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보림사의 창건설화와 원표대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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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보림사의 창건설화와 원표대사〈3〉
  • 장강뉴스 기자
  • 승인 2013.11.07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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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가지산, 탐진강 상류 태극 형세로 상서로운 곳

“탐진강의 상류를 따라 장흥 가지산을 찾아와서보니, 지형이 기묘하게도 인도와 중국의 보림사와 같으므르 불궁을 세우고 가지산 보림사라 불렀다고 전한다.”

▲ 장흥 보림사 겨울 전경
장흥의 가지산은 남해안의 강진만으로 흘러들어가는 탐진강의 상류지역인 장흥 유치면 봉덕리에 위치하며, 지세는 산과 골짜기가 깊숙하여 물은 휘감아 돌면서 태극의 형세로 흐르고 언제나 상서로운 기운이 서린 곳으로 땅은 넓고 평탄하여 풍수의 지형 요건을 잘 갖춘 곳이다.
《보림사사적기》에는 원표대덕이 멀리 인도에서 유학하고 《화엄경》을 가져와서 중국에 머물다가 삼한으로부터 비쳐오는 신이한 기운을 따라 바다를 건너와서 남해를 거쳐 탐진강의 상류를 따라 이곳 가지산을 찾아와서 보니, 지형이 기묘하게도 인도와 중국의 보림사와 같으므로 불궁을 세우고 가지산 보림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법보단경에 그 곳 보림사가 인도에서 온 지약삼장이라는 인물을 통해 인도의 보림사와 같은 곳임을 증명하였듯이, 장흥《보림사사적기》는 인도에서 유학하고 중국에 머물다가 돌아온 원표대덕을 이끌어 이 땅이 인도와 중국의 보림사와 같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단경에는 육조 혜능이 보림사에 주석하기 170년 전에 지약 삼장이 사찰을 창건 하였다.
그리고 장흥 보림사는 체징이 가지산으로 오던 헌안왕 3년〈859년〉보다 꼭 100년 전인 경덕왕 18년〈759년〉에 원표대덕의 구거에다 특별히 장생표주를 세워 사찰의 구획을 확정해 주었다는 것이다.
처음 새로운 도량을 일구거나 교화를 펼치면서 기득권을 가진 기존의 세력인 독룡들을 조복시키는 이야기는 항용 있어왔던 것으로, 원표대덕이 가지산에 새로운 도량을 만들 때에 독룡을 물리쳤다는 내용도 단경의 육조스님이 보림사에서 용을 항복받은 내용과 별 차이가 없다.
▲ 장흥보림사 전경
원표가 가지산에서 참선을 하고 있는데 선녀가 나타나 자기가 살고 있는 못에 아홉 마리 용이 판을 치어서 살기 힘들다고 호소해왔다. 원표가 부적을 못에 던지니 다른 용은 다 도망가는데 오직 백룡만이 끈질기게 버텼다. 원표가 더욱 열심히 주문을 외었더니 마침내 백룡도 못에서 나와 남쪽으로 도망 가다가 꼬리를 쳐서 산기슭을 잘라놓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 때 용꼬리에 맞아 파인 자리가 용소(용문소)가 되었으며 원래의 연못을 메워 절을 지었다.
▲ 장흥보림사 석탑
#〈그런 전설이 있는 보림사 주위에는 용과 관련된 지명이 많은데 용문, 용소, 늑룡리, 청룡리, 용문리, 용두산, 용이 피를 흘리며 넘어간 피재 등이다.〉
《육조단경》의 〈약서〉에 다음 이야기가 나온다.
보림사 대웅전 앞에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에 용이 늘 출몰하여 숲의 나무를 뒤흔들어댔다. 하루는 그 몸을 나타내었는데 거대하기도 하거니와 물결이 용솟음치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앞을 가려서 대중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대사가 그 용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는 몸을 크게 할 수만 있을 뿐 작게 할 줄은 모르는 구나. 