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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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장흥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19〉
  • 장강뉴스
  • 승인 2022.05.16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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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그녀의 죽음을 어떻게 전할까요?

장흥군은 현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따라 한국전쟁 전후 장흥에서 벌어진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 조사·기록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조사에 따라 진실규명신청서를 작성하여 관계 기관에 접수한다. 이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사)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은 본지 지면에 이 아픈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

 

스무 살, 그녀의 죽음을 어떻게 전할까요?

장동면 밤실 민간인 학살 사건

“가을 추수 끝날 무렵 돌아 가셨는디, 요양반이 참 좋았어 키도 크고 이뺐재, 참말로 법도 없이 살 양반인디, 그 집안도 솔찬히 괜찮했능갑디다. 그란디, 즈그아버지하고 오빠가 그라고 돼야 버렸재, 요양반도 그라고 험하게 돌아가셨재, 인자 말하기도 징하네야”

“임리에서 시집 온 그 양반은 문00 그짝 집안이여, 요양반 시아버지가 일제 강점기 때 구장을 했고 그란디, 당시 요만한것이라도 유감이 있었던 사람들은 때려 죽이고 그랬거든.

그란다고 어짤것이요? 그랑깨 남자들은 모다 장동지서가 있는 마을로 폴쌔 내 빼버렸고 여자들이야 어짤리디 그런 식이여, 그란디 큰집 작은집 모다 끌고 가버린거여 애기들까지... 하루저녁에. 여자들이 무슨 죄가 있겄는가, 하~ 징해서 말도 못해. 깨댕이 벗겨가지고 나무에 묶어 짚으로 태워 죽였다는 말도 있었어”

장동면 밤실_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김정남씨(가운데)
장동면 밤실_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김정남씨(가운데)

“나이는 얼마 안 묵었어도 볼 것 다 보고 겪을 대로 다 겪었어, 무슨 일이 일어났다 하면 바로 다음날 어짜네 저짜네 하고 소문이 쫙 나 부러. 암껏도 없는 사람들이 그쪽에 휩쓸려서 조금이라도 밥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나 유감 있었던 사람들을 잡아다가 찔러 죽이고 그랬당깨, 팽야 한동네 사람들이여, 묘하니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그 지랄하재. 전부 유치 산으로 끌고 가 버렸어, 그 해에 풍년이 들었어 그랑깨 나락이 많아, 그랑깨 거그가 반란군 천지가 되야부렀재. 우리 동네에도 밤에는 산사람들이 살대끼 했어, 가만 봉께 총이나 칼 들고 다니는 사람이 따로 있고, 짐 짊어지는 사람들이 따로 있었어. 쌀도 가져가고 소금이랑 간장도 가져가고 따순 놈 있으면 다 가져가버리던 시상이여”

스무 살, 그녀의 죽음을 어떻게 전할까요?

죽음의 기운이 만연했던 시절, 명분도 없는 무모한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이 어리석은 상황 속에 내던져진 문수남, 그녀의 내면의 풍경은 어떠했을까요, 당시 밤골에 살았던 김정남(1938년생)씨가 전하는 스무살 그녀의 죽음을, 우리는 단지 그 기억 앞에 서서 그 속을 들여다보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요?

인민군 퇴각 후 빨치산이 활동하던 시기인 1950년 10월 이후, 장평이나 장동에 살던 사람들이 빨치산에 의해 그들의 주요 근거지인 유치면 산속으로 끌려가 희생당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장동면 밤실
장동면 밤실

 

대부분 마을에서 입산한 사람들에 의해서였는데 그들은 한동네의 사정을 다 꿰고 있었다. 장동면 밤실에서도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김해김씨 집성촌이던 밤실에 들어온 위씨, 정씨, 한씨, 임씨 등 타성받이였다.

그들은 대대로 마을에서 마름을 지내거나 머슴 노릇을 한 경우가 많았고 당시에도 땅을 가질 수 없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특히 위00은 완장을 차고 마을을 돌아다녔으며 그의 지시에 의해 마을사람들의 생과 사가 갈리었다.

