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공산주의자들과는 아무 것도 더불어 함께 할 수 없다
icon 김구
icon 2019-06-26 01:35:05  |   icon 조회: 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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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약산(金若山)이 돌연히 탈퇴 ..... 당의 간부들과 그가 거느리는 청년의용대가 아무리 하여도 공산주의를 버릴 수 없으니 .......




[ ..... "공산주의자들과는 아무 것도 더불어 함께 할 수 없다" ....... ]



[ ......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도 가장 철저한 것 .... 위반하는 자는 죽음의 숙청 .......

...... 그런 큰 인류의 불행은 없을 것이다. ....... ]




백범 김구와 공산주의

李東馥이 젊은세대와 나누고 싶은 대화(1)



200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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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백범은 ´임시정부´를 이끄는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너무나도 괴로움을 당한 나머지 "공산주의자들과는 아무 것도 더불어 함께 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같은 백범의 생각은 <백범일지>(서울; 범우사, 2002.8.5, 3판3쇄)의 관련 대목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음은 그 인용이다.



『기미년, 즉 대한민국 원년에는 국내나 국외를 막론하고 정신이 일치하여 민족 독립운동으로만 진전되었으나 당시 세계 사조의 영향을 따라서 우리 중에도 점차로 봉건이니, 무산혁명이니 하는 말을 하는 자가 생겨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선에도 사상의 분열,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임시정부 직원 중에도 민족주의니, 공산주의니 하여 음으로 양으로 투쟁이 개시되었다. 심지어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가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이에 반하여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은 데모크라시를 주장하여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고 대립과 충돌을 보는 기괴한 현상이 중생첩출하였다. 예하면, 국무회의에서는 러시아에 보내는 대표로 여운형(呂運亨), 안공근(安恭根), 한형권(韓亨權) 세 사람을 임명하였건마는, 정작 여비가 손에 들어오매 이동휘는 제 심복인 한형권 한 사람만을 몰래 떠나 보내고 한이 시베리아를 떠났을 때쯤 하여 이 것을 발표하였다. 이동휘는 본래 강화진위대참령으로서 군대 해산 후에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이름을 대자유(大自由)라고 행세한 일도 있다.



하루는 이동휘가 내게 공원에 산보하기를 청하기로 따라갔더니, 조용한 말로 자기를 도와달라 하기로 나는 좀 불쾌하여서 내가 경무국장으로 국무총리를 호위하는 데 내 직책에 무슨 불찰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 씨는 손을 흔들며, "그런 것이 아니라, 대저 혁명이라는 것은 피를 흘리는 사업인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니 이대로 독립을 하더라도 다시 공산주의 혁명을 하여야 하겠은 즉 두 번 피를 흘림이 우리 민족의 대불행이 아닌가, 그러니 적은이(아우님이라는 뜻이니 이동휘가 수하동지들에게 즐겨 쓰는 말)도 나와 같이 공산혁명을 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내 의향을 묻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이 씨에게,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 데는 ´제3국제공산당´의 지휘와 명령을 안 받고도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이 씨는 고개를 흔들며, "안 되지요" 한다. 나는 강경한 어조로, "우리 독립운동은 우리 대한민족 독자의 운동이요, 어느 제3자의 지도나 명령에 지배되는 것은 남에게 의존하는 것이니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반되오. 총리가 이런 말씀을 하심은 대불가(大不可)니 나는 선생의 지도를 받을 수가 없고, 또 선생께 자중하시기를 권고하오" 하였더니 이동휘는 불만한 낯으로 돌아갔다.


이 총리가 몰래 보낸 한형권이 러시아 국경 안에 들어서서 우리 정부의 대표로 온 사명을 국경 관리에게 말하였더니 이 것이 모스크바 정부에 보고되어, 그 명령으로 각 철도 정거장에는 재류 한인 동포들이 태극기를 두르고 크게 환영하였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여서는 러시아 최고 수령 레닌이 친히 한형권을 만났다. 레닌이 독립운동 자금은 얼마나 필요하냐 하고 묻는 말에 한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200만 루블이라 대답한 즉 레닌이 웃으며, "일본을 대항하는 데 200만 루블로 족하겠는가?" 하고 반문하므로 한은 너무 적게 부른 것을 후회하면서 본국과 미국에 있는 동포들이 자금을 마련하니 당장 그 만큼이면 된다고 변명하였다. 레닌은, "제 민족의 일은 제가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고 곧 외교부에 명하여 200만 루블을 한국 임시정부에 지불하게 하니 한형권은 그 중에서 1차분으로 40만 루블을 가지고 모스크바를 떠났다.



