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2023 장강인상 「올해의 인물상」 김규문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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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2023 장강인상 「올해의 인물상」 김규문 선생
  • 임순종 기자
  • 승인 2023.11.28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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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문 선생, 기업인으로써 평생 국악사랑 실천 ‘판소리계 명사로 통해

’문화가 뒤떨어지면 국가는 발전할 수 없고 국민의 삶은 피폐해진다‘

’고향을 빛낸 사람들을 배척하지 말고 더욱 따뜻하게 반겨 주었으면”

김규문 선생
김규문 선생

 

기업인으로는 보기 드물게 평생 국악사랑을 실천해 와 판소리계의 명사(名士)로 통하는 사람이 있다. 장흥 안양면 수락리가 고향인 김규문(83) 선생이 ‘2023 장강인상 올해의 인물상’ 주인공이다.

김규문 선생은 사업가이면서 국립극장 예술인진흥회장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판소리 초대 상임이사로 국악 위상 강화와 저변확대를 위해 활동했다.

김규문 선생은 1941년 장흥군 안양면 수락리에 5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고향마을 수락리 사장 나무 아래서 덕석을 깔아놓고 여러 명이 어울려 소리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김규문 선생과 안숙선 명창
김규문 선생과 안숙선 명창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아버지는 상당한 재력을 가진 규수와 결혼했으나 외가의 가세가 기울자 김 선생은 안양동초등학교 3학년 때 보성군 회천면 영천리로 이사를 했다. 이 마을이 원래 보성소리(강산제)의 산실이다.

김 선생은 12살 때 조모의 효열비 낙성식에 한 중학생(조상현 명창)의 판소리를 듣고 매료되었다.

그때부터 까만 솥에 쇠죽을 쑤느라 불을 땔 때 부뚜막을 쳐 가며 소리를 흉내 내다가 부뚜막이 망가져 혼이 나 적이 많았는데 늘 입속으로 중얼중얼 따라 했던 것이 훗날 판소리도 하고 북을 잡는 계기가 되었다.

김규문 선생과 안숙선 명창 공연
김규문 선생과 안숙선 명창 공연

 

김 선생은 땅이 두 마지기(400평)밖에 없는 가난한 살림에 공부할 수 없어서 17살에 상경했다.

65년 전, 서울 명동성당 옆에 학교에 못 간 사람들이 갈 수 있는 학원이 있었는데 그곳에 다니며 주경야독을 하다가 우연히 리어카에서 책을 한 권 사서 읽은 것이 인생의 진로를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한국은행 총재가 9남매 자식들에게 남기는 유언장이 있는데 그중에 “성냥 장사를 할지언정 절대로 월급쟁이는 하지 마라”는 말에서 영감을 얻어 사업가의 꿈을 꾸게 되었다.

김 선생은 회사에 들어가지 않고 직접 수출업, 요식업, 제조업 등에 뛰어들어 여러 가지 사업을 시도해 성공한 자수성가의 표본이다.

사업이 잘되어 여유가 생기던 어느 날, 가슴 밑바닥에 늘 품고 있던 판소리에 대한 열망을 눈치챈 아내가 하얀 모시 두루마기와 종로에서 사 온 소리북을 선물했다. 60여년 된 소리북은 지금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

김규문 선생과 부인
김규문 선생과 부인

 

김 선생은 본격적으로 ‘조상현 판소리연구소’에서 소리를 공부하고 인간문화재인 명고 김청만 선생에게 북을 배우며 소리꾼으로서 꿈을 키워나갔다.

그렇게 해서 기초부터 시작해 북치는 법, 춘향가, 수궁가, 심청가, 사철가 등의 판소리를 배우기 위해 14년간 공부를 계속했다.

늦깎이로 중앙대 대학원을 다니면서 소규모 수출 사업도 하고 조상현 명창과 안숙선 명창, 뚜 분 스승을 오가며 소리 공부를 했다.

노력의 대가이듯 국악공연대회에 출전해 국무총리상을 수상하고, 안숙선 명창, 소리꾼, 고수로 한 조가 되어 공연하기도 했다.

국악계에서는 김규문 선생의 실력을 인정해 국립극장 민간인 최고 책임자인 예술인진흥회장을 8년간이나 맡았다.

회장으로 재직할 당시 국립극장은 150억의 예산과 민간후원금으로 13가지 국악교육을 실시해 3,0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유네스코 무형 문화유산 판소리 진흥회 상임이사장
유네스코 무형 문화유산 판소리 진흥회 상임이사장

 

판소리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수 있도록 유네스코를 세차례 방문하는 노력으로 판소리가 유네스코에 등재되는데 한몫했다. 그렇다 보니 2년간 세계문화유산 판소리 초대 상임이사를 맡기도 했다.

