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남도 동학농민혁명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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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남도 동학농민혁명 포럼
  • 임순종 기자
  • 승인 2015.12.20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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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농민혁명기념회’ 남도 동학혁명 ‘재조명’

지역별 동학농민혁명의역사 및 인물 자료 중심 발표 가져

장흥 강진지역 동학농민군 1만여명 이상 활동 추정

▲ 남도지역 포럼 발표자
장흥군(군수 김성)은 지난 7일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서 남도 동학농민혁명 재조명을 위한 ‘2015 남도 동학농민혁명 포럼’을 열었다.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주관한 이날 포럼에는 전남도 각 지역의 향토사학자와 동학기념사업회 회원 15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포럼은 장흥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김창남이사장과 문충선사무국장의 제안으로 성사됐다.
지역별 발표자로는 장흥 위의환(향토사학자), 강진 홍동현(다산실학연구원), 해남 김형진(언론인), 영암 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 완도 배철지(향토사학자), 진도 박주언(진도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공동대표), 장성 김형열(장성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 무안 최효섭(무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소설가 명금혜정, 정이춘자 씨가 나섰다.
김창남 장흥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 이사장은 “남도동학농민 혁명 포럼을 조직해 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역사가 튼실하게 기록되고 그 정신이 계승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장흥전투를 통해 본 남도 동학농민혁명과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의 사업방향과 역할

■위의환(장흥향토사학자)

▲ 위의환
남도의 농민군이 나주성 함락을 위해 벌인 전투부터 장흥의 최후전투까지를 공주전전투에 대칭되는 큰 틀의 남도전투로 명명하고 싶다. 남도전투를 연구하면 이순신 장군이 말씀한 “약무호남 시무국가”의 정신이 올곧이 살아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기 위해서는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남도의 산 역사 교육장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장흥기념관은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으로써의 기능을 상실했다. 또한 잘못된 설명문으로 부끄러운 전시물로 전락한 상태다. 기념관을 혁명의 상황과 기포의 정신을 한눈에 알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또한 장흥 공설운동장, 실내체육관은 동학농민혁명 최후전투 과정에서 이름 없이 산화한 무연고 동학농민혁명군 매장지로 원형 유적지로 복원은 할 수 없지만 그 정신을 살려내야 한다. 공설운동장과 실내체육관의 이름을 동학농민혁명 희생자 무연고 묘지와 걸맞게 바꾸어 동학기념탑에서 기념관까지 스토리텔링으로 다시 살아 날 수 있을 것이다.
기념관은 살아 있는 역사 체험 학습장으로 자리매김하여 숭고한 혁명 정신을 박제화 시키지 말고, 후세에도 길이 빛나는 역사발전의 계승을 구현하는 장소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깊은 강은 소리없이 흐르고(장흥편 다큐소설)

■명금혜정(작가)

▲ 명금혜정
전라도 서남해안에 위치한 장흥은 쫓기고 몰린 동학군들이 일본군과 최후의 대회전을 전개하여 수천 명이 목숨을 잃은 곳이다. 한편으로 ‘이소사’로 알려진 여성이 동학군들을 독려하여 전투에 앞장선 기록이 남아 있다. 여성이 전면에 나선 유일한 사례이다. 이 소설은 이소사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이방언, 이인한 대접주 등 몇 줄의 기록으로 전하는 실존 인물들의 생생한 모습을 상상력을 통해 재구하고 복원시켜 나가는 재미와, 무겁게 짓누르는 역사의 비극 속에서 동학의 의미를 짚어 낸 「깊은 강은 소리 없이 흐르고」명금혜정 작가의 소설이다.
명금혜정 작가는 동학농민혁명이 3?1운동, 암태도농민항쟁, 제주 4?3사건, 4?19혁명, 5?18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민주화운동의 초석이다. 미모의 여동학 ‘이소사’처럼 여성들이 옳지 않는 것에 타협하지 않는 것이 민의 정신이요, 민의 승리로 가는 길이다고 생각한다.

