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韓國)과 일본(日本)의 차이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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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韓國)과 일본(日本)의 차이점〈1〉
  • 장강뉴스 기자
  • 승인 2013.11.18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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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 일본(日本)을 꼭 알아야 이긴다.

 
 가깝고도 먼 이웃 일본을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모르는 것이 많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역사의 사실만은 꼭 알고 넘어가야겠기에 일본을 알아야 일본을 일길 수 있다는 사실들을 낱낱이 밝혀두기 위해 본지는 앞으로 연재기사로 싣고자 한다./편집자 주

일본 패망되면서 오늘날까지 분단국가로 세계 유일
식민지배 국권 침탈… ‘전범’ 야스쿠니 신사참배라니

 
필자는 젊은 시절“나라사랑 실천 운동본부” 중앙조직운영위원(1992년 11월 17일 제 7~302호)으로 위촉받아 국가를 위한 일에 앞장서 서울 본부에서 일을 하였습니다.
필자가 해방되던 1945년은 초등학교 4학년 되던 해 대동아전쟁 막바지 때라서 피죽도 못 먹을 정도로 엄청나게 굶고 고생하던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고난의 고통은 일본이 패망되면서 약소국가이던 우리나라 땅을 미국과 쏘련이 갈라먹기 식으로 38선을 두 동강이로 분단시켜 6.25전쟁까지 하게 만든 당사자 일본이야말로 따지고 보면 우리와는 철천지원수의 나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런 가깝고도 먼 이웃 일본을 오늘 날 우리는 너무나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역사의 사실만은 꼭 알고 넘어가야겠기에 필자는 일본을 알아야 일본을 이길 수 있다는 다음의 사실들을 낱낱이 밝혀두고자 하는 바입니다.
1905년 11월 17일 일제의 강요에 의해 을사보호조약(을사늑약)을 맺게 되지요. 나중에 중국 할빈에서 “안중근”의사에 총살당한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이가 조선주둔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를 대동하고 야밤에 임금님이 계시는 대궐을 침범하여 강제로 조선을 지배하겠다는 핵심적 내용의 괴문서를 고종황제에게 강요하자 목숨을 끊을지언정 끝끝내 그 문서를 허락지 않았으나 이후 박제순 외무대신에게 인장을 가져오게 하여 강제로 날인시켰습니다.
이때 을사보호조약을 맺을 때 승인에 앞장선 “박제순“이완용 “이근택”“이지용”,“권중현” 다섯 명이 당시 우리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로 이들을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부릅니다.
이때부터 마침내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며 일제의 보호를 받게 만들면서 국권을 침탈당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밝혀지자 백성들의 분노와 울분으로 조약을 반대한다는 투쟁이 일파만파로 확산되었으며 당시“민영환“선생은 자결하였고, 김 하원, 이 기범, 차 병수는 일본 헌병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을사늑약 체결 5년 후, 조선의 마지막 왕“순종”때 일본의 탄압에 못 이겨 한일 합병 조약체결 사실을 발표하게 되던 운명적인 그 해 8월 10일을 전후해 일본 동경 지역에 전에 볼 수 없었던 엄청난 집중 호우가 쏟아졌다고 하는 심각한 수혜상황의 전문(8월 14일)을 보내온 사실이 확인됨. 드디어 1910년 8월22일 오후2시 창덕궁 대조전 홍복현에서 조선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리고, 총리대신 이완용, 내무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증용, 탁지부대신 고영희, 법무대신 이 재곤, 왕족대표 이재면, 원로대표 김윤식, 궁내대신 민병석, 시종원경 윤덕영, 이병무 등이 참석한 가운데 총리대신 이완용은 이 날 한일 합병조약을 가결하고 체결했음.
 
