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조선인민군의 전투력이 어떻게 이렇듯 강할수가 있었을가?
icon 대부김원봉
icon 2019-06-26 07:36:50  |   icon 조회: 35031
첨부파일 : -
1950.6.25.


조선인민군의 전투력이 어떻게 이렇듯 강할수가 있었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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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전인 1950년 6월 25일, 조선반도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이 발생, 남북내전이 폭발되였다. 조선인민군은 단 3일만에 서울을 함락,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탄생된지 불과 4년밖에 안된 조선인민군의 전투력이 어떻게 이렇듯 강할수가 있었을가? 그 내면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있었을가?



동북에서의 조선족부대 결성과정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무조건항복을 선언, 화북항일근거지에서 팔로군과 어깨겯고 싸워온 조선의용군은 팔로군 주덕총사령관의 명령으로 동북으로 진출하는 팔로군을 따라 동북으로 나왔고 조선으로 진군하려 하였다. 하지만 당시 조선반도 북반부를 점령한 쏘련홍군은 “조선에 제2의 무장부대가 존재하는것을 불허한다”는 리유로 조선의용군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런 정세하에서 조선의용군 무정사령원은 심양의 오가황조선인학교에서 조선의용군군인대회를 소집하고 3천여명의 병력을 4개 지대로 편성하고 동북민주련군에 편입하도록 하였으며 자신은 80여명의 부하들만 이끌고 조선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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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군이 조선족집거지에 도착하자 조선족대중들은 “우리 군대가 왔다”며 열렬히 맞아주었고 참군열이 대단했다. 부자간, 형제간이 함께 참군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고 어떤 마을에서는 청년들 대부분이 집체로 참군하기도 하였다. 인구 100만의 조선족가운데서 주력부대에 참군한 인수만해도 6만명이상에 달했다.


제2차 국공내전시기 3개의 조선족사단과 기타부대에 편입된 조선족장병들은 전투에서 용맹을 떨쳐 수많은 전투영웅들이 배출, 몸으로 적의 또치카화구를 막아 부대의 진군로를 개척한 조성두영웅 등이 대표적이다. 흑산저격전에서 흑룡강성 오상지역의 조선족청년들로 구성된 8중대는 대부분전사들이 희생되는 대가로 국민당주력부대인 료요상병퇀의 연대이상병력의 거듭되는 진공을 막아내고 진지를 지켜내 “강철8중대”로 명명되였는데 그 중대가 지금도 이어져오고있다.



3개 조선족사단 입조 참전



1949년 패전을 거듭하던 국민당은 끝내 대륙에서 쫓겨나 대만으로 도망쳤다. 1949년 5월, 조선인민군 정치부 주임 김일이 김일성수상의 친필서한을 가지고 북경으로 와 모택동주석을 만났다. 김일성수상은 모택동주석께 중국인민해방군의 3개 조선족사단과 기타 부대에 있는 조선족장병들을 조선에 보내줄것을 청구, 모택동주석은 이를 허락하였다.


1949년 9월 20일, 164사단과 166사단이 전부의 장비를 가지고 조선으로 건너가 신의주에서 조선인민군복장을 갈아입고 조선인민군 제5사단과 제6사단으로 편성되였다. 원 164사단 부사단장인 김창덕이 제5사단장으로, 원 166사단 정치위원인 방호산이 제6사단장으로 임명되였다. 164사단은 조선으로 건너갈 때 병력이 10,821명에 달했고 166사단은 병력이 10,320명에 달했다. 1950년초, 제4야전군은 중앙군사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각 부대에 분산돼있던 조선족장병들을 하남성 정주에 집중시켜 독립15사단에 편입시켰다. 독립15사단은 조선에 건너간후 조선인민군 제12사단으로 편성되였는데 전우가 사단장에 임명되였다.



