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보림사의 창건설화와 원표대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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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보림사의 창건설화와 원표대사 1
  • 장강뉴스 기자
  • 승인 2013.10.24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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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보림사, 원표대사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다

중국 지제산·장흥 가지산, 산세가 닮아 절 창건
보림사 창건한 원표대사와 창건설화 등 재조명

장흥군 가지산 자락에 위치한 보림사는 가지산문의 근본도량으로 한국불교의 선문종찰(禪門宗刹)로 알려져 있다.
보림사의 창건설화에는 원표대사가 중국의 지제산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 홀연히 서기가 뻗쳤다고 한다. 그래서 빛을 따라가 보니 장흥의 가지산이 지제산과 산세가 닮아서 절을 창건하려고 했지만 용들이 사는 소가 있었다. 때마침 선녀인 매화보살이 이 소를 좋아해서 머무르고 있었는데 용들이 들어와 장난을 치니 쫓아내 달라고 하소연했다.
그래서 원표대사가 소에 부적을 던져 용들을 쫓아내고 가지사를 세웠고, 이 절이 나중에 보림사로 바뀌었다. 따라서 본지는 보림사의 창건설화와 원표대사의 사상 등에 대해 몇 차례에 걸쳐 재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 장흥 보림사 경내

8세기 무렵 중국에는 불립문자(不立文字)와 직지인심(直指人心)의 종지를 표방(標榜)하는 선종(禪宗)이 새로 흥성(興盛)하였으며, 그 때 해동에서 중국으로 가서 제일 먼저 남종선(南宗禪)의 심인(心印)을 얻고 돌아와 가지산문(迦智山門)의 개산조(開山祖)가 된 분이 도의(道義)선사(禪師)이다.
도의는 어려서 출가하여 신라 선덕왕 5년인 784년에 사신(史臣)을 따라 입당(入唐)하여 오대산(五臺山)에 참배하고 보단사(寶壇寺)에서 구조계(具足戒)를 받은 뒤 쑤저우(韶州)의 조계산(曹溪山) 보림사(寶林寺)로 가서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영당(影堂)에 배례(拜禮)하고 강서(江西)의 홍주(洪州) 개원사(開元寺)에서 마조(馬祖)대사의 제자인 서당지장(西堂智藏) 선사에게서 인가(認可)를 받았다.
다시 사숙(私淑)인 백장회해(百丈懷海) 선사에게 나아가니 백장(百丈)은 “장시(江西)의 선맥(禪脈)이 몽땅 동국(東國)의 승려(僧侶)에게 속(屬)하게 되었다”고 탄식하였다 한다.
마조는 쓰촨(四川)에서 신라 출신인 김화상(金和尙) 무상(無相) 선사(禪師)을 사사(師事)했고 뒤에 육조혜능의 제자인 남악회양(南岳懷讓)의 법을 이었던 분이다.
도의는 37년을 중국에 머물다가 821년에 신라로 귀국하여 시절인연(時節因緣)이 익지 않았음을 알고 양양(襄陽)의 설악산(雪嶽山) 진전사(陳田寺)에 들어가 선정(禪定)을 닦으며 지내다가 염거(廉居)에게 법을 전(傳)하였다.
염거는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주석(駐錫)하며 선지(禪旨)를 펴다가 그 문하(門下)에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에게 법맥(法脈)을 전하였다.
체징은 속성(俗性)이 명문(名門) 왕족(王族)인 김씨(金氏)로 804년에 웅진(熊津)에서 태어나 유년(幼年)에 화산(花山)의 권법사(勸法師)에게 출가(出家)하여 827년 서산(瑞山) 보원사(普願寺)에서 구조계를 받고 염거화상(廉居和尙)을 찾아가 선지를 전해 받았다.
체징은 34세에 도당(渡唐)하여 제방(諸方)의 선지식(善知識)을 참방해보니 도의조사로부터 전해온 자가(自家)의 종지(宗旨)와 하등(何等) 다름이 없음을 알고 3년 만에 귀국하였다.
그 후 20년을 전전하며 선지를 현양(顯揚)하다가 헌안왕 3년인 859년에 무주(武州)의 황학난야(黃壑蘭若)로 이주(移住)하였는데, 국왕이 김언경(金彦卿)을 통해 차(茶)와 약(藥)을 보내면서 왕경(王京)으로 초청했으나 병을 핑계삼아 이를 사절하므로 다시 윤지를 내려 가지산사(迦智山寺)로 이석(移席)할 것을 요청하여 이곳에 오게 되었다.

