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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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⑧
  • 장강뉴스
  • 승인 2022.02.14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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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군 부산면 지천리 최씨 가족의 비극

장흥군은 현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따라 한국전쟁 전후 장흥에서 벌어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 조사·기록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조사에 따라 진실규명신청서를 작성하여 관계 기관에 접수한다. 이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사)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은 본지 지면에 이 아픈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

 

갓골 사장나무 앞에서 1950년 가을을 이야기하는 임시순(87세, 왼쪽에서 두 번째)
갓골 사장나무 앞에서 1950년 가을을 이야기하는 임시순(87세, 왼쪽에서 두 번째)

총탄을 맞아 전쟁이 끝나고도 10여 년 동안 피눈물을 흘린 갓골 정자나무

장흥군 부산면 지천리 최씨 가족의 비극

1950년 시월 말경 부산면 갓골에서 살던 임시순(당시 15살)은 아버지와 나락을 베러 가려고 마당 장독대 옆에서 낫을 갈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기역산 쪽에서 콰앙 하고 총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많은 군인들이 마을로 들이닥쳤다.

마을을 점령한 군인들은 마을 사람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정자나무 근처로 불러 모았다. 임시순도 그 속에 있었다.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마을 사람들은 곧바로 공포에 휩싸였다. 굴비 엮듯 묶인 여덟 명의 빨치산들은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군인의 총구에 푹푹 고꾸라졌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터지고 인민군이 기세등등하게 남쪽으로 물밀듯 쳐들어왔는데, 인민군이 장흥군을 점령한 시기는 그해 7월 28일경이다. 인민군은 곧바로 동조하는 지방 좌익과 함께 부산지서에 ‘인민군 부산면분주소’를 설치한다.

임시순은 어느 날 학교 선생님에게 부름을 받는다. 노래를 잘했던 임시순은 풍금 박자에 맞추어 문강식(가명) 선생에게 ‘인민군의 노래’를 배운다. 할 수 없이 가사를 등사해서 부산면 유량리, 구룡리 각 마을에 돌아다니며 노래를 가르친다.

임시순은 남로당 활동을 했던 집안 형님뻘 되는 임장순(가명)에게 갓골마을 사랑방에서 이미 이 노래들을 배운 터였다. 얼마 안지나 임시순은 경찰과 국군이 부산면을 수복한 후, 이번에는 ‘국군의 노래’를 가르치려고 각 마을을 순례하게 된다.

장흥댐 축조 이전 부산면 갓골마을
장흥댐 축조 이전 부산면 갓골마을

 

두 달여가 지난 1950년 10월 초 다시 세상이 바뀐다. 서울이 수복되고 장흥에서도 인민군들이 후퇴한다. 지방 좌익은 해방구였던 유치면과 가까운 갓골로 인민군 부산분주소’를 옮긴다. 갓골은 산등성이 하나 넘으면 바로 유치 용문으로 통했고, 용문에서 가지산은 지척이다.

인민군 부산분주소는 당시 마을 부자였던 최병일(1924년생)의 가옥에 설치된다. 5칸 겹집일 정도로 집이 컸고, 마을 사장나무 바로 앞이라 집회를 열기에는 아주 좋은 위치였다. 최병일은 어쩔 수 없이 아내 김양례(1925년생)와 같이 분주소 사람들에게 밥을 해주고, 잠자리를 제공할 수밖에 없었다.

잘 익은 나락이 고개를 숙이던 10월 말경, 씨도 없이 사라진 최 씨 가족의 비극이 시작된다. 갓골마을을 점령한 군인들은 8명의 빨치산들을 사살한 후, 정자나무 앞으로 펼쳐진 두른배미(논)를 주목한다. 고개 숙인 나락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군인들은 집중 사격을 했고 두른배미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의 시신이 마을사람들이 모여 있는 정자나무 옆 모시 밭에 너부러졌다. 임시순이 보니 한 사람은 최병일의 동생 최병오(1927년생)였고, 또 한 사람은 2년 선배로 당시 장흥중학교에 다니던 김석호(당시 17세)였다.

최병일의 누나 최추석(당시 50세)은 당시 장평면 선정리 문씨 집안으로 시집을 가 살고 있었다. 집안의 비극을 전해들은 최추석은 다음 날 어린 아들 문국호(1943년 생)를 데리고 갓골 친정으로 간다. 문국호의 형들은 청년들이라 누가 해코지 할까봐, 어린 아들을 데리고 장평 선정에서 걸어걸어 부산면 갓골 친정에 온 것이다.

문국호의 기억에 따르면 외숙 최병일과 외숙모 김양례의 시신은 피 칠갑을 한 채로 집 밖 모시 밭 돌담에 갈기갈기 찢겨서 널려있었다. 이미 누가 거두어갔지만, 두 사람의 시신 옆에도 핏자국이 선연했다. 인민군분주소로 사용되었던 집주인 부부는 그날 밤 군인에게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장흥댐 축조 이후 부산면 갓골마을
장흥댐 축조 이후 부산면 갓골마을

 

임시순의 기억에 따르면 최병일 부부와 함께 모시 밭 돌담에서 학살된 마을주민은 그 당시 마을 이장 김경곤이었다. 이후 정신을 차린 최추석은 마을주민의 협조를 얻어 최병일 동생 부부를 마을 뒷산에 매장한다.

한편 군경은 빨치산 은거지를 없애기 위해, 가을이 끝난 12월경 갓골마을에 불을 질러 소개한다. 부산면 쪽으로 소개 당한 갓골마을 사람들은 숨겨놓은 곡식을 가지러 군경 몰래 마을을 드나들었다. 당시 마을 앞 기역산 고지에는 군경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날도 최병일의 어머니 안상심(1882년 생)은 최병오의 처와 어린 손자(두 사람 모두 호적 미등재 상태)를 데리고 갓골마을로 숨어들었다. 또한 임시순도 어머니와 같이 불타버린 집에 숨겨둔 곡식을 가지러 왔다.

그런데 갑자기 기역산 건너편 산에서 죽창을 든 빨치산 대여섯 명이 나타나 이들을 끌고 간다. 기역산 고지에서 군경이 내려다보고 있기에 빨치산들은 서둘렀다. 이 찰나에 개울을 건너던 임시순은 어머니의 치마폭을 끌어당기면서 그곳에 주저앉아 버린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것이다.

그렇게 끌려간 상원 할머니(임시순은 안상심을 이렇게 불렀다) 가족은 용문동 골짜기에서 빨치산들에게 학살당했다. 마을주민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먼저 죽은 가족이 있는 산에 묻었다고 한다.

늦가을 갓골 사장나무
늦가을 갓골 사장나무

 

이런 난리를 겪고 문국호의 외갓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문국호는 외갓집이 없는 설움을 어려서부터 뼈아프게 느꼈다고 말했다. 임시순은 그 당시 군인들이 마을 사장 나무에 총탄을 쐈다고 말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10여 년 동안 사장 나무가 피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지금 갓골은 장흥댐 축조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5~600살 나이 먹은 할아버지 사장나무(느티나무)만은 남았다. 갓골 뒷바우등에서 흘러내리는 좋은 물을 수백 년 먹고살아서일까.

1950년의 비극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던 마을 사장 나무는 올해도 새순이 돋았고, 가을에는 선연한 단풍으로 물들었다. 갓골 사장 나무를 보면서 인간들의 이 터무니를 관통하는 진실을 생각했다. (제공=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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