조선전쟁초기 조선인민군의 주력부대는 두개 군단으로 편성되였는데 제1군단장으로는 김웅, 제2군단장으로는 무정장군이 임명되였다. 제1군단장 김웅은 황포군관학교출신으로서 오랜 자격의 중공당원이다. 항일전쟁시기 신사군 22연대 참모장직을 담임했다. 1970년대 《동심결》이란 소설이 독자들에게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고 후에 영화로 개편되였는데 그 소설중의 조선족기병연대장 허철봉의 생활원형이 김웅이였다.
항일전쟁시기 중공군에서 지장(智將)으로 이름난 신사군 제3사단장 황극성의 수하에서 다년간 전투를 지휘해온 김웅은 전투경험이 로련한 고급지휘원이였다.



조선전쟁시기 조선인민군 제6사단으로 개편된 원 중국인민해방군 166사단은 선봉부대로 개성을 공략하고 강화도, 금포를 점령한후 계속 서해안을 따라 전라도의 목포, 광주, 순천을 공략하고 남해안을 에돌아 경상남도의 하동, 진주까지 점령하였다. 개성공략전투에서 방호산사단장은 출중한 전술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송악산정면에 1개 연대를 배치해 대방의 주의력을 끌게 한후 3.8선의 경의선철도를 비밀리에 보수해 다른 한개연대가 기차를 타고 개성역에 쳐들어가 돌연기습으로 개성을 함락시켰다.



조선인민군 제5사단으로 개편된 원 중국인민해방군 164사단은 조선인민군 12사단으로 개편된 원 중국인민해방군 독립15사단과 협동작전을 벌리며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진군, 7월말, 포항을 점령하였으며 한국군의 최정예부대인 수도사단을 부산지역에 포위하였다.


1950년 7월 23일, 조선 김일성수상은 명령을 반포해 김웅과 리한무 부대에 특별장을 수여하였으며 7월 26일과 8월 29일까지 조선 최고인민회의에서 7개 부대에 “근위”칭호를 수여하였는데 중국에서 건너간 조선족부대들인 제18련대, 제5사단, 제6사단, 제10련대가 이 칭호를 수여받았다. 방호산은 11월 15일, 공화국 쌍중영웅칭호를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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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직전 조선족들은 조선인민군 제4, 5, 6, 7(12)에 편입되어 38도선 최전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남진을 시작하여 전선의 최전방에서 공격형 전투부대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대남공격의 제1진 병력에서 조선의용군 사단병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히 높았다.



중국에서 건너간 병사들은 대부분 중국내전을 통하여 전쟁경험이 풍부하였기 때문에 전쟁 초기과정에서는 남한군과의 충돌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어려움 없이 남진한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특히 중국에서 제일 뒤늦게 입북하여 중국식 군대의 정체성으로 갈등을 빚어왔던 4사18연대는 서울에 제일 먼저 입성하고 미군부대를 연파하면서 ‘근위연대’ 칭호를 받을 만큼 화려한 전투경력을 자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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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참전 조선족, 그후 50년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류동수의 흑백사진과 비극의 주인공들


04.06.02

조호진(mindle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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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홍도(77) "1946년 4월 조선족과 중국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해 인민해방군에 자원 입대했다. 1949년 7월 북한인민군 6사단 3연대에 편입됐고 1950년 9월 국군에게 포로로 잡혀 거제도에 수용됐다. 1956년 9월 중국으로 귀국했으나 국군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이유로 모든 혜택을 받지 못하고 멸시와 홀대를 받으며 외롭고 고통스러운 젊은 날을 보냈다."


장수학(81) "독립운동에 가담한 아버님이 친일파의 신고로 1930년 4월 일본군에 붙잡혀 총살을 당했다. 1945년 복수를 결심하고 일본 패망 후 잔존해 있던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중국해방전쟁에 참전했으나 3개월 후 동생이 찾아와 장남이니 어머니를 모시라고 지휘관에게 사정을 설명한 후 왕청으로 전출되어 정찰병이 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 남한의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참전했으나 장남이라는 이유로 지원군 통역관 반장 임무를 수행했다."