만약 신룡이라면 자유롭게 변화할 수 있어서, 작았다가 커질 수도 있고 컸다가 작아질 수도 있어야 한다.” 하니, 그 용이 홀연히 사라졌다가 잠시 후에 다시 작은 몸으로 나타나서 연못 위로 뛰어올랐다. 대사가 발우를 꺼내어 들고 시험하여 말하기를 “너는 또 나의 발우 속으로는 감히 들어오지 못하겠지.”하니, 용이 이에 헤엄쳐 앞으로 다가오자 대사는 발우 속에다 담았는데 용은 옴직이지 못했다. 대사가 발우를 들고 불당으로 올라가 용에게 법을 설해주니, 용이 드디어 뼈를 벗고 사라졌다. 그 뼈의 길이가 7촌으로서 머리와 꼬리와 뿔과 발 등을 모두 갖추었는데 절에 남겨 전해온다. 대사는 그 후 흙과 돌을 가지고 그 연못을 메웠는데, 지금 대웅전의 앞 좌측 철탑이 자리 잡은 곳이다.
용을 항복 받는 이야기의 연원은 부처님께서 배화교를 이끌던 가섭 형제들을 제도하셨다는 본행경에서 나온다.
불을 숭상하는 가섭의 세 형제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큰형인 가섭은 5백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이미 존자라고 일컬렀다.
어느 날 석가세존께서 그들을 교화하기 위해서 먼저 큰 형인 가섭을 찾아가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룻밤 목어가려 하니 허락해 주시오.” 하니, “그렇게 하세요. 그런데 이 석실에는 독룡이 있어서 당신을 해칠까 걱정됩니다.” 하였다.
세존께서 “걱정 마시오. 용은 나를 해치지 못할 것이오. 그저 하룻밤 묵는 것을 허락해주면 되오.” 하시니, 가섭은 “그럼 그렇게 하세요.” 하고 허락하였다.
세존께서는 석실로 들어가 결가부좌를 하고서 뜻을 바르게 하시었다.
이 때 독룡이 세존이 앉아 계시는 것을 보고 곧 불을 토하였다. 그러자 세존께서 자삼매에 들어가셨다가 다시 깨어나시어 화염광삼매에 들어가셨다.
용이 독한 연기를 피워대니 부처님도 연기를 피우시고, 용이 다시 불을 뿜자 부처님 역시 불을 뿜으셨다. 그리하여 그 때 석실 안은 용이 토해내는 모든 불과 부처님의 광명이 한데 어우러졌다.
가섭은 멀리서 그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그 사문이 애석하게도 독룡에게 해를 입고 죽는구나” 하였다.
그러나 세존의 자비삼매의 위신력을 이기지 못한 독룡은 결국 항복하여 세존의 발우속으로 들어가 머물고 있었다.
▲ 장흥 보림사
구전에는 원표가 아니라 체징이 독룡을 조복했다고 전해오기도 하는데 창건 설화에 용을 조복 했다는 이야기는 창성탑비에 체징을 기리는 송사의 끝부분에 있는 내용 때문이 것이다.
       "총림에 주인이 없어졌으니
        산문은 휑하니 텅 빈 듯하네.
        석장으로 뭇 호랑이 내쫓았으며
        발우 속에 모든 용을 조복 받았네.
        타오르는 향불만 남은 가운데
        스님의 말씀과 모습 그리워
        견고하고 아름다운 이 돌에 새겨
        불법이 웅장하기 기원합니다."

수나라 때 담순이라는 승려가 산길을 가다가 호랑이 두 마리가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여러 날이 지나도 그치지 않았다. 스님은 보다 못해 석장으로 싸우는 두 호랑이를 떼어 놓고는 말하기를 “같은 숲 속에 함께 살면서 어찌 서로 다툴 생각을 하는가? 이제 그만 제각기 딴 길을 가거라.” 하니, 가르침을 받은 호랑이 두 마리는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서 제각기 길을 떠났다노 한다. 이를 석장해호라 하는데, 법력으로 갈등을 해소시킨다는 뜻이다.
‘석장으로 호랑이들을 내쫓고, 발우 속에 용을 조복 받았다’는 말은 서로 간의 시비와 갈등을 화해시켜 없애고 저항하던 상대를 법력으로 승복시키면서 많은 감화를 준다는 뜻이다. 〈다음호에 계속〉
                                             /원표 대사 국제학술세미나 논문집에서 발췌-현봉(송광사 스님)
                                             /정리=임순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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