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를 통해 본 사생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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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를 통해 본 사생관<1>
  • 장강뉴스 기자
  • 승인 2013.11.25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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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발생과 기원은 어디서부터 시작했나…

인류학 분야의 선구자 ‘에드워드 파일러’ “존재하는 비물질적인 영에 대한 신앙이 종교의 기원이다” 주장
그리스도교는 십자가, 불교는 부처님, 이슬람 사원은 메카를 향하듯 종교 형태로 발전되었습니다

▲ 이형문 작가 / 영랑기념사업회 자문위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던 세상 우주(宇宙)속의 이 한 부분 지구(地球) 덩어리 속에 생명체(生命體)를 창조(創造)하신 이 유일(唯一)의 절대자분을 일컬어 신(神) 또는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 하늘(天)과 땅(地)과 우주의 주인이신 분, 그 분이 존재(存在)한다고 믿을 때 그 절대자를 지칭하여 각 종교들에서 부르는 명칭만 다를 뿐, 그 인식(認識) 관념(觀念)은 이 세상과 인간과의 주종관계(主從關係)에서 비롯된 것이며, 천지(天地) 우주만물(宇宙萬物)을 섭리(攝理)창조(創造)하신 분은 단 “하나님“한 분이십니다.
19세기에는 자연신화적 상징들을 열과 빛을 주는 태양을 향해 해, 달, 별, 폭풍, 계절 등 우주근원의 실제 한 근원을 두고, 황홀경속에서 두 손을 뻗쳐 예배하는 숭배정신인 원시부족의 자연(自然) 신화적(神話的) 인격신(人格神)으로 진화(進化)되면서 인류학 분야의 선구자중 한 사람인 “에드워드 파일러”(Edward B, Tylor)(1832~1917)은 존재하는 비물질적인 영(靈)에 대한 신앙이 종교의 기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자연적인 정령(精靈)이 존재한다고 믿는 신앙을 일컬어“애니미즘”(anima)에서 따온 것임. 따라서 철학자 스펜서(1820~1903년)는 조상숭배는 꿈의 경험에서 비롯된 정령신앙과 관계가 있다고 봄. 죽은 조상을 꿈에서 보고는 그 조상이 영혼으로 존재한다고 믿으면서 신(神)으로 모시게 된 것. 결국, 조상숭배로부터 시작된 종교의 기원이라 보면서 종교인은 영적인 존재를 믿기 시작하면서 그 점령은 주문을 가지고 그저 기도를 태양을 향해 간청을 함으로써만 움직일 수 있는 존재(存在)라 생각했습니다.
▲ 불교
이런 상태의 환경에서 원시인(原始人)들은 벌거벗고 숲과 물가에서 생존이 가능(可能)하게 되면서 처음에는 이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천둥, 번개, 지진, 산불이었습니다. 그럴 때 이들은 동굴에 숨거나 바위나 나무를 붙잡고 자신을 살려달라고 애원(哀願)할 때 그것이 자신을 지켜준 것에 고맙다는 생각으로 무조건 절을 하는 숭배정신(崇拜精神)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자자손손(子子孫孫) 이어져 내려오며 계승(繼承)하고, 발전되어 무조건 믿는 종교형태(宗敎形態)를 가지게 된 것이지요.
이런 속에 날이 밝는 아침이 되면 제일처음 떠오르는 태양(太陽)과 어두운 밤이 되면 하늘에 떠오르는 달(月)을 보면서 해와 달을 숭배케 되는 태양신(太陽 神)이 탄생하게 된 이후 차츰 차츰 발전되어 그 절대자(絶對者)가 탄생하게 되는데, 오늘 날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내신 “예수” 불교(佛敎)에서는 석가(釋迦), 유교에서는 공자(孔子),맹자(孟子), 이슬람에서는 “알라”등 기타 사이비 유사종교 형태로 수 천종의 미신까지 형성되고 말았습니다.
18세기에“드.부루스”(1709년~1777년)는 바위와 같은 무생물이나 동물과 같은 생물을 숭배하는 주물숭배(呪物崇拜)(ferishism)가 종교의 가장 오래된 형태라고 주장, 애머니즘 즉 물체에 깃들어 있으면서도 별개의 존재인 정령에 대한 숭배가 원초적인 형태의 종교로 시작 여기서 다신교(多神敎)(polyheism)에서 마지막으로 하나의 신만이 존재하면서 절대적인 힘을 소유한다고 믿는 유일신(唯一神)(monotheism)로 진화했다는 식의 단계적 진화로 형성 발전됨.