장흥군에 전통가무악전국제전 유치에 큰 역할을 했으며 2019년 장흥물축제 개막식 판소리공연에 박애리 명창과 고수로 합을 맞춰 판소리 실력을 군민들에게 선보인 바 있다.

경찰 경우 장학기금 모금 음악회 출연
경찰 경우 장학기금 모금 음악회 출연

 

올 10월에는 서울 마포구 마포아트센터 아트홀맥에서 열린 대한민국 재향경우회 주최 ‘경찰·경우 장학기금 모금 음악회(영일만 친구와 밥사는 사람)’에서 국악 명창 박애리 사회, 경우 윈드오케스트라(40명), 국민가수 남진·김성환·최유나·요요미, 세계적인 성악가 석상근·최윤나 씨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명고로써 함께 공연을 펼쳤다.

가장 기억에 남은 일에 대해서는 1991년 고르바초프 집권 당시 모스크바 대학 로마노프 교수의 초청으로 러시아에 가서 국악 특강도 하고 한복을 입고 〈춘향가〉를 부른 것이라고 한다.

러시아《르라우다》지는 모시 두루마기를 입은 모습을 크게 실어주며, 그이 예술세계를 소개했다.

한류가 시작되기 직전이던 그때, 이미 김규문 명창은 판소리를 세계에 알린 선구자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하다.

또한, 아쉬웠던 것은 2018년에 안숙선 명창이 수락리 뒷산 중턱 샘계에서 득음하고 싶다는 소망을 듣고, 장흥군에서 정자를 하나 지어주었다.

이곳 수락리 뒷산은 소리꾼들이 득음을 위한 최적의 수련 장소로 명당이라고 할 수 있다.

김규문 선생 수락리 저택
김규문 선생 수락리 저택

 

‘안숙선 명창 소리연습소’라는 칭호도 붙여주고 여러 사람이 연습하는 장소가 되길 바랬지만, 주민 몇분의 반대로 마을에서 정자까지 가는 도로를 내지 못해 최고의 명소가 빛을 보지 못하고 있어 아쉽다고 말하며, 그곳은 문화유산이 될 것이 분명하다며 장흥군과 국악인을 위해 진입로 개설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곳은 수락리 지명 그대로 물이 떨어지는 정자나무 아래서 김 선생이 14년 전 안숙선 명창에게 소리 공부를 한 의미 있는 장소다.

특히, 판소리 득음의 최적지로 알려진 그곳은 김규문 선생의 스승인 조상현 명창과 조상현의 스승 정응민 명창이 수락리 마을에 자주 오셔서 소리를 하시면서 늘 하신 말씀이 “득음을 하고 싶으면 수락리 마을 뒷산 샘계에서 수련하기 최적의 장소다” 고 말씀하셨다.

또 다른 아쉬움은 고향발전을 위한 사업을 유치하려고 제주 라온그룹 손천수 회장을 설득하여 제2의 라온 프라이빗을 만들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보성군 회천면에 유치했다며 안양면이 안양읍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놓친게 정말 안타깝다며 씁쓰레했다.

그래도 고향을 위해 지난해 안양면 수락리에서 후학양성에 한평생을 바친 영원한 스승 ‘임수헌 선생’ 송덕비 이전 제막식을 가졌다.

임수헌 선생 송덕비
임수헌 선생 송덕비

 

수락리 입구에 이전한 송덕비 제막식에는 32명의 제자 중 유일하게 생존해 계신 김두흠 선생을 비롯해 전국에서 제자 후손들이 참석한 가운데 임수헌 선생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김규문 선생은 세 번째 제자 김복환 선생의 아들로서 아버님의 스승이고 마을의 영원한 스승의 송덕비를 이대로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며 후손들을 찾아 설명하고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송덕비를 이전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김규문 선생은 “우리 마을의 영원한 스승이신 임수헌 선생님의 가르침은 두고두고 영원히 빛날 것이다” 고 말했다.

국악 사랑이 몸에 밴 김규문 선생은 “인간의 욕망을 부와 명예와 풍류로 친다면 그중에서 나는 풍류로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 품 장흥 고향마을에 내려가 조상 선영을 돌보며 건강하게 사는 게 즐겁고, 판소리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풍류를 즐기니 행복하다” 고 말했다.

김규문 선생 걸어온 길

▲1941년 장흥 안양출생

▲국립중앙극장 예술진흥회 회장 역임

▲(사)한국춤하나문화진흥회 고문

▲유네스코 판소리 초대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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