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장 바로알기 - 강진군 칠량면 구로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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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 바로알기 - 강진군 칠량면 구로마을
  • 김채종 기자
  • 승인 2016.09.12 12: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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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토가 많고 바다 어족자원 풍부 ‘부자마을’

1970년 좁은 농로 1450m,  5m폭 확장공사…지주들 땅 희사
‘품앗이조’를 뽑는 시험도구 ‘들독’…농토가 많다는 것 증명

▲ 마을전경
강진군 칠량면 구로마을은 칠량면에서 농토가 가장 많은 곳이며, 3면이 바다로 연결돼 맛, 꼬막, 대합을 비롯한 각종 어패류가 풍부하여 사람이 살기 좋은 천혜의 조건을 갖춘 마을이다.
구로마을 유래를 보면 칠량.대구에 살던 사람들이 강진을 가기 위해 바닷가를 따라 오가던 옛길이라는 뜻에서 불리게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3면이 바다로 둘러 있어 옛날 바닷물이 만조시에는 갈매기와 해오라기 떼가 마을 뒷산으로 날아들어 장관을 이루었다 해서 갈매기 구(鷗)자와 해오라기 로(鷺)자를 써서 구로(鷗鷺)라 했다.
또 비둘기가 많다고 하여 비둘기 구(鳩)자를 써서 구로(鳩鷺)라고도 불렀으며,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마을의 모형이 마치 반달(半月)과 같아서 월궁이라도 불렀다고 한다.
▲ 구로농토
구로마을은 모든 공사들은 국가로부터 거의 도움없이 자체 마을 돈과 주민들의 울력으로 해결했다.
마을에 자금이 많았던 이유는 바다를 접하고 있는 마을들은 개인 양식을 가지고 형식이었는데 구로마을은 마을 공동양식으로 만들어서 양식장에서 생산되는 수익금중 10%정도를 마을 자금으로 적립한다.
또한 전국 어디에서 찾아볼 수 없는 구로마을 향유회가 전국 곳곳에 형성되어 마을공사나 행사시 지원을 적극적으로 해주고 있다.
대표적인 향우회는 재경향우회, 재부산향우회, 재광주향우회가 있다.
칠량면에 법정리가 12개 있는데 과거에 리 대항경기를 하면 구로마을이 우승을 독차지 했다.
구로마을은 송산마을과 함께 송로리인데 당시에 송산마을은 군동면이 가까워 군동면 생활권이 되어서 칠량면 행사에 참여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구로마을 단독으로 송로리 대표로 나가게 되었는데 다른 법정리는 3~5개 마을로 형성되어 경기에 참가해도 구로마을을 이길 수 없었다.
▲ 유선각
구로마을 유선각 주위를 둘러보면 둥그런 돌이 하나 있다.
이 돌은 과거에 서로 ‘품앗이조’를 뽑는데 필요한 시험도구인 ‘들독’이다.
시험방식은 들독을 들어서 뒤로 넘기는 장정에 한해서 품앗이조 자격을 부여했다.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은 “힘께 나 쓰는 장정이 아니면 엄두도 못냈다” 며 “나도 자신이 없어서 한번도 들어볼 생각도 못했다”고 회상했다.
이처럼 구로마을은 농토가 많고 젊은 사람들로 북적인 것을 알 수 있다.
역사적이고 재미나는 중요한 문화적 유산인 ‘들독’이 재대로 해석되지 않고 한구석에 방치해 놓은 것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 들독