원용걸 "중국해방전쟁에 참전한 뒤 북한 인민군에 편입됐다. 북한 인민군 정예부대요원으로 발탁돼 한국전쟁에 참전, 전쟁 후 북한지역 복구사업에 동원되기까지 8년 정도 있다가 고향에 돌아와서야 아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8년이란 세월 동안 부모님과 아들을 위해 헌신한 아내가 자랑스럽고 고마웠다. 지금 돌이켜 보면 한민족끼리 총을 겨누며 전쟁을 한 것이 매우 안타깝고, 많은 사람들을 죽였던 기억들로 인해 가슴이 아프다.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며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 남북한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최기성(73) "연길사범에 다니던 1946년 조선족과 중국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해 동북인민연군에 자원입대, 1950년 북한 인민군 중위로 참전해 대구-부산간 철도폭파 작전을 수행하던 도중 매복 국군에 기습을 받고 중상을 입었다. 전쟁이 끝난 뒤 남파간첩 교관으로 복무하다 1958년 중국으로 귀국했다. 몇 년 전, 한국을 방문해 전쟁 당시 싸웠던 곳을 찾아다니면서 말문이 막혔다. 적국이었던 남한은 잘사는 반면, 젊은 날 목숨을 바쳐 싸웠던 북한은 오늘날 굶주림과 가난으로 중국으로의 탈북자들이 늘고 있으니 가슴 아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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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운하 "참전하고 싶지 않았으나 당시 사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나갔다. 1951년 연길에서 조선족으로 구성된 중공 인민지원군에 입대했으며 이때 함께 참전한 마을동료 13명 중 12명이 전사했다. 강원도 금성에서 조선족 동료들과 함께 미군 3명을 생포해 3급 훈장을 받고 1954년 중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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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89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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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은 중국 공산당 혁명열사들이 묻히는 스징산루(石景山路) 바바오산혁명공묘(八寶山革命公墓)에 묻혀 있으며 비문에 그의 공적이 적혀 있다.


중·북 2개국 군가 독보적…김대중-김정일 정상회담때 ‘조선인민군행진곡’ 울려


중국 음악계는 정율성 음악가가 두 나라의 군가를 작곡한 것은 사상 유례가 없는 일로 평가한다. 정율성은 해방뒤 팔로군총부 6호의 명령에 따라 무정 사령관 통솔하의 조선의용대에 소속돼 가족이 1945년 조선으로 가게 된다.


김일성 주석이 1948년 2월 정율성 음악가에게 수여한 표창장으로 정율성 기념관에 비치되어 있으며 윗상단에 인공기가 아닌 태극기가 표시되어 있다. ⓒ하성봉



북한에서 정율성은 조선국가보안대(조선인민군 전신) 구락부(군 문화부 부장에 해당), 조선노동당 황해도선전부 부장, 조선인민군협주단 단장, 조선국립음악대학작곡부 부장 등을 역임했다.


이 기간중에 조선인민의 투쟁과 중조우의를 담은 <조선인민군행진곡> <중조우의> <조선해방행진곡> <두만강> <동해어부> 등을 작곡하게 된다. 특히 북한은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 때 평양 공항에 내린 김대중 대통령을 맞을 때 <조선인민군행진곡>을 연주했다. 북한은 1992년 대형예술영화 <음악가 정률성>을 출품하는 등 정율성에 대해 여전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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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99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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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일본패망 뒤에도 무장해제를 당하지 않았으며 '국민당' 정부와의 내전을 준비하고 있던 '중국공산당'은 '조선의용군'을 만주로 이동시켜 현지 '조선족'을 입대시켜 규모를 확장하여 후에 '국공'내전에 참전하여 '국민당군'과 싸우게 됩니다.


이들은 6.25 이전에 북한으로 이동되어 인민군의 최전방에서 남침의 선봉대 역할을 맡았다. '김일성'은 6.25 이전에 1950년에 두번에 걸쳐서 모택동에게 밀사를 보내어 조선족 부대의 파병요청을 한 것이 정설로 굳어져 있습니다
.


