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韓國)과 일본(日本)의 차이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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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韓國)과 일본(日本)의 차이점〈2〉
  • 장강뉴스 기자
  • 승인 2013.11.18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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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스런 일본의 이중적 너울 쓴 모습

 
“친절하고 겸손하며 예의바른 장점이 있는 반면, 개인이 아닌 집단적 행동일땐 이익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감내하는 민족성”

▲ 이형문 작가 / 영랑기념사업회 자문위원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속일본기”에 보면 일본은 우리나라 한민족의 영향을 받아 고대국가의 틀을 확립했고, 그들이 자랑하는 “아스카문화”와 “나라(奈良)문화”의 꽃이 우리나라 삼국시대 때 백제와 신라왕실과의 관계와 각종 문물을 비롯한 문화의 전래, 지명이나 사적지 등 한민족과의 관계를 빼놓고는 고대 일본 사 자체를 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며 특히 “나라”라는 지명의 이름 자체가 우리나라 말입니다. 현재 나라라는 곳은 오사카(대판)에서 전철로 1시간 거리의 가까운 곳에 있는 “나라 현“(奈良縣)의 도시지명이지요.
일본의 “아끼히도”(明仁)천황은 2001년 12월 그의 생일 날 일본 천황으로는 처음으로 고대 한민족과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기를 고대 야마토 조정의 황태자인 백벽왕(白璧王)과 결혼한 다카노 니이카사(高野新笠)가 백제 무령왕의 피를 이어받은 여성이며, 770년 남편인 백벽왕은 고닌(光仁)천황으로 즉위하였고, 그 아들은 훗날 츠네타케 칸무(恒武)천황으로 즉위하였다고 밝혔습니다.
츠네타케 칸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되어 있으므로 조선은 분명히 일본의 형님의 나라라는 사실을 “아끼히도” 천황 자신이 증명시켜준 증거가 됩니다.
따라서 고대 백제의 25대 왕이었던 무령왕은 일본 카카라 섬(加唐島)에서 출생하였고, 그 후 40여 년간의 행적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가 백제로 건너가 왕이 되었으며, 일본에서 결혼하여 순타태자(淳陀太子)를 낳은 것으로 되어있고, #(일본 책 최 원우 저서 참조) 따라서 백제인의 후손인 15대 천황 오우진(應神)천황과 닌도꾸(仁德)천황 부자가 백제인의 후손이라고 기록된 사실로도 충분히 증명이 됩니다. 이후 662년 백제가 멸망 후 50여만 명의 백제인 들이 일본으로 망명해서 큰 환영을 받고, 벼슬과 토지를 받았으며 당시의 인구 조사로 일본 귀족의 약 3분의1이 백제인 성씨였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은 개인적으로 사귀어보면 참 친절하고, 겸손하며, 예의바른 장점이 있는 반면, 개인이 아닌 집단적 행동일 땐 저들의 이익을 위해 개인을 희생을 감내하고 칼을 숨겼다가 가는 잔인성과 민족성을 지니고 있는 쫌 생이 섬나라 이중적 얼굴의 국민성입니다.
실 예로 일본인과 깊이 접촉해보면 절대로 속내를 감추고 확실한 대답을 회피하는 자들로 틀림없이 확신의 답을 해도 될 일을 “글세요“라든지 애매모호하게 ”소 대쇼까 내“(아 그럴까요).절대로 그렇다(소대쓰)라고 확실한 답을 하지 않고 피합니다. 필자는 무역업당시 이들과 접촉하며 처음에는 그런 사정도 모르고 상당히 당황한 일이 많았지요.

