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보림사의 창건설화와 원표 대사<최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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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보림사의 창건설화와 원표 대사<최종회>
  • 임순종 기자
  • 승인 2013.11.12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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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제산에 머물다가 신라로 귀국해 보림사 창건

“선종이 흥성하기 전에는 해외로 유학하러 가는 승려들은 화엄경에 대한 연구가 대세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장흥 보림사 전경
원표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창성탑비문에 국왕의 초청을 받은 체징이 육조 혜능처럼 병을 핑계대고 사양하였다고 하는데 이것 또한 육조단경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헌안대왕이 소문을 듣고 도를 우러르기를 꿈속에서도 사모하여 선문을 열려고 서울로 들어오기를 청하면서, 여름 6월에 장사현 부수 김언경을 보내어 차와 약을 가지고 가서 맞이하게 하였다.
선사는 구름과 바위 속에 지내는 것이 편안하고 또 결계(結戒)의 달이었으므로 정명〈유마거사〉처럼 병을 핑계하면서 육조(六祖)스님처럼 말하며 사양하였다.
다음은 단경에 육조 혜능이 당조(唐朝)의 초청에 병을 핑계로 사양하는 대목이다.
신룡(神龍) 2년 1월 15일에 측천무후(則天武后)와 중종(中宗)이 조서로 이르기를 “...이제 내시 설간을 보내면서 조서를 전하여 맞이하고자 하오니, 원컨대 대사께서는 자비로운 생각으로 속히 서울에 와 주소서” 하니, 조사는 병을 핑계하는 글을 올려 산림 속에서 생을 마치기를 원하였다.
이상은 주로 육조단경의 내용과 창성탑비의 간략(簡略)된 비문과 사적기 등을 서로 비교하여 본 것으로 보림사의 창건설화가 육조단경의 내용과 많은 부분이 서로 흡사함을 알 수 있다.
원표는 인도에 유학한 다음 80권 《화엄경》을 모시고 와서 《화엄경》에 나오는 천관보살이 상주한다는 중국의 지제산에 머물다가 신라로 귀국하여 보림사를 창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지산문의 개산조인 도의국사는 입당(入唐)하여 처음에는 《화엄경》의 〈보살주처품〉에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중국의 화엄(華嚴)성지(聖地)인 산시성(山西省)의 오대산(五臺山)에 참배하였으며 보단사(寶檀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고 했으니, 도의가 중국에 유학하러간 동기는 《화엄경》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선종이 흥성하기 전에는 해외로 유학하러 가는 승려들은 《화엄경》에 대한 연구가 대세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가지산의 지명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경남 양산의 석남사(石南寺)도 도의 국사를 개산조로 모시고 있으며 그 산 이름도 가지산이다.
가지(迦智)의 가(迦)는 부처이름 가, 만날 가, 막을 가, 등의 뜻이 있다. 가(迦)는 범어 kya의 차음자(借音字)로 보통 불경의 번역에 많이 썼다.
석가(釋迦)모니께서 태어나신 가비라(迦毘羅), 불법의 수행처인 가람(迦藍) 석가(釋迦)부처님의 정법안장을 얻어 선종의 초조(初祖)가 된 가섭(迦葉)존자를 비롯한 선종의 역대 조사들 가운데 제5조 제다가(提多迦)존자, 제6대 미차가(彌遮迦)존자, 제13조 가비마라(迦毘摩羅) 존자, 제15조 가나제바(迦那提바)존자, 제17조 승가난제(僧迦難提) 존자 등등.......
그러니 가지산(迦智山)은 부처님의 지혜를 닦아 잇는 산이라는 뜻일 것이다.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석가(釋迦) 세존으로부터 정법안장을 부촉 받은 가섭(迦葉)이 초조(初祖)가 되어 역대로 전등(傳燈)하여 달마대사로 이어져 중국으로 전해져 온 선종은 중국의 육조혜능까지 33대라고 한다.
도의국사는 《화엄경》을 공부하러 중국에 갔다가 서당 지장을 만나 육조 혜능을 비조(鼻祖)로 하는 남종선(南宗禪)의 적통을 이어왔으며 한국 선종의 종조(宗祖)가 되는 해동선문의 종찰인 가지산문의 개산조(開山祖)가 되었다.
그리고 고려 말엽에 가지산파인 태고보우는 중국에 가서 남종선 임제종의 석옥청공의 법맥을 이어와서 보림사의 주지가 되었다.
그런 연유 등으로 가지산 보림사는 남종선의 적통(嫡統)임을 뒷받침하고 그 정체(正體)를 정립하기 위해서《육조단경》에 나오는 혜능이 머물렀던 보림사와 흡사한 각색(脚色)되어진 창건 설화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육조단경의 보림사 창건에 나오는 인도에서 온 지약(智藥)삼장과 같은 인물이 필요했고, 인도에 유학하여 80 화엄경》을 공부하고 중국에 머물다가 돌아왔다는 원표대덕의 행적은 역사적인 진위(眞僞)여부를 떠나 우연(偶然)의 일치(一致)처럼 해동의 보림사 창건설화에 알맞은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원표 대사 국제학술세미나 논문집에서 발췌-현봉(송광사 스님)
                                           /정리=임순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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