▲ 장흥 가지산
이 산은 옛날에 원표 대덕이 거처하던 곳으로 원표는 법력으로 나라의 정치에 도움을 주었으므로 경덕왕 18년(759년)에 왕은 특별히 장생표주를 세워 주었다고 한다.
그 다음해 봄 김언경이 노사나불상(盧舍那佛像: 현 국보 제 117호)을 주성(鑄成)하고자하니 국왕은 이를 돕게 하고 시방의 시주로 선우(禪宇)를 넓히는 불사(佛事)를 일으켰다.
그리고 경문왕 때인 870년 5월에 헌안왕의 왕생극락(往生極樂)을 위해 쌍삼층석탑(雙三層石塔: 현 국보 제 44호)을 세우고, 진성여왕(眞聖女王)은 내궁(內宮)에서 소장하고 있던 부처님의 사리(舍利) 일곱 과(顆)를 봉안케 하였다.
체징은 보림사에서 20년을 주석(駐錫)하다가 헌강왕 6년(880) 4월〔孟夏〕13일에 세수(歲壽) 77세로 입적(入寂)하였다.
3년 뒤(883년) 헌강왕(憲康王)은 시호(諡號)를 보조선사(普照禪師)라 하고, 탑호(塔號)를 창성탑(彰聖塔)이라 하였으며, 사호(寺號)를 보림사(寶林寺)라고 하였으니, 이는 선종의 예(禮)를 칭찬하고 기리는 것이었다.
그 나라에 제일 처음 시작하는 이를 조(祖)라고 하는 것이니, 그래서 달마 대사는 중국의 제1조가 되고 우리나라에는 도의대사가 제1조가 되는 것이며, 염거 선사는 제2조가 되고 보조체징 선사는 제3조가 되는 것이다.
체징의 당시 문하에는 800여 명의 제자들이 운집하여 수행하면서 가지산문의 본산으로 해동선문(海東禪門)의 종찰(宗刹)로서의 면모(面貌)를 온전히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보림사는 체징의 이후에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다.
체징의 문하에 출가하여 중국에서 운거도응(雲居道膺)의 법을 받아온 선각형미(先覺逈微)와 고려 인종(仁宗)때의 국사(國師)인 원응학일(圓應學一)과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편술한 보각일연(普覺一然) 등이 여기에 주석하였다.
고려 말 가지산파(迦智山派) 출신으로 중국 저장성(浙江省)에서 석옥청공(石屋淸拱)을 만나 임제종(臨濟宗)의 법을 이어온 태고보우(太古普愚)는 희양산문 봉암사와 이곳 보림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국사로 추앙받던 분으로 가지산문이 배출한 준걸이다.
보림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창성탑비 884년에는 가지산문이 개산되기 이전에 이미 가지산사라는 도량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미국 하버드대학교 연경도서관(燕京圖書館)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 세조(世祖) 3~10년(1457~1464)에 간행된 《신라국무주가지산보림사사적기》와 그보다 더 후대에 이루어진 《보림사중창기》등에는 창건의 연기설화(緣起說話)가 기록 되어 있다.
거기에는 ‘인도에 유학하던 원표(元表) 대덕(大德)이 월지국(月支局)에 보림사를 창건하였으며 중국에서도 비슷한 산세를 보고 절을 세워 보림사라 하였는데, 신이(神異)한 기운이 삼한(三韓)에서 비쳐오므로 그 기운을 따라 바다를 건너와서 진경(眞境)을 찾으니 지형이 기묘하게도 인도와 중국의 보림사와 같으므로 불궁(佛宮)을 세우고 가지산(迦智山) 보림사(寶林寺)라 하였다’고 한다. <다음호 계속>
/원표 대사 국제학술세미나 논문집에서 발췌-현봉(송광사 스님)
/정리=임순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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