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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주인공 - 강진 가우도 역사의 산증인 김성옥씨김성옥 씨 “조상님들 선산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눌러앉아”
조창구 기자  |  whckdrn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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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1.05  13:2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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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도에서 태어나 평생을 가우도에서…가우도 역사의 산증인

   
▲ 김성옥 할아버지

강진만에 있는 8개의 섬 중 유일한 유인도인 가우도. 소의 멍에에 해당한다는 가우도가 출렁다리가 생기면서 힐링과 놀이의 공간으로 전국적인 명소가 됐다. 그곳 가우도를 묵묵히 지켜온 김성옥(87)할아버지를 만났다.

2.5km둘레에 10만평이 조금 안되는 가우도는 2005년 가우마을로 승격되기 전까지 도암면 망호마을에 소속돼 개별마을로 대접받지 못했다. 2011년 출렁다리 개통이후 관광객들이 넘쳐나지만 조그만 섬 가우도는 바람이 많은 날이면 외지와 통행이 끊기는 외롭고 조용한 동네였다.

   
▲ 대구면 저두에서 바라본 가우도 전경

김성옥 할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인 1932년에 가우도에서 태어나 쭉 살아왔다.

가우도에서 만난 김 할아버지는 약간 거동이 불편할 뿐 연세가 많음에도 기억이 총총하고 목소리도 거침이 없으셨다. 용모도 체격이 크고 손과 발이 커 젊었을 땐 힘깨나 썼을 법하다. 게다가 코도 오똑하니 준수한 용모여서 아가씨들의 인기를 끌었을 법한 용모였다.

섬이라 세파에 휘둘리지 않아서였을까? 조강지처만 알 정도로 큰 욕심없이 가정에 충실해온 것이 장수비결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김성옥 할아버지 부부

김 할아버지는 경주김씨인 부친 김인보씨와 모친 박하자 여사 사이에 9남매(4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바다일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고 모친은 싸우지 않고도 말로 잘 풀어나가는 여장부였다고 한다.

김 할아버지가 기억하는 가우도는 크지는 않지만 바다에서 멸치 잡고 낙지며 전어, 돔과 바지락 등이 많아 풍요로운 동네였다. 젊은 시절엔 마을에 들르던 완도사람 권유로 굵은 멸어장 일을 비라도 윗등에서 죽발어장을 해 재미도 봤다.

가우도 주변에서는 낭장으로 멸치를 잡았다. 봄철이면 젓갈용 멸치를 가을에는(9~10월) 반찬용 멸치를 배로 한 가득 잡곤 했다. 어장이 풍부해 벌이도 괜찮았고 자식들 대학까지 보낼 정도로 교육열도 높았다.

6.25동란을 거치며 없어졌지만 가우도에서는 바다일 안전을 기원하는 당제가 마을 위쪽 후박나무 군락지에서 열렸다. 마을사람들이 추자도까지 고기잡이를 나갔었는데 당제의 기도 덕분인지 먼 바다에 가서도 사고없이 잘 지냈다고 한다. 

   
▲ 김성옥 할아버지 가족사진

옛날에는 가우도에 ‘관해제’라는 서재도 있었다. 강진의 부자들이 배를 타고 글공부하러 다녔다고 한다. 지금이야 강진만에 배들이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과거 남포와 백금포까지 많은 배들이 들어오던 때였다면 가우도 서재에서의 글공부가 충분히 가능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우도에 정감이 가는 것은 무엇보다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이리라. 사람이 사는데 필수요건은 물이다.  가우도에는 3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 마을앞 후박나무아래 샘을 비롯 마을안에도 2개의 샘이 있었다. 지금은 덮개로 덮여 물맛을 볼 수 없지만 20여년전 배를 타고 가우도를 찾았다 후박나무 아래 시원한 샘물로 목을 축였던 기억이 새롭다.   

김 할아버지는 21살에 소장사의 중신으로 칠량 구로에 사는 아내인 노일순(89)할머니를 만났다고 한다. 얼굴도 모르고 한 결혼이었지만 3남3녀의 자녀를 낳고 서로 열심히 살다보니 장성한 손자들와 여러 명의 증손자까지 보고 있다.

할아버지 부부의 자녀중에는 강진의 유명인사가 된 딸이 있다. 셋째딸 금숙씨가 가우도국민학교 4학년때 ‘밀물과썰물’을 연구해 대통령상을 받았다. 금숙씨는 이 상으로 강진시내에서 카퍼레이드를 했을 정도로 뉴스였다.

   
▲ 김성옥 할아버지

지금은 섬에 다니기 좋게 길이 많이 생겼지만 예전에는 외딴 섬이다보니 외지사람은 구경할 일이 거의 없었다. 바닷일을 갈 때면 산밑 모래밭 길을 걸어서 다녔다. 고기를 잡는 배들도 방파제나 부두가 없어 산밑에 모래밭에 대놔야 했다. 김 할아버지가 기억하는 가우도는 마을 앞뒤로 모래밭 천지였다. 김 할아버지는 “동네앞은 물론이고 마을 뒷쪽에 바닷가 바위가 안보일 정도로 모래가 많았제”라며 “근데 당시 동네 어르신들이 술을 잘 드셨는데 완도사람들이 측광(방파제나 부두시설)에 쓴다고 술 몇 되 사주면 맘대로 싣고 가라고 했다”고 말한다. 배로 모래를 한가득씩 싣고 갔다고 한다. 지금까지 그 모래들이 있다면 가우도의 또다른 자랑거리가 될 수도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가우도는 앞 바다 깊이가 서 발 정도라고 한다. 탐진강 상류에 댐이 생기기 전에는 파래와 바지락 등이 성했다. 동네사람들이 나가 20kg 망으로 30깡씩 캤다고 한다. 댐 이후로 바지락 구경하기가 힘들어지고 대신 없던 석화가 조금씩 생겼났다.

도암국민학교 4학년때 해방을 맞았다. 이어 625동란이 터지고 인민군들이 시골까지 와 인민군으로 착출해가던 때는  피해다니기도 했다.

가우도는 섬이어도 전기와 전화가 빨리 들어왔다.  1967년 가우도에 학교가 생기고 지서가 들어오면서 보급됐던 것. 많을 땐 17가구나 살던 가우도에 도시 등 외지로 나가는 사람이 늘면서 손주가 3학년되던 해 학생수가 한 명 밖에 안된다는 이유로 폐교되기까지 28년간 있었던 가우도분교에 많을 땐 학생수가 60명까지 됐다고 한다.

김성옥 할아버지는 “인공(6·25) 후 가우도를 나가려고도 한 적이 있었다”며 “그렇지만 조상님들 선산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눌러앉았다”고 술회했다.

출렁다리가 생겨 편리하고 좋다는 김 할아버지는 “그동안 살아온 곳이고 고향이니 사는 것이고 옛날에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듯 자녀들도 화목하게 잘 지내고 챙겨줘 그 재미로 살아간다”며 마을앞 강진만같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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