고, 이어 다시 이중엽(남로당 빨치산 군사 책)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이에 이중엽은 절호의 기회를 놓칠세라 이재복에게 여수 주둔 제 14연대에 침투해있는 프락치들로 하여금 폭동을 일으키도록 지령하였고, 이재복은 지창수 상사에게 지령 하달, 반란 총 책임자인 지창수는 전투지휘를, 김지회 중위(대전차포 중대장), 홍순석 중위(순천 주둔부대 선임 중대장)이 맡도록 하였습니다.
#이상의 자료는 국방부 발간(1967년) 한국 전쟁사 452 이병주의 실록 대하소설 ‘지리산’ 122쪽에 제주도로 가기위해 여수항을 출발할 예정이라는 기밀을 탐지한 때문이라고 확인됨.
그리고 김지회는 반란당시 대전차포가 없었으며 3중대장만을 맡고 있었다(인사관 김형운 소위의 증언임) 또, 당시 이미 여수, 여천, 일대의 민청, 민애청, 인민위원회 간부들과도 내통되어 있는 상태여서 반란직후 이들을 무장시켜주고 나머지 장교는 출동 전에 사살해 버렸다고 합니다. (국방부 전사 편찬위원회 1988/ 31 광복 30년 2 ‘여순 반란 편 33~36쪽 참조’)
이상의 사실로 반란을 선동할 때 이틀 전 경찰서를 중심으로 예행연습을 마치고 뒷날 새벽 먼저 여수 중심가 경찰서를 습격해 감옥소 수감자를 풀어주고 불 지르며 민간인들에게 북조선 인민군이 지금 38선을 넘어오고 있는 것처럼 선전 선동시켜 순식간에 호응하게 된 동기입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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