▣진도동학농민혁명의 재발견

■박주언(진도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공동대표)

▲ 박주언
진도의 동학관련기록은 1995년 7월 25일 진도동학지도자 유골이 일본에서 발견 되면서부터 획기적으로 보완, 정리되었다.
동학이 진도에 들어온 것은 1892년 1월 나주접사 나치현에 의해서였다.
진도동학은 1904년 12월 11일 진도군수로 부임한 권중면 군수의 40여만 동학도사면 이야기와 아들 권태훈 옹을 통하여 알게 되는 서문 밖 동학군 800명 총살현장이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거론되고 있다.
진도는 탐관오리의 횡포와 일본의 억압에 맞서 싸워낸 동학농민운동이 격심했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진도군 진도읍에 위치한 솔갯재 주변 입니다.
이 곳은 지난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탐관오리의 횡포에 맞서 싸우던 여러 농민군이 희생된 장소로 알려졌다.
그리고 12년 뒤인 1906년. 일본인 공무원 사토 마사지로는 농민군지도자 박중진씨로 추정되는 유골을 솔갯재에서 발굴해 일본으로 옮겨갔다.
유골은 이후 1995년에 이르러서야 전북 전주시로 봉환됐지만 또 20년 가까이 방치됐다.
전주기념사업회가 이 유골을 2015년 2월 16일 화장하려고 공개적으로 추진했다.
진도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진도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의 유골을 진도로 봉환하고, 화장계획은 전면 폐지, 유골의 유전자 자료 확보가 최우선시 돼야 한다고 밝혔다.

▣해남동학농민군의 활동과 의의

■김형진(해남.완도.진도 광역신문 편집국장)

▲ 김형진
동학농민혁명 당시, 해남 지역에서는 약 5천명의 동학농민군이 활동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남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3월 중순 동학의 깃발이 올라가자, 3월 하순 해남과 진도 지역에도 소식이 알려지면서 4월 초순 무렵에는 드디어 해남, 지도 동학군들이 기포하기 시작했다. 그 후 전봉준 장군이 4월, 전남 함평을 점령하고 잠시 체류했을 때 해남 동학군들 1~2천명도 대대적으로 일어나 그들과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전주화약이 끝나고 동학 농민군들이 전라도 지역에 집강소를 설치할 무렵, 해남 지역에서 두드러지게 활동을 펼쳤던 이는 동쪽에선 황산면 남리 출신의 대접주 김신영, 서쪽에선 1894년 3월 농민들의 1차 봉기 때 해남농민군들을 이끌었던 김춘두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김지하 시인은 동학농민군의 마지막 전투는 동학농민군 5천명이 전멸한 최후의 결전 장소는 대흥사 입구 구림이라고 말했다.
해남농민군 해남 삼산면 접주 백장안이 완도 군내면 불목리에서 체포되 사실상 해남에서 동학농민혁명의 마지막 불꽃은 사그라졌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해남에서만 공식적인 죽음에 이른 농민군의 피해만도 약 250여 명이다. 인근 지역보다 해남의 피해가 많았던 이유는 혁명의 그 마지막 전개가 해남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해남동학농민군의 그 숭고한 이야기를 철저하게 규명하고 복원하는 것이 우리들의 몫이다.

▣피어라 꽃(해남.진도.제주편 다규소설)

■정이춘자(작가)

▲ 정이춘자
이 소설은 동학군이 일본군의 3로 포위작전에 밀려 한반도 서남해안으로 밀려 최후를 맞이하는 지역을 배경으로, 남도 특유의 감칠맛 나는 토속어 속에 녹아든 동학적 인간상의 해학과 그만큼의 비극성을 처절하게, 그러면서도 아름답게 그려낸다. 소설의 중심인물인 말목장이 ‘말총이’가 일본군의 살육 사냥전을 뚫고 제주도까지 건너가 새로운 삶의 터전을 꾸리고, 바다 넘어 구름 건너 육지를 바라보는 장면으로, 동학의 꿈이 결코 죽지 않고 있음을 웅변한다. 또한 한때 진도 동학군 유골의 주인공으로 알려졌던 박중진 접주의 이야기를 상상력을 통해 재현해 낸 「피어라 꽃」정이춘자 작가의 소설이다.
정 작가는 해남, 진도, 제주 지역 동학소설을 쓴 것은 한 유골 때문이다며, 1995년 훗카이도 대학 강당 보관소에서 발견된 진도 동학군 박중진 지도자의 유골이 왜 일본으로 가게됐는지, 채집한 간 사토 마시지로는 누구이고, 왜 유골을 채집했는지, 누구에게 전달했으며, 유골을 연구한 자는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낱낱이 파헤치고 싶었다고 밝혔다.
정 작가는 「피어라 꽃」소설을 쓰면서 해남.진도에도 동학의 역사가 있었음을 알고 해남?진도의 동학을 밝히는 데 조그마한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완도와 동학농민혁명

■배철지(완도향토사학자)

