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문 작가가 직접 격은 여순 반란사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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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문 작가가 직접 격은 여순 반란사건〈1〉
  • 장강뉴스 기자
  • 승인 2014.03.24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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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 폭동…여수 14연대내 주둔 빨갱이 주도

“여순 반란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당시 중학 1학년 시절 13세의 나이 때입니다. 제주 4.3사건에 이어 대구 10.1폭동이 있은 후 여순 반란사건이 발발하였다”

▲이형문 작가/영랑기념사업회 자문위원
“역사란 살아있는 양심(良心)을 갖고 사실그대로 밝혀두는 것으로 후세인에 전하는 것”이기에 필자가 해방이후 중학 6년제이던 시절, 여수중학 1학년생으로 여순 반란사건을 여수에서 직접 격은 현장과 당시의 역사적 진실 된 사실의 다큐와 자료를 수집에 기록한 내용임을 먼저 알리며 필자가 죽기 전에라도 나의 이 사실만은 꼭 밝혀두는데 목적(目的)을 두었습니다.
아울러 필자는 여수고등학교 제 3회 졸업생으로 사장(死藏)될 번한 당시의 역사적 사실 자료와 실상을 여수고등학교 재경 향우회 발간예정인 ‘좌수영’(左水營)제 28호지(2014년 초에 출간 예정)을 앞두고 최동석(여수고등학교 제4회 졸업생)고문 후배님과 3회 동창생 조용환도 여순 반란사건을 직접 필자와 함께 어려운 고비를 격은 이들의 강력한 부탁을 받고 심혈을 기우려 사실에 최대한 근거해 쓴 내용임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사건기록 자료에 의하면, 여순 반란사건의 시작이전 우리나라가 일제(日帝)의 강점(强點)에서 해방(1945년 8월15일)된 이후 무질서한 혼란과 엄청난 격동(激動)의 순환을 겪으며 소용돌이치던 당시 필자는 초등학교 4학년 때 해방을 맞으면서 여천공립초등학교에서 일본인들만 다니던 동(東)초등학교(여수시 공화동 소재) 로 옮기면서 제 3회 졸업생이 됩니다.
그러니까 여순 반란사건은 3년 뒤 1948년 10월 19일 당시 중학 1학년시절 13세의 나이 때입니다. 제주 4.3사건에 이어 대구 10.1폭동이 있은 후 여순 반란사건이 발발하였습니다.
우리민족의 설음은 당시 나라가없던 약소(弱小) 민족으로 일제하에 36년간 착취당한이후 제3차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미국과 일본의 전쟁)에 일본이 패망하면서 1945년 8월15일 해방이 되던 해 미국이 일본에 맥아더장군에게(미주리호 함상에서) 무조건 굴복 항복문서를(천황패하대신 쓴“도죠 히데끼”)는 조건으로(미국 트르만 대통령에게) 당시 조선(朝鮮)을 독립국가로 인정키로 하였으나 먼 나라 미국에서 조선까지 오는 선박편이 1계월가량 소요되는 기회를 틈타 당시 소련(지금의 러시아) 스타린 수상(공산주의국가)이 약삭빠르게 육로를 이용 (자기들 나라에서도 연합군으로 미국의 싸움을 도왔다는 구실을 달고) 조선의 38도선 이북(지금의 북한)을 먼저 점령해 버렸습니다. 결국, 당시 (강대국들끼리 조선반도를 갈라먹기 식으로 분단시킨 원흉들임) 그리하여 쏘련에서 당시 공산당 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김일성을 북한의 책임자로 만들었고, 남쪽 땅 조선은 미국으로 망명했던 이승만을 미국의 점령 하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헌법에 기초하여 합법적인 국민투표에 의해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국호를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중국 상해에서 조선 임시정부를 만들었을 때 구국운동(救國運動)을 하던 김구선생은 분단된 남, 북을 넘나들며 하나의 통일 조국을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였으나 당시 이승만이 하수인을 시켜 안두희(서울 성북동소재 혜화동거주)가 암살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우리 한반도가 강대국들의 노략질로 독일에 이어 분단국가가 돼 버렸습니다.
따지고 보면 제 1차 원흉은 일본의 패망 때문이지요. 그리하여 당시 필자의 어린 시절 “미국 놈들 믿지 말고, 소련 놈들에 속지 말고, 일본 놈들 일어난다.”라는 유행어가 나돌았습니다.
1945년 해방이후 우리나라 땅이 양 갈레로 갈라져 공산주의 이대오로기와 자유주의 국가사이에서 혼란기를 틈타 공산당 지하조직인 빨갱이들이 침투하기시작 대구 10?1폭동과 제주 4?3사건의 폭동을 일으켜 대량 양민학살사건 다음으로 10월9일 드디어 여수 14연대내 주둔하고 있던 빨갱이들의 주도하에 반란사건이 발발하였습니다.
