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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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⑦
  • 장강뉴스
  • 승인 2022.01.17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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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조국과 대동 사회를 꿈꾼 삼 형제의 비극

장흥군은 현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따라 한국전쟁 전후 장흥에서 벌어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 조사·기록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조사에 따라 진실규명신청서를 작성하여 관계 기관에 접수한다. 이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사)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은 본지 지면에 이 아픈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

장흥 용산면 어동마을
장흥 용산면 어동마을

 

통일 조국과 대동 사회를 꿈꾼 삼 형제의 비극

한국전쟁이 나고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뜨거운 여름, 무장한 인민군의 등장은 장흥사람들에게는 다소 충격이었다.

그들이 오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인민재판이란 처음 보는 재판에 그들이 말하는 사람들이 죄인 아닌 죄인으로 붙들려 나오고, 운집한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는 것이 형님이 말하던 사회주의와는 많이 달랐다.

고일규(가명)는 나의 바로 위의 형이다. 전쟁 전 1948년 미 군정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형님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 포고령 위반으로 목포형무소에 수감 되었다.

들리는 흉흉한 소문에 난리가 나고 형무소에 있는 수감자들을 군인과 경찰이 어디로 끌고 가서 죽이고, 인민군을 피해 후퇴를 한다는 소문에 형님의 안위가 무척이나 걱정스러웠다.

지난봄까지 형수님께서 면회를 다녀오시고 형님의 안위를 말해 준 것이 형님의 마지막 소식이다. 형수님은 지금 관산 와룡 사돈댁에서 어린 조카들과 힘들게 살고 있는 데 가서 살피지도 못하는 것이 죄스럽다.

인민군이 물러나고 군경이 장흥을 수복한 것이 엊그제이다. 경찰들이 장흥에 돌아와서 인민군에 부역한 사람들을 잡아내고 그들을 무참히 죽였다.

지난여름 인민군이 했던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그즈음 경찰로 근무하는 어릴 적 동무로부터 이상한 말을 들었다. “어이 차규, 형님(고일규)이 미군정에 반대하고 형무소에 수감 중이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 가족들도 빨갱이라고 잡아들인다네, 몸을 피하는 것이 좋겄네.”

어이없는 동무 상태의 말에 “자네 말은 잘 알겄네. 그란디 내가 왜 빨갱이고 우리 형님이 빨갱이인가? 자네 알다시피 나는 부모님 모시고 새끼들 키움서 사는 농사꾼이지 않은가? 금방 가을해야 쓴디 몸을 피해여?” 상태와 설왕설래 하다 비는 일단 피하자는 말에 어동마을 처가로 피신하기로 하고 온 것이 가을걷이도 못 하고 겨울이 되 버렸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장흥서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있는 막둥이도 함께 피신했다. 막둥이 성규와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법 속이 꽉 찬 어른이 된 동생이 자랑스러웠다.

앞으로 어떤 선생이 될 것이며 난리가 끝나면 혼인도 하겠다는 이야기, 평화 마을에 계신 부모님과 가족들 이야기, 형무소에 계신 큰형님 이야기며 조카들 이야기 등 사소하지만 유익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러던 중 장흥에서 동무 상태에게 급한 전갈이 왔다. 어떤 놈이 나를 밀고했으니 서둘러 거처를 옮기라는 내용이었다. 대충 짐을 꾸리고 집을 나서려는데 무장한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막내 성규는 가까스로 모면하고 도망갔지만 나는 경찰들에게 붙잡혔다.

경찰서에 도착하니 상태가 안타까운 모습으로 나를 쳐다본다. “아마 광주에 가서 재판을 받을 것이네. 구속을 면하기 힘들 것 같아.” 하며 말끝을 흐린다. 착잡하고 답답한 맘이 밀려온다. 막둥이는 무사한지 그것이 제일 걱정스럽다. 유치장 찬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와 동짓달 설한풍이 내 마음을 더 무겁고 차갑게 만든다.

매형 고차규의 억울한 희생을 이야기하는 처남 김해식(92세, 어동마을) 씨
매형 고차규의 억울한 희생을 이야기하는 처남 김해식(92세, 어동마을) 씨

 

이 이야기는 용산면 고씨 삼 형제가 한국전쟁 중에 국가권력에 의해 부당하게 죽임을 당한 이야기이다.

1950년 당시 고일규(가명)는 미 군정을 반대하는 운동으로 체포되어 포고령 위반으로 7년형을 받고 목포형무소에 수감 중이었다. 고일규는 수감 중에 군인들에게 살해 되었다.

전쟁이 발발하고 군경이 후퇴하면서 목포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수많은 재소자들을 압해도 앞 바다에 수장시킨 사건은 이미 확인 된 사실이다.

고차규(가명)는 전쟁 당시 부모님을 모시고 처자를 부양하며 농사를 짓던 평범한 농민이었다. 1950년 12월, 형님의 전과 때문에 억울하게 빨갱이 집안이라며 광주 형무소에 수감되어 이듬해 1951년 살해되었다.

고차규의 처남, 김철현(가명)의 친구가 그 당시 광주형무소에 근무하였는데 고차규의 죽음을 알려 주어 전쟁 후 시신이라도 수습할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 안양면 모령 선산에 모셔져 있다.

고성규(가명)는 삼 형제 중 막내로 그 당시 장흥서초등학교 교사였다고 한다. 역시 큰형의 전과를 빌미 삼아 빨갱이라는 너울을 씌워 구속하려 하자 도망을 다녔다고 한다. 1950년 12월을 마지막으로 그의 소식이나 행적은 알 수 없다.

세 아들을 잃은 부모는 돌아가실 때까지 맘 편히 살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다고 한다. 남은 가족들은 남편을 잃고 아버지를 잃어 무척이나 고단하고 곤란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고일규는 통일된 조국을 꿈꿨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워 남과 북으로 나누어지면 다시 합치기 힘들다는 것을 안 선각자였다. 그래서 고일규 같은 많은 사람들이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하나 된 조국을 외치다가 감옥을 가게 되었다.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로 인신을 속박하고 난리가 나자 국가권력으로 그들의 무고한 목숨까지 빼앗아 갔다. 그것도 모자라 그 가족까지도 빨갱이라며 잡아들이고 죽이기까지 하였다.

고차규의 처남 김철현은 말한다. “그 양반들, 빨갱이 아니어. 많이 배우고 똑똑하고 참 바른 양반들이었어. 내 매형은 매형이니까 그러지만, 사돈 두 분 다 교사였고 존경받던 양반들이었어. 내가 그때 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네. 죽은 사람도 사람이지만 아들 셋을 잃고 빨갱이란 손가락질 무서워 속울음 우시던 안사돈 어른이 아직도 눈에 선하네. 내 누님이랑 일규씨 부인은 말도 못 하게 고생하고 살았어. 남편 없이 자식들 키우느라.” 하며 구순이 지난 노인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제공=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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