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 장흥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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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 장흥민란
  • 임순종 기자
  • 승인 2015.06.22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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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세상! 백성을 구하라!! 「장흥민란」

백성이 주인인 새 세상을 향해~ ‘장흥 농민 항쟁’

2014년 상영됐던 블록버스터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는 양반과 탐관오리들의 착취가 극에 달했던 조선 철종 13년 힘없는 백성의 편이 되어 세상을 바로 잡고자 하는 민란을 주제로 했다. 영화 ‘군도:민란의 시대’의 첫 촬영 장소로 장흥 천관산이다. 고래를 잡으러 떠난 장사정 무리들이 억새풀을 헤쳐 가는 장면 속 배경이 아름답게 펼쳐졌다. 우연찮게도 장흥에서도 1862년(철종 13) 5월 13일 농민항쟁인 장흥민란이 일어났다. 장흥민란의 역사와 배경을 소개하고자 한다. / 편집자 주

▲ 영화 군도스틸컷=쇼박스
■장흥민란
장흥민란은 1862년(철종 13) 5월 13일 농민봉기로써 전 군수 고제환과 향유 정방현·임재성 등이 주도한 농민군이 관아를 습격, 방화했다. 조정은 전라도관찰사 정헌교에게 사태를 수습하게 하여 고제환을 귀양보내고 정방현·임재성을 곤장으로 다스려 난을 진압했다.

■민란의 시대적 배경

▲ 군도:민란의시대 장흥 천관상에서 촬영
조선왕조는 조선 후기 이래 농사기술의 발달에 따른 생산량의 증가 및 상공업의 발달로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양반 지주층이나 부농들은 농지를 대량 확보하여 부를 축적했지만, 가난한 농민들은 소작농이나 삯노동자로 전락하여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었다. 경제환경의 변화와 신분질서의 문란으로 양반 체제는 서서히 붕괴되었다.
조선 말 1862년(철종 13) 삼남지방에서 일어난 농민봉기사건인 임술민란이 일어났다. 농업을 위주로 한 자연경제를 재정적 기초로 삼던 조선은 국고수입을 전적으로 농민에게 의존했다. 그런데 국가의 재정적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농민의 부담은 과중해졌다. 더욱이 19세기 이후 계속된 외척의 세도정치로 관리들이 부패하여 삼정이 문란해짐에 따라 농촌과 국가재정은 극도로 피폐하여 더 이상 지탱하기가 힘들자 농민들은 관을 상대로 봉기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세금 제도는 토지세에 해당하는 전세를 납부하는 전정, 국방세에 해당하는 군포를 납부하는 군정, 환곡의 이자를 거두는 환정의 삼정(三政)이었다. 마침내 1862년 2월 진주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원인은 ① 양곡의 횡령 ② 취잉(환곡의 이자를 많이 받음) ③ 배호백징(호별로 강제징수하는 세금) ④ 공갈 ⑤ 인징(불법으로 전세를 받는 것) 등이었다. 이에 전교리 이명윤(李命允)이 주축이 되어 향리의 농민을 동원·훈련시켜 어느 정도의 조직적 민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 영화 군도 스틸컷=쇼박스
전국 30여 지역에서 농민들이 봉기한 ‘임술민란’의 기폭제가 된 농민항쟁으로, 직접적 동기는 경상도우병사 백낙신의 가혹한 탄압과 착취에 있었다. 주동자는 유계춘·김수만·이귀재 등으로, 이들은 스스로를 초군이라 부르면서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손에는 몽둥이나 농기구를 쥐고 유계춘이 지었다는 노래를 부르며 진주성으로 몰려갔다. 수만 명에 이르는 이들 농민봉기군은 백낙신의 죄를 추궁하는 한편 부정관리로 손꼽히던 권준범·김희순을 불태워 죽였다. 이 민란은 비슷한 처지에 놓인 다른 지방의 농민들을 자극하여, 같은 해에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전국 30여 개 지역에 걸쳐 발생한 민란의 선도적 역할을 했다.
뒤늦게 조정에서는 2월 29일 박규수를 안핵사로 파견하여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농민의 분노와 항쟁을 자극해서 민란은 진주에서 삼남전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3월에는 전라북도 익산에 민란이 일어나고 4월에는 개령·함평, 5월에는 회덕·공주·은진·연산·청주·여산·부안·금구·장흥·순천·단성·함양·성주·상주·거창·울산·군위·인동 등 삼남전역에 걸쳐 민란이 일어났다.
1862년 말이 되자 전국 각지의 민란은 거의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으며, 농민들도 자체적으로 해산했다. 임술민란은 피지배 계층의 분노를 폭발시킨 일대 사건이었지만, 그 실체는 소규모 봉기가 각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조직력이 부족했고, 시대적 한계로 농민들의 계급의식이 부족하여 자신들의 요구를 보장받지 못했다. 임술민란은 조선 양반 체제가 한계에 직면했다는 증거였으며, 이후 동학농민운동과 같은 대대적 농민항쟁으로 계승되었다.