이를 경술국치(庚戌國恥)라하며 경술 9적은 우리나라 백성을 배반하고 나라를 일본에 넘겨준 놈들임. 이 때 윤덕영, 이완용, 한상룡, 조중웅, 신흥우등 5인은 합병한 것에 만족하다고 말한 자들로 대한제국의 멸망은 이들 내부의 부정부패인 적 때문이었고, 이완용은 한일합병의 주역으로 훈1등 백작(伯爵)이 되었고, 백성은 나라 잃은 비통한 심경으로 합병조항 발표를 지켜보게 됨. 그 조항은 전체 8항으로 공포 융희(隆熙) 4년 8월 22일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 도장과 명치 43년 8월 22일 통감 자작(子爵) 테라우찌 마사타케(寺內正毅) 도장으로 작성 이 비통하고 부끄러운 문서가 또 어디 있겠는가!!
이후 1910년 8월 29일 강제로 국세를 찍게 강요했으나 순종황제는 끝까지 “한일 합병은 무효”라고 선언했으며 이완용 등 일본의 역신인 무리들이 협박하여 한 것이노라고 마지막 유언을 남겼습니다. #(참고자료 구한말 일제 강점기를 쓴 “박 윤식”1928년5월 17일생 황해도 사리원 출생, 총회 신학교 목회자 출신 저술 참조)
이런 중요한 지난 우리의 수난의 역사를 잃어버려도 좋다는 역사를 대학시험 필수과목에서 선택과목으로 돌려버리는 위정자들의 어처구니없는 문교정책에 규탄과 분노와 항의가 심해지자 2013년 8월 23일 드디어“한국사”를 대학시험 필수과목으로 결정한다. 고 결정해 그나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후 이들 일제는 본격적으로 황국신민정책이 계속되면서 민족문화 말살정책으로 초등학교에 등교하는 필자의 어린 학생들의 이름까지 일본 이름으로 바꾸고,(필자의 경우 “오야마 지로”(大山 次郞) 심지어는 매일 아침 조례시간 운동장에 모이게 하여 일본의 동쪽을 향해 천황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시키는 동방요배(東方遙拜)를 강요시켰고, 낮에는 신사 참배까지 강제로 끌고 가 “덴노헤이카 반사이”(천황폐하 만세)까지 세 번이나 따라하게 강요당했습니다.
이후 우리나라가 힘없는 백성이 되어 대동아 전쟁 총알받이로 징병과징용에 강제로 끌고 가 수없는 인명을 살상시켜놓고도 오늘날까지 그 잘못과 역사를 전혀 인정치 않고, 오히려 우리나라를 도와줬다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놈들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필자의 선친께서도 당시 강제로 여수 신월리 해군기지에 징용당해 끌려갔다 살아 돌아오신 산 증인입니다).
그런 일본인들이 지금까지도 과거의 잘못을 솔직하고 진실 되게 양심고백을 들어 본바가 한 번도 없이 오히려 식민지배 당시 조선의 건설에 이바지했고, 좋은 일만했다는 괴변을 늘어놓고 있는 자들로 더구나 역사교육의 회피와 거짓말로 오늘 날 “아베 신조”(安培晉三) 총리정권의 극우파의 보수적 국민성을 결집시켜 과거 우리나라나 중국 등 침략을 정당화시켜 한국과 중국의 한 가운데서 줄타기를 할 인물로 역사를 왜곡 날조하며 일본인에 인정을 받아 참의원선거에까지 과반수를 확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오늘 날 2013년 8월 15일 68회 광복절 날 미국 “멕아더” 장군 항복문서 속에도 한국에 저질은 왜곡사실이 기록돼있음을 미국에서 재차 발표하였고, 또, 경축사에서 “박 근혜”대통령깨서 역사란 1000년이 지난 뒤에도 진실은 남아있게 되어있으니 솔직하게 일본이 저질은 위안부동원 등 역사왜곡사실을 시인 고백하는 태도가 중요하며, 그런 후 앞으로 양국의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분노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인식하여야하는데 일본 우익 파들과 아베총리를 제외한 나머지 각료들이 야수쿠니 신사참배까지 강행하고 있으며 개헌발의로 군국주의 때 헌법으로 바꾸자고 까지 호소하는 정신 나간 자들의 실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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