▲ 배철지
전국 각지에 동학이 들불처럼 번지고 농민들의 여망을 담아 타올랐어도 완도에서는 그 불길이 쉬이 타오르지 않았다. 그 이유는 통일신라 청해진 시대를 끝으로 독립적인 군으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1896년 완도군으로 설군이 될 때까지 인근 군에 쪼개져 편입되었다. 독립군으로 되기 전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한 무정부상태로 다른 지역과의 교류가 활발하지 못한 지리적인 이유와 1883년 계미민란으로 완도 체도 사람들은 많은 감시와 긴장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다.
동학이 완도로 전파된 것은 1894년 6월 동학농민군 몇몇이 해남 이진을 거쳐서 노화도와 소안도에 잠입해 농민군에 동참하기를 권했다.
1894년 소안도와 조약도 그리고 완도읍에 집강소를 설치했다.
동학이 완도에 미친 영향은 당사도 등대 습격 사건이후로 여러 의병들의 활동이 이뤄졌다.
의병들이 일으킨 사건들은 양처습격, 일인피살, 토벌장행 등 이후 소안도 토지 게쟁사건을 13년 동안이나 이끌고 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완도 동학농민혁명은 이후 완도 항일운동의 뿌리를 밝혀 역사의 흐름은 단절됨이 없다는 것을 알렸다.

▣황룡전투와 이춘영 장군

■김형열(장성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

▲ 김형열
장성지방의 정서는 의향골, 문향골, 예향골로 정의감이 강했으며, 대의명분을 중히 여기는 주인의식이 어느 고장보다 강했기 때문에 동학농민혁명도 어느 고장보다도 활발한 활동을 했다.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황룡전투의 대승이 없었다면 전주화약이 과연 성립할 수 있었겠으며, 집강소가 설치되어 노비문서를 불 지르는 등 12개 폐정개혁의 실천으로 최초의 민정이 실시될 수 있었던 값진 승리였다. 장성동학의 대접주요 총사령이었던 화암 이춘영 장군이 야포와 기간총 등으로 무장한 경군을 이긴 황룡전투 승리의 원인은 이춘영 장군이 직접 고안하고 제작한 청죽으로 엮은 장태다. 장태는 높이가 5척(尺, 약165㎝)이며 길이는 15척(약15m)의 타원형으로 만들어 손으로 구를 수 있게 되었으며 대나무 장태 속에 볏짚을 넣어 일본군과 관군의 총탄을 막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황룡전투는 1894년 4월 반봉건·반외세를 내건 동학농민군이 관군을 격파하고 전주에 무혈 입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화암(華菴) 이춘영(1864-1923) 장군은 본관이 경주(慶州)로 장성군 삼계면 백산리에서 태어났다. 7세 때부터 한학(漢學)을 배웠고, 22세 때인 1886년에 전북 남원군 이집록(李集錄)의 집에서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1898. 동학의 제2대 교주)을 만나 천도교에 입교(入敎)했다. 그는 수도(修道)와 실천을 통해 모범적인 도인(道人)으로 전남 지역에서 명성이 높았으며 그를 통해 천도교에 입교한 사람이 1천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화암 이춘영 장군의 황룡전투 내용이 담긴 전시관이나 그 내용을 세긴 비석이라도 세우기를 바란다.

▣무안지역 동학농민혁명군의 활동과 장흥지역 전투참여

■최효섭(무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국장)

▲ 최효섭
무안의 농민운동은 조선 말기에 삼정의 문란으로부터 시작된다.
무안의 동학운동은 임술 봉기인 1862년부터 비롯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무안 농민들의 부정에 대한 항의와 올곧은 정신은 1892년 11월의 삼례집회나 1893년 2월의 서울 집회 등에서 뚜렸이 나타났다. 이후 각종 농님 집회에서 무안은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전봉준과 김개남에 버금가는 대접주 배상옥을 키워냈다.
원전에 나타난 무안동학농민혁명은 교조신원 운동 시기(1892~1893), 반봉건 동학혁명 1차 봉기 시기(1894.1~1894.8), 반왜양 동학혁명 2차 봉기 시기(1894.9~1894.11), 동학혁명군의 수난 시기(1894.12~1895.1)로 농민운동에 앞장섰다.
무안동학농민혁명군은 전투의 선봉에 서기보다는 후방을 지키는 교두보 역할을 주로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이 해상으로 상륙하여 전남의 배후를 공격할 것을 염려하여 서남부의 지역 방어가 주 임무였다. 이 때문에 공격진보다 수비진에 있어 덜 주목 받았고 그것이 평가에서도 홀대 받았던 이유가 되었다. 한편 동학농민혁명군이 주로 무안에 머물고 있어 진압과정에서 다른 지역보다 많은 피해을 보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무안동학농민혁명군은 장흥석대전투에 참전했으며, 배상옥 장군은 일본군 2중대에 쫓겨 해남읍으로 가지 못하고 완도군으로 들어갔다가 12월 24일 체포됐다.
전남의 동학이 없었다면 전남=희향도 없다. 전남의 동학을 이끌어 낸 무안동학농민혁명을 재조명해야 한다.