▲ 이슬람교
총체적으로 초자연적인 힘의 영역과 관련된 것이 인간과 직접 관련되어 그 신의 율법이 그 사회의 주요 규율인 신성화 해 놓은 것이라 주장. 즉 종교란 인간의 행위를 연구하는 것, 다시말해, 종교행위는 인간의 행위의 특징으로 인정케 된 점. 이러한 진화과정에서 본 각 종교형태는 불경스러운 광신(狂信)이며,“하늘에서 무시무시한 얼굴로 인간을 노려보고 있는”탐욕스러운 괴물로 비유해 종교란 사실을 미신(迷信)(superstitie)이라는 존경의 태도가 예배의 의식으로 표현하도록 가르치게 된 것, 이상은 “리차드 컴스탁”저 윤원철 옮김“방법론의 문제와 원시종교 탐구” 참조. 종교인은 초자연적 존재질서로 발전되면서 “영의 존재에 대한 신앙”의 특징이 “신비스러움(mysterium)의 감정으로 불가사의함을 느끼게 하는 감정과 두려움의 성격이 협박과 반발이라는 수동적이고, 부정적인 분위기의 감정, 반면에 매혹은 적극적으로 접근하려는 감정이 됩니다. 여기에서 ”구약성경“창세기(28장,17절)에 야곱의 말을 인용해 봅니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라는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殿)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바가바드 기따”11장“두렵고 경이로운 모습, 오~커다란 마음의 소유자 당신을 볼 때 산계(三界)가 진동하도다.”케나 우빠니샤드“4장 29절에 ”부라만“이 묘사하기를 ”번개가 치딛는다 아 아! 눈이 부셔 뜰 수 없다 아 아! 신(神)이여 “불교는 현세에서 세상의 진상을 깨닫는 것으로 표현했고, 결국 종교란 현세에서 궁극적인 관심에 사로잡힌 상태를 말함. 그 상징으로 그리스도교는 십자가, 불교는 부처님, 이슬람 사원은 메카를 향하듯 종교 형태로 발전되었습니다.
고대문명의 여러 종교의 공통된 형태와 발상, 그리고 창조설화는 기원 전 3천년 경부터 시작된 청동기 시대의 야금술의 발전, 이것이 문명의 발생시기와 일치하고 있지요. 주로 나일강 유역에 이집트의 기원전 3천년 경에 시작하여 525년 페르시아에 정복될 때까지 번성했습니다.
이상의 고대문명의 발상의 경위를 이 정도로 정리하고 현실종교 형태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우선, 기독교의 하나님은 “영(靈)이신데 그의 존재하심과 지혜(知慧)와 거룩하심, 그리고 공의와 인자하심이 무한(無限)하여 영원(永遠)하시고, 불변하신 분”이라 칭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보다 500년이 앞선 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붓다”가 우주의 깨우침을 얻고, 중생(衆生)의 자비(慈悲)를 심어줬다 하여 “부처님”이라 하였고, 인간중심(人間中心)의 진리(眞理)를 제시했지요.
▲ 천주교
석가모니 붓타의 석존은 히말라야 산속 카필라 바루스에서 왕의 아들로 탄생(BC6세기)했으나 세속(世俗)의 영화(榮華)를 다 버리고 진리(眞理)를 깨우치신 분이십니다.
한편 중동에서는 1400년 전 “모하메트”가 예수와 같은 하나님이보낸 마지막 예언자로 아라비아에 나타났다하여 이들 부족은 월신(月神)이란 유일신을 믿게 되고, 이슬람이“신의 뜻에 따라 절대 복종을 통해 평화를 얻는다.”라는 말로 그 핵심은 율법(律法)이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 한길이었습니다.“ 현세에서 율법대로 살아야 내세(來世)에 복이 오고, 천국(天國)에 갈 수 있다.” 라고 하여 사후 부활이나 심판의 날을 절대적으로 믿는 종교형태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 곁에 신의 형태나 모습은 없지만, 이 세상이 시작된 태고(太古)쩍부터 인간들 곁에 함께 언제나 하나님이 존명(存命)하고 계시다는 생각, 즉 유신론(有神論)적 인식(認識)을 갖게 됩니다. 마치 해와 달 그리고 자연의 물(水),불(火),바람(風)이 인간들 곁에 언제나 같이 있듯 간접적으로 깨우쳐 주고 있지요. 그러므로 신(神) 즉 하나님은 우리 인식너머에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은 무한(無限)이며 인간은 유한(有限)의 존재(存在)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 광대무변(廣大無邊)한 대 우주는 진리의 바다이며,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恩惠)와 자비(慈悲)로 충만합니다. 불교에서는 우주(宇宙)를 가리켜 시간과 공간으로 표시하고, 범어로 “아미타”(부처를 믿고 연불하면 죽은 뒤에 극락정토(極樂淨土)에 태어난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불천(佛天)은 불타(佛陀)를 의미하며 삼보(三寶)인 불(佛),법(法),승(僧)으로 나타내지요.
우리의 한 생명체도 이 우주의 오묘(奧妙)한 질서 밖에서는 존재치 못하듯 춘하추동(春夏秋冬)의 변동하는 질서 속에서 살아가게 되어있습니다. 이런 속에 풀벌레로나 날 짐승으로 태어나지 않고 만물의 영장(靈長)인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고 살아가야 하지요.
이 지구상에는 살기 좋고, 경치 좋은 곳이 끝없이 널려있습니다. 돈이 많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은 이 멋진 세상에서 하루 가는 것을 너무 아쉬워하며 삶과 죽음 사이에서 몸부림치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얼마나 죽기 싫어 가슴 아픈 일이겠습니까?
필자가 과거 6년 전 남태평양 적도구역 마지막 지상낙원(地上樂園)이라는“피지”(fiji)에서 13년 동안 이민생활(移民生活)을하며 느낀 사실은 천혜(天惠)의 관광지(觀光地)에 돈 많은 부호(富豪)들이 줄지어 찿아 오고, 또 늙어가는 인생이 아쉬워 노년을 즐기려고 함께 손잡고, 걸어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 지상천국(地上天國)에서 살아가는 의미(意味)를 실감했습니다. 그런데 내 인생이 시한부 선고를 받고 하루하루를 점찍으며 살아간다고 가정해본다면 그 얼마나 이승을 떠나고 싶지 않아 몸부림칠까? 한번 생각해 봅니다. /제2부는 다음에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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