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을 위한 행진곡’ 작곡한 김종률 사무처장 인터뷰
상태바
‘임을 위한 행진곡’ 작곡한 김종률 사무처장 인터뷰
  • 임순종 기자
  • 승인 2015.05.19 11: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의꿈은 뮤지컬 ‘님을 위한 행진곡’이다”

김 사무처장, 강진 군동 영포 고향, 장흥읍 동동리 ‘외가집’

최근 광주 남구의회가 ‘님을 위한 행진곡, 5·18 기념곡 지정 촉구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통과 시키며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 지정곡으로 부를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올해로 7년째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의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여부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는 데 대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한 김종률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의 솔직한 심경을 들어봤다. 김종률 사무처장은 강진군 군동면 영포가 고향이며, 장흥군 장흥읍 동동리가 외가집이다. / 편집자 주

▲ 김종률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  (사진제공 - 뉴스1)

■‘임을 위한 행진곡’ 5.18 기념곡 지정해야 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5·18 기념곡 지정이 또다시 불투명해졌다. 5·18 관련 단체들의 불만이 커지는 가운데 노래를 작곡한 김종률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56·군동출신)의 마음도 착잡하기만 하다.
김 사무처장은 “이해가 안 간다” 며 “내가 의도한 것도,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30년 넘게 자연스럽게 부르면서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곡이 됐는데 ‘종북’ 등의 이상한 색깔을 입히고 있다”며 심경을 토로했다.
이어 김 사무처장은 “이 노래의 순수한 뜻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데, 국민 대통합을 외친 정부가 이를 외면한다는 건 이해가 안 된다”고 덧붙였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전두환 정권의 폭압적인 쿠데타를 용납할 수 없다는 용감한 광주시민들의 용기 있고 민주적인 행동의 산물이었다. 지난 30여년 넘는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아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 불렀던 노래다.
그러면서 국가기념식에서도 항상 제창이 됐던 노랜데 이명박 정권 때부터 이상하게 바뀌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종북이라든지 이상한 색깔을 칠해 부정하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지난 2013년 ‘임을 위한 행진곡’을 5·18 기념곡으로 지정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이 국회 통과된 후 지금까지 정부가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의미

▲ 김종률 사무처장이 1981년 작곡한 ‘임을 위한 행진곡’ 원본 악보.(김종률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 제공)
김 사무처장은 1982년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마지막으로 음악 활동을 중단하게 됐다. 그는 5·18 민주화운동이 사람들의 절절한 아픔으로 남아있고 그 속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은 여러 사람의 위안으로 자라왔다고 확신했다.
민중의 아픔과 희망을 노래한 ‘임을 위한 행진곡’도 그때처럼 정치적 잣대로 재단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김 사무처장은 “광주 민주화운동까지 왜곡되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가사가 격하지도 않고 폭력적인 것 없이 상당히 서정적이고 많은 사람들이 위안을 받고 있는 노래다.
이 곡은 원래 ‘넋풀이’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진 30분짜리 노래극의 마지막에 나오는 합창곡이다. 이 노래극은 광주 도청을 지키다가 계엄군에게 숨진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열사와 노동현장에서 ‘들불야학’을 운영하다 숨진 그의 대학 후배 박기순열사의 영혼결혼식 결혼선물로 전달하자는 논의를 거쳐 만들어진 일종의 미니 뮤지컬로서 부제는 ‘빛의 결혼식’이다.
김종률 사무처장은 곡과 관련 "두 분이 들불야학을 운영하며 겪은 일, 두 분의 사랑 이야기, 5·18로 인한 사람들의 희생과 죽음을 뚫고 영혼결혼식으로 맺어진 과정을 노래극으로 담았다"며 "희생당한 분들이 자꾸 낙담하고 힘들어하는 후배들에게 뭔가 이야기해주는 형식으로 만들면서도 장중함과 순간순간의 아픔, 그걸 이겨내는 각오들을 담기 위해 장조가 아닌 단조를 택했다"고 곡 탄생 배경을 설명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그동안 홍콩, 중국, 대만, 태국,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권의 노동·인권운동 현장에서 현지어로 번역돼 불려왔다.
김 사무처장은 “임을 위한 행진곡의 참된 의미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통해서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이 교과서에 한 줄로 ‘박제화된 역사’가 아니라 매일 밤 전 세계의 주요 도시에서 뮤지컬로 살아나는 ‘오늘의 역사’이기를 꿈꾼다”며 “노래는 억압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마음을 보듬는 처방전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1981년 5월, 임을 위한 행진곡의 탄생

