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보림사의 창건설화와 원표대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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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보림사의 창건설화와 원표대사<2>
  • 장강뉴스 기자
  • 승인 2013.10.24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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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사의 창건설화 속에서 본 원표대사의 발자취

▲ 장흥 보림사
“원표 대덕은 천관보살의 상주처인 중국의 지제산에 머물다가 몇 년 뒤에 삼한으로 돌아와서 인도와 중국에 있는 보림사의 지세와 닮은 곳을 찾아 절을 창건”

원표(元表)에 대한 기록이 전해오는 《송고승전(宋高僧傳)》이나 《지제산기(支提山記)》에 의하면 ‘원표는 원래 삼한인(三韓人)으로 천보(天寶) 연간(742~755)에 인도로 가서 성적(聖蹟)을 순례하고 종려나무 함(函) 2개에 80권 《화엄경》을 가지고 와서 중국의 푸젠성 지제산 석실안에 머물면서 개울물 마시고 나무열매를 먹으며 고행을 하였는데, 이후에는 그의 자취를 아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지제산은 《화엄경》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에 심왕(心王)보살이 ‘동남방에 지제산이 있으니 옛적부터 보살들이 거기 있었으며, 지금은 천관(天冠)보살이 그의 권속 일천(一千)보살과 함께 그 가운데 있으면서 법을 연설하고 있다.’고 말한 성스러운 산으로 알려졌다.
원표 대덕은 천관보살의 상주처인 중국의 지제산에 머물다가 몇 년 뒤에 삼한으로 돌아와서 인도와 중국에 있는 보림사의 지세와 닮은 곳을 찾아 절을 창건하였으며, 뒤에 천하의 삼보림(三寶林)으로 명성을 드날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창건 설화에 원표가 인도에서 유학할 때 월지국에 보림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오지만 그 무렵 월지국은 이미 멸망했으니 월지국 옛 지경의 보림사에 잠시 머물렀다는 뜻일 것이다.
또 인도에서 중국으로 돌아와서 머물렀다는 중국 지제산에는 보림사가 없다.
원표가 인도와 중국에 보림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오는 이런 내용은 역사적으로 정확한 사실이라기보다는 그냥 보림사라는 정체성을 잇기 위한 창건설화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찰의 사적기에는 언제 누가 어디에다 창건했다는 역사적인 기록이 전해온다. 그런데 그런 기록이 유실되어 후대에 다시 창건기록을 정리할 때는 그 사찰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한 창건에 관한 각종 연기 설화들이 얽히어 들게 마련이다.
조선시대에 간행된 《보림사적기》와 《보림사중창기》 등에 전해오는 보림사의 창건에 얽힌 연기 설화에 대한 진위 여부를 떠나서, 원표 스님을 한국의 장흥에 있는 가지산 보림사를 창건한 인물로 전해오는 연유를 추정해보고자 한다.
장흥 가지산에는 선종의 가지산문을 개설하기 이전에 가지산사라는 사찰이 있었다.
한국선종의 종조이면서 가지산문의 개산조인 도의국사는 중국 남종선의 비조(鼻祖)인 육조 혜능(慧能)의 적통을 이어온 분이며, 도의의 법을 이은 염거의 제자인 체징이 가지산사에서 처음 가지산문을 열게 되었고, 체징이 교화를 하다가 입적한 후 3년이 지난 883년에 국왕은 그 도량의 사액(寺額)을 보림(寶林)이라고 하였으니, 그것은 선종의 예(禮)를 칭찬하여 기리는 것이라 했다.
보림사는 남종선의 비조인 육조혜능이 머물렀던 쑤저우(韶州)의 조계산 보림사에서 연유한 것으로 명실 공히 해동의 선문종찰로 매김하는 예우인 것이니, 그 위상과 정체성에 걸맞는 창건 설화가 있어야 하기 마련이다.
먼저 중국 쑤저우의 보림사가 성립된 배경을 육조혜능의 《법보단경》〈약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좀 길지는 하지만 그 일부를 세 번으로 나누어 인용해 본다.
광주 법성사의 구족계 계단은 송나라 구나발다라 삼장이 처음 세울 때 비를 세우며 이르시길 ‘후일에 육신보살이 여기에서 계를 받을 것이다.’ 하였다.
또 양나라 천감 원년(서기502년)에 지약 삼장이 서축국(서인도)으로부터 바다를 건너왔는데, 그 땅에서 가져온 보리수 한 그루를 이 계단의 가에다 심으면서 미리 예언하기를 ‘170년 뒤에 육신보살이 이 나무 아래에서 상승 법을 열어 펴면서 한량없는 대중을 재도할 것인데, 그는 참으로 부처님의 심인을 전하는 법의 주인이다’ 하였다.