특히, 우리는 이런 이웃나라 일본을 철저히 미워하면서도 일본을 깊이 알아야하겠기에 일본과 국교가 정상화(1965년)된 이후 필자는 일본 출입이 어려울 때 무역업의 비지니스로 1970년대 후반기 때부터 비자발급을 받아 일본 출입을 자유로 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우리나라가 북한 김일성이 남침으로 전쟁을 발발할 당시 일본은 패망직후여서 가난을 면치 못해 일본 여인들이 나서서 미군에 몸을 바치고 달라를 벌어들이는 짓을 할 당시였는데, 한국동란을 기화로 미국대신 전쟁 물자를 만들어 팔아먹고 경제가 일시에 부강해진 나라로서 이런 고마운 이웃의 형님나라를 전혀 모르는 섬나라 근성의 쫌 생이 들이 틀림없습니다.
필자가 처음 일본을 가서보니 폐허가 된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100불에도 못 미치던 당시에 비해 약 15년 정도나 비약적인 발전으로 앞서있다는 사실을 실감 했습니다.
특히 산업분야가 당시 일본이 우리나라에 비해 근 20여년 정도 앞서있을 때이고 더구나 컴퓨터 분야에서 우리는 걸음마단계일 때, 일본은 소형 쏘니, 나쇼날, 필립스 등의 전자제품이 동경 “아끼하바라”집합소에 닌덴도, 세가, 다이또, 께임기 등 없는 것 없이 일본이 미국나라들과 경쟁하며 전자제품을 석권하고 있을 때입니다.
필자는 당시 우리나라 컴퓨터 초창기 발전을 위해 이들의 비밀병기인 ic 부품을 구입할 수 있는 길을 텄습니다. 그 실 예로 일본 전국에서 야쿠자 조직중 제일 큰 야마구찌 구미(山口組)(회장 “정건영” 당시 한국 김종필 국무총리와도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고, 부산,~일본 시모노세끼(하관)간 연락선 선주이기도 함) 슬하에 “쓰무라 센무(전무)를 알게 돼 (필자가 일본 갈 때 부하직원의 외삼촌이라는 분이 일본에 있다며 편지를 좀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당시는 일본과 전화 연락이 어려운 때임) 동경에 머문 때 전화로 한번 연락해본 분인데 ”쓰무라센무“라는 분이 그렇게 엄청난 조직의 야쿠쟈 회사 전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고, 또 필자가 머문 궁성 옆 조용한 ”회야몬드 호텔“에 투숙할 당시 벤즈 600 차를 직접 몰고 와 필자를 만나 조카의 편지를 전해줄 때 보니 남자다운 듬직한 인품에 놀랐으며, 같이 동행한 곁에 나이 드신 분이 자기 개인 비서라는 인사소개에 다시 한 번 놀랐습니다.
그래서 이런 분을 안 이상 조국 한국을 위해 뭔가 좋은 일 할 수 있을 분 같아 호텔에서 밤새 머리를 짠 후 이분을 뒷날 다시 만나자고하여 호텔 로비에 왔을 때 부탁 하나를 꼭 들어 달라고 하니 “그게 뭐냐? 고 묻기에 사실 한국이 이제야 컴퓨터회사가 발족돼 초창기로 ic부품의 중요한 것들을 일본 큰 회사들에서 도저히 팔지 않고, 구하지 못해 전자제품을 만들지 못하는 실정인바 애로가 많으니 일본 회사에서 구입해 줄 수 없겠느냐? 고 말했더니 그런 거면 해 보자고 말한 후 승낙을 받고 품명을 적어오라 하여 불가능한 일이였지만, 혹시나 해서 필자가 삼성과 현대회사가 당시 동경에 유락죠의 한 빌딩에 연락 사무소로 주제하고 있을 때 이들에게 필요한 품명을 적어 달라하여 ”쓰무라 센무“에게 주었더니 3일 뒤에 한 품목에 열 개 이상 씩 전량을 구해다 줘 정말 다시 한 번 깜짝 놀랐습니다. 피는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했고, 만일, 이들 조직에서 부탁했는데 협조치 않고 거절하면 그 회사 중역의 생명에 위협받고, 회사경영에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절대 들어줄 수뿐이 없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쓰무라센무“의 개인 비서 (그 지역 경찰서장으로 정년퇴직하신 분)에게 들은 말입니다.
”쓰무라 센무“는 돈도 받지 않고 부탁한 종류대로 전량을 그냥 주셨습니다. 이후에도 수차 도움을 받았지요. 그 조직이 일본에서 제일 건실하고 튼튼한 야쿠쟈 조직이라는 사실을 일본에 머물며 잘 알게 됐습니다. 그리하여 3회에 걸쳐 당시 일화 약 480만 엔 정도를 벌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한국과 일본의 화폐비율이 3대1 할 때)
그러니 필자의 우연한 발상이었지만, 우리나라의 전자 기초산업의 초창기 ic부품 소재의 공급에 엄청난 보탬이 됐던 큰일을 해 냈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삼성이나 현대회사들에서는 당시 돈은 얼마든지 주겠으니 자기들 회사를 계속 도와달라고 필자에 매달렸지요. 오늘 날 우리 한국의 전자 제품이 일본에 앞서고 세계를 좌우하는 그 큰 기쁨을 필자는 조용히 느껴볼 뿐입니다.

그리고 당시 1980년대 초반 한국의 건설 분야의 중공업이 발판을 내리면서 필자는 울산 현대중공업을 비롯하여 화력발전소와 여천지구 화학공장(남해화학, 한양화학 다우 케미칼) 등지의 공단에 기계류와 배관, 발브(고압발브 저압발브)류, 행가 카스켙 특수 윤활유와 용접봉, 계기등 부품 할 것 없이 일본에 기술자를 한국으로 파트너 식으로 불러들여 상호 거래 전문기술인력 관계를 이들과 맺어 한국 공단 건설업에 납품 이바지했습니다.
이 큰 일의 뒷받침을 당시 현대 미포조선소 사장이던 “백 충기“(여수출신이고, 해양대학 졸업) 선배의 도움으로 일본 동경에 ”삼호물산“(산요 붓싼) 대표이사 “윤 우순”회장(당시 한국인으로 일본에서 무역회사를 크게 경영하신분이며 특히 김대중 대통령 부인“이 회호”여사님과 과거 이화여중 동기동창생)님 분을 소개받아 일본 기술자와 부품 등을 한국에 공급해 주는 역할의 분담으로 윤 회장과 이익의 반분씩을 나누기로 약정하고, 배관 계통의 세계적인 메이커로 손꼽는 제일고주파회사와 일본발조 행가 메이카 그리고, 발전소에 공급할 고압 벨브와 저압벱브의 전문 생산메이커인 “기다사와”와 “오카노발브” 회사 등을 윤 우순 회장님이 뒷받침을 다 하여줬습니다. 그렇게 젊은 시절 필자는 많은 돈을 모았고, 국가를 위해 값진 일을 했다고 자부하는 바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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