■ 김중생씨의, 증언입니다


'조선의용군'(조선족) 은 3년 동안 모두 10만명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고 증언합니다

또한,김중생씨는, 조선의용군의 밀입북과 6·25전쟁”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김씨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중국 각지에 흩어져 사는 '의용군'출신 퇴역군인 100여명을 수소문해 만났고, 중국과 국내에서 발표된 관련 논문과 저술을 통독했다고 합니다.



김씨는 이 책을 쓰면서 일본 패망 이후 만주로 집결했던 조선의용군이 850명이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그동안 학계에서 정설처럼 여겨져온 ‘400명’의 배가 넘는 규모다.
김중생씨 작업의 결실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6·25 전쟁에 참가했던 '조선의용군' 가운데 200여명의 명단을 최초로 정리해낸 것이었다.


그는 이들의 신상을


▷1945년과 46년 중국공산당의 지시로 두차례로 나눠 개별입북한 경우

▷1949년부터 2년간 부대를 인솔하고 입북한 경우

▷휴전후 중국으로 돌아온 경우

▷입북하지 않고 중국에 남아 있던 경우 등으로 구분해 정리.




'김중생'씨는.참전 '조선의용군'의 주요 지휘관들의 출생년도 등 개인 신상은 물론 의용군 시절 및 북한 입국 전후의 행적 등도 상세히 밝혀냈으며, 이처럼 꼼꼼한 조사결과를 토대로 김씨는 “6·25 개전 초기 북한 인민군의 주력부대였던 21개 연대 가운데 47%가 만주에서 건너온 조선족으로 채워져 있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김중생'씨는 6·25전쟁에 참여한 전체 조선족 규모를 10만명 안팎으로 추산하고, 이 가운데 개전 이전에 북한으로 건너간 경우가 '6만5,000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북한은 전쟁중이던 1950년 겨울부터 이듬해에 걸쳐 '인민군' 총참모본부 군사동원국 소속 장교들이 중국 현지로 건너가 '조선족들'을 상대로 모병(募兵)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김중생'씨는 관련 당사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이때 하얼빈·옌지(延吉)·무단장(牧丹江) 등에서 ‘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인민군에 입대한 조선족이 1만명 안팎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고, 유엔군 참전으로 북한군이 수세에 몰리자 중공군이 개입하기에 이른다. 중공군은 한꺼번에 수십개 사단을 전선에 내보냈다가 병력 손실이 발생하면 새로운 부대로 교체하는 방법으로, '한국전쟁' 기간 동안 총 108개 사단 규모의 병력을 북한으로 보냈다.


이때 참전한 '중공군은' 조선족이 아닌 한족(漢族)이었기 때문에, 북한으로 배치될 때 반드시 조선족 통역요원이 동행했다고 한다. 1개 사단에 150명 정도의 통역이 배치된 것으로 추산하면 '중공군'을 따라 참전한 통역요원만도 2만5,000명이나 된다. 때문에 3년여에 걸친 한국전쟁중 북한에서 활동한 전체 조선족의 규모는 10만명에 달하리라는 것이 김중생씨의 분석이다.


관련자료와 퇴역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집계해낸 이같은 자료를 종합하고 김중생씨가 내린 결론은 '조선의용군'이 밀입북하지 않았더라면, 6·25 전쟁은 아예 없었거나 있었다 하더라도 상당기간 뒤로 미뤄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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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공군으로 넘어간 80%의 조선의용대 출신들이 조선의용군이 됐고, 이들이 6.25 남침 당시 북한 인민군 주력부대로 ........ ]



[따져보니] 김원봉이 국군 뿌리? 광복군 상황 어땠나



등록 2019.06.07

정치부 강동원 기자



[앵커]

이렇듯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언급한 김원봉을 둘러싼 논란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문 대통령의 말 처럼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면서 독립운동 역량을 집결할 수 있었는지, 또 그 광복군이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됐는지 따져보겠습니다.

강동원 기자. 문 대통령의 말대로라면, 이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하면서 독립운동 역량을 집결했다는 거죠?