▲ 장흥 가지산
대사가 이곳에 이르러서 비로소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았으며 또 사부대중과 더불어 홑으로 전하는 법지를 열어 보이시니 예전에 예언하신 바와 한 결 같았다.
다음해 봄에 대사는 대중들과 작별하고 보림으로 돌아갔는데, 인종을 비롯하여 전송하는 사람들이 1000여 명이나 되었다. 곧바로 조계에 당도하니 형주의 통응 율사가 학인 몇 백 명과 더불어 대사를 의지하면서 머물게 되었다. 대사가 조계산의 보림사에 당도하여 살펴보니 당우가 협소하여 대중을 수용하기에 부족하므로 그것을 넓히고자 하였다.
드디어 마을 사람인 진아선을 찾아가, ‘노승이 단월에게 좌구를 펼칠 땅을 얻으려 하는데 되겠습니까?’라고 말하니, 진아선이 ‘스님의 좌구가 얼마나 넓습니까?’하고 물었다. 대사가 좌구를 꺼내어 보여주니 진아선이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였다. 그 때 대사는 좌구를 한 번 펼쳐서 조계의 사방을 모두 덮었는데, 사천왕이 몸을 나타내어 사방을 진압하고 앉았다.
지금 절의 경내에 있는 천왕령은 이로 인하여 이름 붙여진 것이다. 진아선이 말하기를 ‘스님의 법력이 광대함을 알았습니다. 다만 저의 고조의 분묘가 이 땅에 있으니, 뒷날 탑을 세울 때 없애지 말고 다행히 그대로 남겨주시기를 바랍니다.
나머지는 원하시는 대로 모두 드리겠으니 영원히 보배로운 도량을 만드십시오. 그런데 이 땅은 살아있는 용과 흰 코끼리가 달려오고 있는 형상의 지맥이서서 하늘을 평정할 수는 있어도 땅을 평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하였다.
대가께서 뒤에 절을 건축할 때 항상 이 말에 의지하였다. 대사는 경내를 다니시면 산수가 빼어난 곳에는 문득 멈추어 쉬곤 했는데, 그래서 마침내 열 세 곳의 난야가 이루어졌다. 오늘날 화과원이라는 이름이 절문에 적혀있다.
이 보림도량 또한 예전에 인도의 지약 삼장이 남해로부터 와서 조계의 입구를 지날 때 물을 떠 마셔보고는 그 향기롭고 아름다운 맛이 보통과 다름을 알고 따르는 무리에게 말하기를 ‘이 물은 인도의 물과 다르지 않다. 이 냇물의 상류에는 필시 수승한 땅이 있어 난야로 삼을 만할 것이다.’ 하고는, 흐름을 따라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니 산과 물이 서로 감아 돌고 산봉우리가 빼어났으므로 감탄하여 ‘완연히 인도의 보림산과 같구나!’ 하였다.
그리고는 조후촌에 사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산에 절을 지으면 170년 뒤에 무상의 법보가 여기에서 교화를 펼칠것이며 도를 얻은 자가 숲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이름은 보림이라 해야 합니다.’라 하였다. 그 때 쑤저우 목사인 후경중은 그 말을 가지고 임금님께 표를 올리니, 임금님은 그 청을 받아드여 보림이라는 사액을 내리게 되었으며, 드디어 정을 지어서 양 천감 3년(504)에 낙성하였다.
이 내용에서 살펴본 것처럼 중국 쑤저우의 보림사 도량은 혜능이 머물기 이전에 이미 창건 되었던 것이다.
서국(인도)의 지약이라는 삼장법사가 남해로부터 와서 조계의 어귀를 지나다가 물을 한 모금 움겨 마시며 향기로운 맛을 보고, 이 물이 서천의 물과 다르지 않으니 시냇물 저 위에는 반드시 뛰어난 땅이 있을 것이고 도량을 세울만할 것이다.
‘하며 흐르는 물을 따라 올라가 그 땅이 매우 빼어남을 보고 감탄하면서 말하시길’이 곳이 완연히 서천의 보림산과 같아서 여기에다 절을 지으면 좋겠다.‘고 하니, 그 말에 후경중이 표를 올려 임금이 보림이라는 절 이름을 내리고 절을 지었다는 것이다.

▲ 장흥 보림사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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