▣영암인의 동학농민혁명 참여와 관한 재조명

■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장)

▲ 조복전
영암동학농민혁명은 동학은 물론 의병 관련 자료들의 유실 내지는 소실되었지만 고,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극히 일부 후손들의 전언, 영암 접과 관련한 일부 성씨 족보와 문헌에서 자료들이 발굴되고 있어 영암인들의 동학농민혁명 관련 실상이 부분적으로 나마 밝혀지고 있다.
1893년 3월 충청북도 보은군 장내리에서 집회간 열린 ‘보은집회’에 김의태 지도자의 진두지휘로 40여명이 참여했다. 김의태 지도자는 1867년 11월 5일 영암군 곤일종면(현 삼호면) 봉고리에서 태어나 26세인 1893년 1월 7일 동학에 입교했다.
전라북도 부안소재 백산봉기에 신난, 신정형제와 최영기 등이 영암동학농민군을 진두지휘하는 지도자로 참여했다. 1894년 10월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에 양빈, 신정, 신란 등이 간부로 참여해 영암농민군을 지휘했다. 강진 장흥 전투에 참여한 인물들을 보면 김의태와 최영기, 양씨아씨들로 영암의 동학농민군 지도자로 참여해 영암농민군을 지휘했다.
장흥석대들 전투가 끝난 이후 영암군수 남기원은 영암동학농민군에 대한 소탕전이 진행됐다.
영암에서 처형된 동학농민군의 처형 장소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김재득의 후손 김찬영씨의 전언에 의하면 현 위치로는 영암읍 영암초등학교 인근 회문리에 있는 다리 밑 개천에서 공개적으로 처형했다고 한다.
영암지역 동학 관련 연구체제가 수립되어 당시 희생된 모든분들과 유족들을 발굴하여 이분들의 명예가 회복될 수 있었으면 한다.

▣1894년 강진지역 동학농민전쟁과 다산 정약용의 「경세유포」

■홍동현(강진다산실학연구원 연구원)

▲ 홍동현
개혁적인 활동이 전개되던 장흥과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으로 강진지역은 보수적인 유생들의 영향력이 강했으며, 보수유생들은 향교를 중심으로 향약을 실시해 동학 확산에 적극적인 대응이 있었기 때문에 유생들은 동학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어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강진지역 동학농민군 조직이 장흥처럼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지만 강진에는 대접주 김병태, 접주 남도균 대구의 윤세환 등 칠량, 대구, 도암, 군동, 작천, 병영 등에서 활동한 농민군이 3천여명이 넘었다는 학설도 있다.
강진에 동학이 들어 온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891년 김광태 입도, 1892년 대구면 윤세현 입도해 장흥 지역을 거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물론 1890년 전에 입도자가 있었을 것이나 마량, 칠량, 군동, 작천, 병영 등지에 동학이 떨친 것은 역시 1892년 이후라고 여겨진다.
이 시기에 강진 지역에는 대접주 김병태, 접주 남도균, 안병수, 윤세환, 윤시환, 장의운, 조병길, 강운백, 김옥일, 신오삼, 이세화, 김종태, 김관태 등을 곱을 수 있다. 강진동학농민군도 칠량, 대구, 도암, 군동, 작천, 병영을 합하면 3천명은 넘었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동학농민군은 병영성 점령이후 장흥 석대들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무기의 열세로 패배했다. 석대들 패배이후 동학농민군은 해남과 진도로 피신, 대구와 칠량 출신 동학농민군은 천관산으로 몸을 피했다. 이후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목숨을 잃었다. 강진에서는 320명이며 이후 처형이 지속되어 목숨을 잃은 사람이 1천여명 이상이라고 한다.
강진지역 동학농민전쟁에 ‘해남 윤씨’ 집안사람들의 참여가 많았다. 또한 지역으로는 대구, 칠량출신들이 많은데 이는 대구 출신인 윤세현 접주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해남 윤씨 집안의 참여가 두드러진 이유로 다산 정약용과의 관계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강진지역 해남 윤씨의 동학농민전쟁 참여 뿐 아니라 동학농민전쟁과 다산 정약용의 학문적 영향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동안 동학농민전쟁의 사상적 배경을 실학사상에서 찾고자 했던 맥락에서 좀 더 실증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이다.

▣이모저모

▲ 김창남(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 이종찬(장흥동학농민혁명유족회 고문)

 

 

 

 

 

 

 

 

 

▲ 포럼참여자 종합토론
 
 

정리=임순종 기자
사진=마동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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