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문 작가가 직접 격은 여순반란사건〈마지막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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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문 작가가 직접 격은 여순반란사건〈마지막 회〉
  • 장강뉴스 기자
  • 승인 2014.06.07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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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애족의 일념으로 충성하는 국민으로 거듭나야 할 때”

“1948년 10월 19일 여순반란사건…1963년 11월 12일 빨치산 최후 2인 정순덕, 이홍이 체포 지리산 막을 내리다”

▲ 이형문 작가
기타 주동자 홍 순석(육사3기 군번 10583/1922년 2월 16일생) 본적은 서울 중구 길야정 일정목 121번지이며 중국 연길현 용정의 은진중학교를 졸업 후 김지회 중위와 함께 1947년 4월 19일 소위로 임관 광주 4연대에 배속 돼 중위로 진급 동년 6월 1일 여수 14연대로 배속된 자임. 김지회와 함께 지리산과 덕유산 일대에서 빨치산을 이끈 자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기 훈장 3급을 수여받은 자로 김지회 사살의 결정적 단서를 제공했던 반선리 주막 여주인은 그 후 빨치산 잔당의 습격을 받고 볼에 짓이겨진 채 눈 뜨고 보기 힘들만큼 처참한 모습으로 살해당하고 그때 주막집도 함께 불태워졌다고 함.
그리고 주동자 지창수(池昌洙)상사는 여수 반란 사건 최초 주동자로 인사계 지창수는 1948년 14연대 반란 당시 인사계 김형운 (육사6기, 전남 고흥)의 증언에 의하면 지도력이 뛰어난 자는 아니나 벌교 출신으로 학교에 진학치 못하다가 일제말기 일본군으로 지원 입대함. 해방 후 박헌영 전남지역 심복의 한사람으로 하수인으로 활동. 국방경비대 광주 4연대의 사병 1기로 입대 좌파 사병들의 비밀군가동맹총책으로 활동.
지창수는 14연대 반란이후 그 행적이 모호하나 그의 최후에 대하여 안재성 저서 ‘이현상’ 편저 296쪽을 참고해보면 빨치산 생활을 시작당시 1949년 1월 중순 경남 하동군의 칠불암 뒷산을 정찰하다가 매복중인 토벌대에 의해 생포되었다는 기록. 지창수는 집안 광주의 유명한 부호에 의해 사형을 면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1950년 6.25일 전쟁 초기 인민군이 남하할 때 다른 죄수들과 함께 집단으로 감옥에서 처형되었다고 소개됨.
또 안도섭 저서 ‘세월이 가면’(143~145쪽)에 보면, 구례 기습 작전에 참가한 지창수 부대는 섬진강 아르 건네 구례읍 서남부에서 포위망을 이루며 구례읍으로 들이 닥쳤다. 그러나 구례읍에 주둔한 제 12연대 2개 대대의 저항과 반격으로 3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난 후 1949년 1월 칠불암 뒷 능선을 정찰 중이던 아군 토벌군의 매복에 걸려 생포됐다. 그는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일단 사형을 면하고 무기징역으로 6.25 전쟁 초 국군이 후퇴 시 처단되었다고 함.
또 이기봉 저서 ‘빨치산의 진실’ 하권 (393~395쪽) 지창수 부대는 구례작전 때 주력과 합류, 1949년 2월 부상을 입고 국군 토벌대에 생포되었다가 총살당했다고 기록됨. 그러나 이 자가 1948년 10월 말부터 1950년 6.25전쟁 초기 사이에 죽은 것은 확실하다고 씀. 그의 죽음은 대한민국을 전복시키려는 반국가적 인 반란행위와 수많은 양민을 무고하게 죽인 대가임을 부인할 수 없다고 씀.
기타 남로당 군사부 총책 이재복, 남로당 중앙 조직부 총책 이 중엽, 남로당 민조전선 사무국장 이강국, 이강국의 애인 국제 여간첩 김구임. 남로당 민족전선 중앙위원 정태식, 북로당 남반부 정치위원회 총책 성시백, 남로당 무장분야 총책 이주하 남로당 총책 김삼용, 남로당 최고총수 박헌영 등 이들 모두는 10월 8일 11월 7일 결렬한 논쟁 후 박헌영은 2년간 몰락기를 거쳐 결국 김일성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되어 처형당했음.
마지막 빨치산 최후 2인 정순덕(여)과 이홍이(남) 이들은 1963년 11월 12일 새벽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 내원사 계곡에서 경찰과 대치 잠복 중이던 김영구, 박기수에게 우측 대퇴부에 총상을 맞고 체포됨. 생포될 때 정순덕의 나이 30세였고, 그의 남편은 1952년 1월 지리산 대성리 계곡에서 토벌대에 의해 죽었음.

이상의 사실과 같이 북한 남로당은 제주 4.3 사건과 여수 반란 사건 등을 계기로 무모한 유격 투쟁을 전개. 1948년 12월 국가 보안법이 통과되면서 1949년 7월부터 조직적으로 대규모인 유격투쟁을 위해 인민 유격대를 창설하기도 하였음.
이로 인해 가장 불쌍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은 바로 남한에 있던 빨치산이었다. 이들의 정치적 지주이던 김일성과 박헌영의 정치적 야심을 채우는 일에 이용만 당한 사실을 전혀 몰랐음. 전쟁이 끝난 이후 이들이 속은 것이 그 얼마나 어리석고 불쌍한 자들인가?
그들은 결국 공산주의에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아 모두 비참한 최후가 되고,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의 체포로 지리산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8) 결론 (역사적 교훈)
필자는 이 사실들을 수집하며 많은 날들을 보내면서 여수 고등학교를 졸업(3회)생임을 자부하는 책임을 느끼며 앞날의 기록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밝혀보고 싶은 심정에서 이 자료를 수즙했고, 참고 되기를 바라는 정신에서이며, 참으로 우리나라는 일본의 대동아 전쟁의 패망과 동시에 어처구니없는 소련 스탈린의 야욕으로 하여금 공산주의가 김일성을 앞잡이로 만들어 공산국가로 통일 시키는 야욕 때문에 미국과의 틈새에 끼인 우리 민족이 오늘에 이르도록 통일도 못하고 비운에 남북이 분단되어 필자는 죽어 눈을 감기 전에라도 통일을 보지 못할 것에 통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런대도 앞에서 지적했듯 이석기등 반 민족주의자 빨갱이들을 처단치 못하는 한심한 나라임을 통탄할 뿐입니다.
참으로 제주 양민학살 사건, 여수 반란 사건과 6.25 사변을 겪어오면서 공산주의라는 자들이 그 얼마나 잔인무도(殘忍無道)하다는 것은 다시 한번 만천하에 밝혀지기를 원할 뿐입니다.
이제 전쟁을 모르고 자라나는 2세대 젊은이들은 우리 민족이 과거의 끔찍한 역사적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하고, 잊어버리고 있는 현실에 무척이나 걱정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눈부신 발전을 딛고 일어나 2만 불 시대에 살아가게 됐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은 아직도 백성이 굶주리고 있는 실정 속에서도 김정은 일당 독재는 남한을 호시탐탐 침략으로 기회만을 노리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다시한번 싹터 올라 애국애족의 일념으로 충성하는 국민으로 거듭나야 할 때입니다.
끝으로 필자는 여수 고등학교 3회 졸업생임을 자부하며 학교의 무한한 발전을 빌면서 대단원의 다큐의 진실 그대로를 쓰게 된 것을 영광과 보람으로 여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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