필자는 당시 (여수 중앙동 로타리 중심가)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사건 날 새벽 집에서 500미터 거리에 중앙동 파출소가 있었는데 순경이 까만 겨울정복 입은 채 두 사람이 총에 맞아 죽어있었고, 한 순경은 도망치다가 파출소 부두 정박지 산판 아래 바다 가에 뜬 시신으로 피를 흘리며 죽어있는 것을 목격했고, 로타리 큰길에 나가보니 몇 사람이 길에 총에 맞아 가마니에 시신이 덥혀 죽어있는 아침의 현장을 목격하던 때 무장한 군인들이 총을 메고 오사카(큰길언덕)를 향해 경찰서쪽으로 10여명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 이전 당시 육군본부에서는 제주 4,3사건을 진압할 목적으로 여수 14연대 병력을 제주도로 보내려는 때 당시 여수 14연대장 박승훈 중령 보다 이재복(남로당 군수부장)이 먼저 이 사실을 알게 돼 이 때 남로당은 여수 14연대내의 인사계 지창수 상사와 김지회 중위, 홍준석 중위를 중심으로 한 일당 40여명인 남로당원들이 중심으로 주축 단합되어 제주도 출동구실로 당일 여수에서 반란을 일으킨 사건의 동기입니다.
필자가 여수중학교 1학년생 당시 사건 발생 날 아침에 학교에 등교하기위해 경찰서 앞을 지나다보니 경찰서가 감옥소 쪽 마당에서 연기가나고 정문 앞에 보초 섰던 순경 두 명과 밖으로 나오던 사복 입은 형사 분이듯 한 세 명이 쓸어져 죽어있는 그대로 난장판이 돼 있었는데 완전 군복 차림의 총 든 군인들이 공포탄을 쏘며 급히 공화동 여수역 쪽을 향해 10여명이 뛰어가는 모습이었습니다.
당시 경찰서 앞에 거주하는 어떤 어른분의 말에 군인들이 새벽에 경찰서 내 감옥소에 갖춰있던 죄수(罪囚)를 다 풀어주고 불을 질렀다는 말이었습니다.
고소동에 시청 옆길 따라 여학교 쪽으로도 5명 정도가 공포탄을 쏘며 가고, 필자는 공설운동장 공화동쪽에 소재한 여수중학교에 들어가니 선생님들은 보이지 않고 6학년생 선배들이 운동장에 다 모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김처빈 학생회장이듯 한 분이 교단에 올라와 마이크로 우리 학생들은 이제 나라가 바뀌어 해방이 됐으니 안심하고 전부 시가행진에 나서야한다고 외쳤습니다.
상급생 시키는 대로 따라 시가행진 때 부를 노래가사를 가르쳐줬는데 지금까지 기억난 구절은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울밑에서 봉선하리라.”.....이런 곡들을 시키는 대로 따라 배워 시가행진 때 불렀습니다. 거리에 나가니 남학생, 여학생, 일반시민 할 것 없이 인민군 기를 어디서 만든 것인지 나눠주며 큰길 따라 시내 행진으로 서교동까지 가는 도중 거리가 온통 아스라 장이 됐습니다.
따라서 이미 감옥소에서 풀려난 사람들이나 학생 간부들 혹은 어른들이 오른팔에 붉은 완장이나 모자에 흰 띠를 두르고 경찰서 무기고에서 탈취한 총들을 들고 나와 환희의 공포탄을 발사하면서 거리는 완전히 환영 일색인 가운데 집안에 있는 사람들을 무조건 참여토록 강요했고, 반대하면 강제로 끌고나와 현장에서 총살시켜 버리는 무자비한 짓들을 감행했습니다.
그 때 군복 입은 14연대 간부들은 거위 순천 쪽으로 점령하러간 것인지 모습이 보이지 않고, 시내는 이들 지하조직 폭동 가담자들이 치안을 한다며 우익계통의 분들이나 돈 많이 가진 부자들을 잡아와 인민재판이라며 필자의 집 앞 로타리에서 즉결처분 시키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지요. 그런 재판이 십 여일일간이나 있었는데 이때 여수에서 제일 돈이 많다는 서교동 고무신공장을 경영하는 김영준씨 외 수십 인의 우익인사들을 즉결재판 후 총살시켰습니다.
당시 전직여수 경찰서장을 했던 김수평씨는 이들 좌익 세력과 동조한 인물이며, 반란사건 당시의 서장이던 고인수는 나중에 처형(處刑)당했다고 합니다.(그 내용에 관한 사항은 별도 다음 제 6번에 상세히 수록키로 함)
전 경찰서장이던 김수평은 형제간이 여수지역에 32평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분들로 그 형제들 중에 여수에서 이승만 대통령당시 초대 국회의원이던 김문평씨가 있었고, 또 김우평씨는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반란사건 이후 이승만 대통령당시 경제부장관까지 지낸 유명한 집안입니다. 그 아래 학 열로 김갑환(오락기협회 회장)은 필자와 초등학교 동급생이며 그 환(煥)자 학 열 아래 재(在)자로 그 족보집안이 여수에서는 이름난 집안이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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