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를 소환한 ‘은어잡이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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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를 소환한 ‘은어잡이 추억‘
  • 장강뉴스
  • 승인 2022.09.02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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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갑(강진군농촌활성화지원센터장)

엊그제 8월 말로 40여 년의 교직 생활을 마치고 퇴직하는 고교 동창이 ’은어잡이 추억‘ 이라는 수필집을 보내왔다. 인생 이모작을 앞두고 쓴 책이다. 제목을 보는 순간 50여 년 전 추억이 새록새록 생각나 단숨에 다 읽었다. 어릴 적 뛰놀던 탐진강에 대한 추억을 고스란히 소환해주었기 때문이다.

윤영갑
윤영갑

그 친구는 우리 마을처럼 강변에 위치한 옆 동네에 살았다. 행정구역상 같은 면이지만 그 친구와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학구가 달랐다. 시기는 달랐지만 탐진강 보(洑)를 건너 학교에 다닌 공통점이 있다. 친구는 임금이 상으로 내렸다는 탐진강 하류에 설치된 어상보(御償洑)를 건너 금천초등학교에 다녔고 나는 그 아래에 설치된 관선보를 건너 고등학교에 다녔다. 물 건너 학교를 다닌 것이다.

지금은 상류에 장흥댐이 생겨 수위 조절이 되지만 당시는 비가 조금만 와도 보가 넘치기 일쑤였다. 이때마다 어상보 이용주민과 학생은 양쪽에 줄을 매달고 잡아당기는 양산마을 앞 나룻배를 이용해야 했다. 비가 많이 올 때는 배가 떠내려가지 못하게 뭍으로 올려놔 그마저도 이용할 수 없었다.

관선보를 건너다닌 우리도 보가 많이 넘친 날은 10km 이상을 돌아 학교에 가야 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때인데 등교시간을 맞추기 위해 무리하여 보를 건너다 며칠째 넘친 물로 인해 낀 이끼에 미끄러져 가방이 흠뻑 젖어 양지쪽에서 말려가기도 했다. 시간 아끼려다 책도 버리고 지각까지 한 것이다. 나중에는 비닐을 넣고 다니면서 물이 넘은 보를 건널 때면 가방을 비닐로 싸 혹여 넘어져도 가방이 젖지 않게 하고 건너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환경의 변화와 함께 높게 설치된 시멘트 구조물로 인해 지금은 구경하기도 힘들지만 70~80년대만 해도 탐진강에는 은어가 많았다. 어른들은 낚시로 은어를 잡고 우리는 시커멓게 몰려다니는 은어 떼를 향해 돌을 던지거나 긴 막대기로 내려쳐 잠시 기절해 하얗게 배를 뒤집고 떠오른 은어를 주워 담기도 했다.

성질 급한 은어의 습성을 이용한 것이다. 은어는 일반 낚시와 달리 은어로 낚는다. 쪽대로 미끼용 은어를 잡아 은어의 코에 낚시 줄을 묶고 꼬리에 여러 개의 바늘을 달아 훑치기로 하는 게 은어낚시의 특징이다.

낚싯줄 끝에 매달린 은어를 하류에서 상류 쪽으로 끌어 올리면 미끼 은어의 꼬리를 부딪치며 몸싸움하다 다른 은어들이 입 코 눈 배 등에 바늘이 꿰어 걸리면 잡는 방식이다.

아버지는 은어를 좋아하셨다. 장마철이 지난 여름철 탐진강 물이 조금 불어나면 어김없이 2~3m 길이의 대나무 낚싯대를 들고 나가셨다. 지금의 석교교 다리 상류 지점 물살 흐름이 있는 곳을 찾아 훑치기 낚시로 두 세 시간에 대나무로 된 꾸덕에 반쯤 채워오시곤 했다.

야릇한 비린내 때문에 먹기 꺼려 하는 자식들에게 초장을 묻혀 억지로 먹이기도 하고 나머지는 바로 짚불을 피워 훈제한 후 보관했다가 추석에 찾아오는 친척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책 속에 소개된 ’아버지의 5.18‘은 지난 격동의 세월을 다시금 회상하게 한다. 자식을 대학 보내놓고 데모가 일상이 되어버린 아들의 학교생활을 걱정한 부정(父情)과 게엄령 선포로 외곽에서 광주시 시내로 진입하는 교통이 끊기자 나주에서 걸어서 광주까지 올라와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아들을 덥썩 안고 우셨다는 그 마음을 이해하고도 남는다.

5․18 때 나는 징병검사를 마치고 시골에서 군입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님이 어디서 들었는지 광주에 반란군이 쳐들어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젊은 사람들을 다 잡아간다며 내게 밖에 나가지 말고 숨어있으라고 했다. 며칠 동안 친구들과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마을 뒤 동백나무 숲에서 낮시간을 보내고 저녁에는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어느 날엔가는 탐진강 건너 국도 2호선 비포장도로를 따라 강진읍에서 징흥 쪽으로 차창을 두드리며 구호를 외치며 가는 긴 시위대 차량 행렬을 지켜보며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훗날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았지만 당시는 전두환 일당이 호도한 대로 북한 사주를 받은 폭도이고 반란군인 줄로만 알았기 때문이다. 그게 민주화운동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친구는 가정사도 나와 유사한 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5남매 장남이고 나는 6남매 장남, 아버님이 우리가 30대 초반일 때 돌아가셔서 아버지를 대신해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다는 것도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나의 어머니는 56세로 일찍 돌아가셨는데 친구 어머니는 아직도 건강하게 살아계신다니 부러울 뿐이다.

책 속의 할머니 얘기는 오직 자식들 밖에 모르고 희생해 온 이 땅의 부모님들을 떠올리게 한다. 마당에 깔아놓은 멍석 위에서 할머니가 넓은 부채 부쳐주며 들려주던 호랑이 이야기 듣다가 잠든 얘기, 탐진강변에 소 풀어 놓고 친구들끼리 돌 맞추기 하며 놀던 얘기, 자녀와 손자들에게 주기 위해 숨겨놓은 어머니의 봉지(봉다리)이야기, 동네잔치가 된 가을운동회 기마전 이야기는 50여 년이 다 되어 가는 데도 마치 엊저녁, 오늘 낮에 있었던 일 같다. ’은어잡이 추억‘을 통해 지나간 세월 속에 묻어두었던 추억을 한순간에 소환시켜 준 친구가 정말 고맙다.

이른 봄 할머니가 뜯어온 쑥으로 쑥떡을 만들어 온기가 식기 전 자식들 먹이려고 새벽 찬바람 맞으며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아들 자취방 문 앞에 두고 간 쑥떡이야기는 코끝을 찡하게 한다, 곧 추석이다. 추석 명절이면 매년 6남매 형제들이 모여 부모님 생전의 얘기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최근 3년은 읍내에 사는 막내 동생과 조촐히 지내야만 했다.

다행히 올 추석은 코로나 발생 이후 처음으로 사회적 거리두기 없이 맞이 할 수 있게 되었다. 모처럼 형제들이 모여 웃음꽃을 피우며 차례다운 차례를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추석 명절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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