한편, 장평면 임리에서 시집 와 장동면 밤실에 살고 있던 문수남(1930년생, 당시 20세)은 밤이 되면 두려움에 떨며 몸을 사리고 있었다. 산사람들이 내려와 쌀과 따순 옷들을 거둬갔고 행여 눈에 거슬리면 끌고 가 죽여 버려도 아무렇지도 않은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남편 김평식(1924년생, 당시 26세)을 포함한 집안의 남자들은 장동지서가 있는 마을로 피신해 있었다. 시아버지가 마을 구장을 하였고 집안대대로 쌀밥 먹었던 부유한 집안이라 빨치산의 표적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여자와 아이들에게까지 해꼬지 하겠나’ 하는 생각에 여자들과 아이들만 남아 집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아픈 가족사가 자꾸 떠오르는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1949년 2월 17일(음. 1.20) 장평면 임리에 살고 있던 친정아버지 문영기(1901년생)와 오빠 문형종(1927년생)이 빨치산에 의해 희생당했는데 이유는 단 하나, 마을의 유지였고 오빠가 경찰시험을 봤다는 것이 그들의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충격을 받은 어머니 정군심(1904년생) 또한 입이 돌아가 버려 고통 속에 사신 것을 옆에서 지켜봤던 그녀였다.

장동면 밤실_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김대현씨(문수남의 남편 김평식의 조카, 우측에서 두번째)
장동면 밤실_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김대현씨(문수남의 남편 김평식의 조카, 우측에서 두번째)

 

1950년 10월 어느 날 밤, 마을에 내려 온 빨치산은 집에 있던 문수남과 어린 딸인 김필순(1949년생, 당시 2세)을 포함하여 같은 마을에 살던 작은집 식구들까지 끌고 갔다.

남자들은 이미 피신해 버린 작은집 역시 여자와 아이들만 남아 있었다. 두 시간여를 걸어 유치면 보림사 인근에 도착하였을 때 문수남은 작은집 식구들을 몰래 보내기로 결심했다. 빨치산들이 잠시 쉬고 있던 틈을 노린 것이다.

유치면과 가까운 임리 출신이라 그곳 지리를 잘 알고 있었던 그녀는 빨치산의 눈을 피해 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며 도망을 재촉했고 그 덕에 작은집 식구들은 살아올 수 있었다.

뒤따라 오리라던 문수남은 어린 딸을 업은 채 남겨졌고 결국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뒤늦게 눈치 챈 빨치산들에게 잡혀 뒤따라 도망하려던 계획이 실패한 것이었다.

다음날 저녁, 문수남은 장평면 부정마을에 있는 당숙 집에 나타난다. 어린 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옷이 다 벗겨진 모습으로 빨치산의 손에 이끌린 채였다.

집안의 남자들을 찾으려고 혈안이 된 빨치산들에 의해 그런 치욕스런 모습으로 이 마을 저 마을 끌려 다닌 것이다. 당시 문수남은 키가 크고 예쁜 얼굴이었다.

유치면 보림사와 가지산_ 당시 빨치산의 근거지
유치면 보림사와 가지산_ 당시 빨치산의 근거지

 

그로부터 며칠 후, 빨치산 근거지였던 유치 보림사 인근 산속에서 문수남이 총살당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벌거벗겨진 채로 나무에 묶여 태워 죽였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이 소식을 들은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은 애통해 했지만 그 어느 누구도 시신 수습을 위해 유치 산속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장동지역이 완전히 수복되자 문수남의 남편 김평식은 밤실 집으로 돌아왔다. 문수남의 시신이라도 수습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유치 산속을 돌아다녔지만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 포기했다. 마을 뒷산에 가묘를 썼지만 지금은 멸실되어 그 흔적도 없다.

그 후 남편 김평식은 김00(1931년생)과 두 번째 결혼을 하였고, 첫 부인(문수남)과 함께 죽은 딸 김필순(당시 2세)을 그들의 호적에 올렸다.(제공:장흥문화공작소 역사문화기록팀/사진:마동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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