[기자]

그렇습니다. 그런데 당시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조금 사실과 다릅니다. 공산주의자였던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는 2년동안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해온 좌파 단체였는데요. 중국의 국공합작에 균열이 생기면서 의용대의 80%의 병력이 중국 공산당에 합류해버리는 일이 벌어졌죠. 결국 20%의 병력과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이 재정 지원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 단일화 하겠다고 하자 할 수 없이 광복군에 합류한겁니다.


그런데 조선의용대와 광복군의 정치적 성향이 반대이기 때문에 쭉 대립했었고요. 이내용은 백범일지에 "김원봉이 임시정부 취소운동을 맹렬히 전개했다" 라는 등으로 기술이 돼있죠.



[앵커]
그럼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실제로 어떻습니까?



[기자]

조선의용대는 광복군의 1지대로 편입됐죠. 그런데 기존의 광복군에 비해 병력도 크게 모자랐고 주축도 2,3지대 였습니다. 광복군이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된건 맞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편입된 조선의용대 출신이 아닌 기존 광복군 출신 인물들이 국군의 뿌리가 됐죠.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을 지낸 이범석 전 총리역시 김원봉과 대립하던 기존 광복군 출신이었습니다.


[앵커]

오히려 조선의용대가 북한군 창설에 힘이 됐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건 무슨 얘깁니까?

[기자]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중공군으로 넘어간 80%의 조선의용대 출신들이 조선의용군이 됐고, 이들이 6.25 남침 당시 북한 인민군 주력부대로 발전됐다고 일부 서적에 기술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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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6/07/2019060790094.html








노동당 만세 대한민국 타도 민전 투사 인민군의 뿌리 김원봉 찬양의 함성이 대한민국을 삼키고 있읍니다.



대한민국의 명운이 바람앞의 촛불입니다.
2019-06-26 07:36:50
211.169.1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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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한 2021-12-20 01:23:50
작심삼일이 되지 않도록 결심이 무너지려 할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마음을 다스리는 글을 모아봤습니다.

마음이 약해질 때 마다 짧고 좋은 명언들을 꺼내서 읽어보면서, 각오를 다시 잡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충분한 재물이 없는 것이 아니라, 충분하다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언제나 부족한 것이다


행동이 감정을 따르는 것 같지만 행동과 감정은 병행한다

따라서 우리의 의지보다 직접적인 통제하에 있는 행동을 조정함으로써 우리는 의지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있지 않은 감정을

간접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

만일 유쾌한 상태가 아니더라도

기분을 쾌하게 만드는 최상의 방법은

유쾌한 마음을 갖고 이미 유쾌해진 것처럼 행동하고 일하는 것이다

- 윌리엄 제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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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한 2021-12-19 09:17:42
작심삼일이 되지 않도록 결심이 무너지려 할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마음을 다스리는 글을 모아봤습니다.

마음이 약해질 때 마다 짧고 좋은 명언들을 꺼내서 읽어보면서, 각오를 다시 잡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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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우리의 의지보다 직접적인 통제하에 있는 행동을 조정함으로써 우리는 의지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있지 않은 감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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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한 2021-12-19 00: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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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약해질 때 마다 짧고 좋은 명언들을 꺼내서 읽어보면서, 각오를 다시 잡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충분한 재물이 없는 것이 아니라, 충분하다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언제나 부족한 것이다


행동이 감정을 따르는 것 같지만 행동과 감정은 병행한다

따라서 우리의 의지보다 직접적인 통제하에 있는 행동을 조정함으로써 우리는 의지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있지 않은 감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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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한 2021-12-18 15:4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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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약해질 때 마다 짧고 좋은 명언들을 꺼내서 읽어보면서, 각오를 다시 잡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충분한 재물이 없는 것이 아니라, 충분하다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언제나 부족한 것이다


행동이 감정을 따르는 것 같지만 행동과 감정은 병행한다

따라서 우리의 의지보다 직접적인 통제하에 있는 행동을 조정함으로써 우리는 의지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있지 않은 감정을

간접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

만일 유쾌한 상태가 아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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