'임을 위한 행진곡'은 김종률 사무처장이 전남대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던 1981년 5월 경 소설가 황석영 선생의 제안에 따라 광주지역 노래패 10여명이 모인 가운데 황 선생의 자택에서 1박2일이란 짧은 시간에 완성된 노래다.
광주민주화운동이 계엄군의 무력진압으로 끝난 1년 후. 황석영 선생과 광주 일대의 문화운동가들은 기념식은커녕 숨죽이며 1주년을 보내는 현실이 절망스러웠다. 마침 희생자 유족들 사이에선 “머잖아 윤상원열사와 박기순열사의 영혼결혼식이 열릴 것”이란 입소문이 돌고 있었다. 실제 그들의 들불야학 후배와 유족들 간에 ‘혼담’이 오가고 있었다. 김 사무처장은 “81년 5월 19일 아침 황석영 선생이 ‘그냥 지나가기엔 너무 허전한 거 아냐’라고 전화가 와 광주 지역 문화운동패 10여명이 황석영 선생의 집에 모였다”고 했다. 그들은 광주항쟁 때 희생된 한 청년노동자와 여대생을 가상하여 “그들의 넋을 ‘쨈매주는’(묶어주는) 넋풀이 형식의 노래극을 만들자”는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그들은 당시 살벌한 분위기에서 “말이 새나가기 전에” 대본과 노래를 짓기로 하고 오후에는 집에 커튼을 내린 뒤 녹음까지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노래극 ‘광주에 살던 어느 두 젊은 넋의 죽음과 사랑에 관한 노래 이야기’의 마지막 합창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나온다.
영혼결혼식의 주인공 남녀가, ‘산자들’이 자신들의 죽음에 괴로워만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격려하며 투쟁을 독려하는 내용의 노래였다. 노래극 클라이맥스가 될 이 합창의 의미가 막중했던 만큼 노랫말을 두고 참석자 간에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황석영 선생이 그러던 중 지하유인물에서 본 백기완 선생의 시를 떠올렸고 따라 부르기 좋게 개사했다. 김 사무처장은 곡을 썼다.
82년 2월20일 광주 망월동 묘지에서 윤상원열사와 박기순열사의 영혼결혼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누가 들을세라 조용히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불려졌다. 비록 조악하지만 몰래 녹음했던 테이프들이 대학가에 이미 퍼지고 있었을 때다. 그렇다 해도 81년엔 전두환 정권의 서슬이 시퍼럴 때다. 내놓고 영혼결혼식을 하는 것도,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도 힘든 시기였다. 그러나 이 날 이후 ‘임을 위한 행진곡’은 대학가 시위나 통일, 노동운동 현장에서 부르는 단골노래가 되었다.
김 사무처장은 “아픔을 노래하면서도 진정성과 힘이 느껴지는 장중한 행진곡이 되게끔 장조가 아닌 단조를 택했다”며 “테이프를 틀자 모두가 전율을 느꼈다”고 회고 했다.

▲ 김종률 사무처장
약력
1958년 강진군 군동면 영포 출생.
1977년 광주 제일고등학교 졸. 1982년 전남대학교 경영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들기 전 광주지역 방송국 〈제2회 전일대학가요제〉자작곡 ‘소나기’로 대상 수상, MBC <대학가요제>에서 자작곡 ‘영랑과 강진’으로 은상을 받고 앨범을 냈다.
1985~88년 롯데 대홍기획(대리), 1988~93년 Nabisco, RJR(이사), 1996년 음반사 BMG와 소니뮤직엔터테인먼트 합병(대표이사 역임), 2010년 ㈜제이알미디어(대표이사 역임), 현)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을 맡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