■삼정의 문란

▲ 삼정의 문란
삼정(三政)은 조선 후기 국가재정의 근간을 이루었던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을 일컫는 말이다.
임술민란이 일어난 조선 철종 때는 온갖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이 셋 중 정상적으로 되는 것이 없었다. 관리들은 온갖 편법을 동원해 백성들을 착취했고, 이에 따라 백성들의 부담은 과중되었지만 국가재정은 고갈되었다. 그 차액은 양반 관료들이나 아전들이 착복했다. 당시 정권은 이 체제모순을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국왕 철종은 무능했고, 안동 김씨 세도정권은 국가통치의 원칙을 무시했다. 말단 관원들은 뇌물을 통해 벼슬을 구했고, 그 본전을 뽑아내고 뇌물을 더 바치기 위해 실제 세금 이상으로 백성을 쥐어짰다.
전정은 원래 공평한 부과 및 징수를 위해 20년마다 토지조사에 해당하는 양전을 실시하도록 법으로 정해졌으나, 이 때는 양전이 오랫동안 실시되지 않았다. 때문에 토지의 생산성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고, 세금이 불공평하게 부과되었다. 애초에 조세대상에서 빠져버린 세금포탈지 은결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모리배들이 원래 세금을 걷지 않는 은결에서 세금을 거둔 뒤, 그것을 국고로 보내지 않고 착복한 것이다. 양반과 지주들은 아전들을 협박하여 자신들이 내야 할 토지세를 평민들에게 미루었다. 또한 각종 잡세를 토지세에 얹어서 부과하는 도결이 성행했다.
군정은 조선 영조 때 균역법이 시행되어 병역 의무가 있는 16세 이상 60세 이상 남성 앞에 군포 1필이 부과되는 것으로 세금이 완화되었으나, 미봉책에 불과했다. 병역 대상자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고, 결국 고을마다 내야 할 군포가 할당제로 지정되었다. 양반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병역을 기피했고, 결국 국방세는 평민 계층에게만 몰아서 부과되었다. 평민들 역시 향교나 서원에 숨어들거나 양반을 사칭하여 병역을 기피했다. 이렇게 병역을 기피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부담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부과되었다. 이미 죽은 사람 앞에 세금을 매기는 백골징포, 비전투원인 어린이에게 세금을 매기는 황구첨정 등이 자행되었다. 또한 군포 대신 돈을 내는 전납이 확대되었는데, 실제 군포값보다 고가를 납부하게 하고 그 차액을 횡령했다.
군정에서 구멍이 발생하면 그것을 전정에 부가하여 징수했는데, 이것을 결렴이라고 한다. 결렴으로 인해 군정의 폐단은 곧 전정의 폐단으로 이어졌다.
삼정 중에서 가장 폐해가 심각한 것은 환정이었다. 원래 흉년에 구휼미로 사용되던 환곡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이자를 받아 지방 재정과 수령 경비, 기금 조성 등에 사용되었다. 그래서 농민이 원하지 않아도 억지로 환곡을 배급하고 이자를 붙여 갚게 했다. 환곡 규모는 턱없이 늘어나고, 온갖 부정부패가 일어났다. 환곡의 폐단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환곡을 거두고 나눌 때 폐단이 발생했고, 환곡을 돈과 곡식으로 바꿀 때 폐단이 발생했고, 묵은 곡식을 새 곡식으로 바꿀 때 폐단이 발생했고, 아전이 환곡을 횡령하고 장부상에 허위기재하여 폐단이 발생했고, 채무자가 죽거나 도망쳤을 때 친척과 이웃에게 전가하여 폐단이 발생했다. 횡령 규모는 시간이 갈 수록 커져서, 임술민란이 일어난 19세기에 이르면 수천~수만 석에 이르렀다. 횡령이 빈발하자 정작 흉년이 일었을 때 환곡이 부족한 일이 생겼다. 이렇게 결손된 것을 포흠이라고 했다. 포흠을 메꾸기 위해 농민들을 수탈하고 곡식에 돌과 짚 등 불순물을 섞었다. 또한 환곡을 빌려주지도 않고 이자만 거두는 백징도 발생했다. 그런데 빌리지도 않은 곡식을 농민들이 순순히 갚을 리 만무했기에 이것을 토지세에 얹어서 부과했는데, 이것을 가결이라고 한다.
삼정의 문란은 농민층의 빈부격차를 심화시켰다. 지주와 부농들은 토지를 독점했고, 다른 농민들은 영세농이나 소작민, 경우가 심하면 품팔이꾼으로 전락했다. 양반 계층 역시 분화가 일어나, 평민처럼 농사짓는 향반이 되거나, 자영농 지위마저 잃고 품팔이꾼이 되는 양반까지 생겨났다.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함에 따라 군정이나 환곡이 전정에 전가되는 도결 및 가결을 통하여 토지에 세금이 집중되었다. 지주들은 이 세금을 회피하여 소작농들에게 전가시켰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농민들은, 봉건 체제의 수탈에 대항하여 항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 영화 군도=군도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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