1909(기유)년 구로마을  화재로  1채만 남고 40채 전소
국가 도움 없이 주민들 울력으로 가옥 지어 마을 형성

▲ 주민들
구로마을은 칠량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3.5km지점이고, 강진군소재지로 부터는 남쪽으로 8.5km에 위치한 3면이 바다인 해안마을이다.
북쪽으로는 역시 송로리에 속한 송산마을, 동쪽으로는 동백리, 동남쪽으로는 영복리 한림마을과 마주하고 있다.
문헌상 마을의 지명이 처음 나온 곳은 1789년 ‘호구총수’의 기록으로 보면 이 당시에 칠량면 28개 마을 중 한 마을로 구로(舊路)가 나온다.
당시 50여호가 살고 있었으며, 인근인 송산도 구로에 속했는데 10여호에 가까운 탐진 최씨들이 거주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송산과 분리, 통합 반복되다가 1930년 중반에 구로?송산이 다시 분구가 되어 현재와 같은 행정편제가 굳어졌다. 마을은 1.2반은 우대미, 3.4.5반은 아리대미로 불린다.
마을의 최초 형성시기는 1976년 ‘강진군 마을 우래지’ 에 보면 ‘추계 추씨가 터을 잡았다하나 확실하지 않고, 그 후 밀양박씨가 산세를 따라 이주하여 취락이 형성된 곳이라’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26개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현재 105가구가 살고 있고 남자는 87명, 여자는 104명으로 총 191명이 구로마을에 거주하고 있으며, 70%가 농어업에 종사를 하고 있다.
▲ 주민들
마을에서 만난 주민들은 “올해는 나락값도 급락하면서 작녁까지만 해도 상인들이 직접와서 나락을 매입해서 갔는데 지금은 농민들이 직접 가져다주고 나락이 좀 나쁘다고 매입하지 않는다면서 농촌에 살기가 더 팍팍하게 생겼다”고 하소연했다.
마을 주민 박모씨는 “과거 구로마을은 농토가 넓고 3면이 바다를 이루고 있어서 꼬막, 대합, 맛 등 어패류 생산량이 많아서 일꾼을 데리고 있는 집이 많았다” 며 “지금은 만덕지구 간척사업과 장흥댐건설, 남포일대 소각처리장이나 폐수종말처리장(주민생각)등으로 바다가 오염되어 어패류들이 고갈되어가는 추세”라며 아쉬움을 표현했다.
▲ 주민들
구로마을 노갑삼 이장은 “구로마을에 화재가 발생하면 어떤 마을보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일치단결해서 조기에 화재진압한다” 고 말했다.
그 이유는 기유년(1909년) 10월17일 한 가정의 부주의로 화재가 발생하여 40여호가 전소되는 큰 화재사건이 발생해 주민들은 인근 동백리 민가로 피신했기 때문이다.
엄동설환이 임박할 때 온 마을이 불에 타고 추백선(작고)씨의 집만 남았으니 그 참상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래서 지금도 마을에 작은 연기만 피어올라도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 고 마을주민 누구나가 긴장하고 살펴본다고 한다

인터뷰-박선곤 회장(재경구로향우회)
“어르신 공경, 단결과 단합이 잘된 곳이다”

1909년 큰 화재로 모든 집이 전소 됐을 때 국가 도움 없이 오로지 마을사람들이 혼연일체가 돼 울력으로 직접 가옥을 지었다고 어른실들한데 이야기를 들었다.
또 1970년초에 좁은 농로 1450m 길을 땅소유 주민들이 십시일반 마을에 희사를 해 마을 울력으로 5미터 폭으로 확장공사를 했다.
이때 70년초라 경운기나 자동차는 엄두도 못내고 남자는 지게, 여자는 다라를 이용하여 공사를 했다.
5.16군사쿠테타 직후 국가재건운동이란 것이 있었는데 이때 구로마을로 시멘트 100여포가 지원되어서 집집마다 부엌보수공사를 했고 목재가 지원되어서 집집마다 찬장을 만들어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농로확장공사라든지 부엌보수공사, 집집마다 찬장을 만들어 활용하는 등 마을의 혼연일체가 된 모습이 밖으로 알려지면서 면에서 모범마을, 군 모범마을, 전라남도 모범마을, 마침내 대한민국 모범마을로 선정돼 전국에서 마을 견학(일명 벤치마킹) 왔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 당시에 모범 마을이 되면 가로세로 1미터 폭 함석으로 제작된 별을 수여했다고 한다.
마을회관에 면 모범마을 선정 때 1개, 군 모범마을 선정 때 1개, 전라남도모범마을 때 1개 해서 3개의 별이 걸어졌었다고 한다.
박선곤 회장은 “고향을 생각하면 금방이도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며 “어린시절 선창에 나가 문저리도 잡고 수영도 했던 친구들이 그립다”고 말했다.
또 “어버이날이면 부모님 같은 어르신들 조금이라도 더 기쁘고 행복하게 할 수 있도록 회원들이 회비를 모아 매달 보내드린다” 며 “어르신들이 건강하게 오래오래 마을을 지켜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랬다.  

최한선(구로마을 출신) 시인의 시다.

구로리(鷗鷺里) 사람들

달이 가르쳐 준
차고 줆의 세상사

갈매기 백로랑
한 솥 밥을 지으며
같은 반찬
겸상하며
살아온 사람들

오늘도
코끝을 간지럽히는
불뚝 선 갯 향기에
온 삭신 지근거린다
오만 마디 떨리며

얼마큼 퍼내야
갯물은 본색일까
갯벌에 청춘 묻고
얇아진 세울인데

▲ 최한선 시인
최한선(56세)
-전남 강진 칠량 구로출생
-2001년 ‘21세기문학’에 시 <구강포 갈매기>등으로 등단
-빛고을 청년대상, 열린시학상, 박용철문학상 등 수상
-현재 광주여대 이사, 전남도립대 교수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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