이동휘는 한형권이 돈을 가지고 떠났다는 기별을 받자 국무원에는 알리지 아니하고 또 몰래 비서장이요, 자기의 심복인 김립(金立)을 시베리아로 마중 보내어 그 돈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고 직접 자기 손에 받으려 하였으나, 김립은 또 제 속이 따로 있어서 그 돈으로 우선 자기 가족을 위하여 북간도에 토지를 매수하고 상해에 돌아와서도 비밀히 숨어서 광동 여자를 첩으로 들이고 호화롭게 향락 생활을 시작하였다. 임시정부에서 이동휘에게 그 죄를 물으니 그는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러시아로 도망하여 버렸다.



한형권은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통일운동의 자금이라 칭하고 20만 루블을 더 얻어 가지고 몰래 상해에 돌아와 공산당 무리들에게는 돈을 뿌려서 소위 국민대표대회라는 것을 소집하였다. 그러나 공산당도 하나가 못 되고 세 파로 갈렸으니 하나는 이동휘를 수령으로 하는 상해파요, 다음은 안병찬(安秉贊)·여운형을 두목으로 하는 일쿠츠크파요, 그리고 셋째는 일본에 유학하는 학생으로 조직되어 일인 복본화부(福本和夫)의 지도를 받은 김준연(金俊淵) 등의 엠엘(ML)당파였다. 엠엘당은 상해에서는 미미하였으나 만주에서는 가장 맹렬히 활동하였다.



있을 것은 다 있어서 공산당 외에 무정부당까지 생겼으니 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丁奎) 두 형제와 유자명(柳子明) 등은 상해, 천진 등지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의 맹장들이었다.
한형권의 붉은 돈 20만 원으로 상해에 개최된 국민대회라는 것은 참으로 잡동사니회라는 것이 옳을 것이었다. 일본, 조선, 중국, 아령 각처에서 무슨 단체 대표, 무슨 단체 대표 하는 형형색색의 명칭으로 200여 대표가 모여 들었는데. 그 중에서 일쿠츠크파, 상해파 두 공산당이 민족주의자인 다른 대표들을 서로 경쟁적으로 끌고 쫓고 하여 일쿠츠크파는 창조론, 상해파는 개조론을 주장하였다. 창조론이란 것은 지금 있는 정부를 해소하고 새로 정부를 조직하자는 것이요, 개조론이라는 것은 현재의 정부를 그냥 두고 개조만 하는 것이었다. 이 두 파는 암만 싸워도 귀일이 못 되어서 소위 국민대표회는 필경 분열되고 말았고, 이에 창조파에서는 제 주장대로 ´한국정부´라는 것을 ´창조´하여 본래 정부의 외무총장인 김규식(金奎植)이 그 수반이 되어서 이 ´한국정부´를 끌고 해삼위로 가서 러시아에 출품하였으나, 모스크바가 돌아보지도 아니하므로 계불입량(計不入量)하여 흐지부지 쓰러지고 말았다.



이 공산당 두 파의 싸움 통에 순진한 독립운동자들까지도 창조니 개조니 하는 공산당 양파의 언어 모략에 현혹하여 시국이 요란하므로 당시 내무총장이던 나는 국민대표회에 대하여 해산을 명하였다. 이 것으로 붉은 돈이 일으킨 한 막의 희비극이 끝을 맺고 시국은 안정되었다. 이와 전후하여 임시정부 공금 횡령범 김립은 오면직(吳冕稙)·노종균(盧宗均) 두 청년에게 총살을 당하니 인심이 쾌하다 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한형권의 러시아에 대한 대표권을 파면하고 안공근을 대신 보내었으나 효과가 없어서 임시정부와 러시아와의 외교 관계는 이내 끊어지고 말았다.




상해에 남아 있는 공산당원들은 국민대표대회가 실패한 뒤에도 좌우 통일이라는 미명으로 민족운동자들을 달래어 지금까지 하여 오던 민족적 독립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자고 떠들었다. ´재중국 청년동맹´, ´주중국 청년동맹´이라는 두 파 공산당의 별동대로 상해에 있는 우리 청년들을 쟁탈하면서 같은 소리를 하였다. 민족주의자가 통일하여서 공산혁명 운동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또 한 희극이 생겼다. "식민지에서는 사회운동보다 민족독립운동을 먼저 하여라" 하는 레닌의 새로운 지령이었다. 이에 어제까지 공산주의자였던 사람들이 민족독립운동자로 돌변하여 민족독립이 공산당의 당시(黨是)라고 부르짖었다. 공산당이 이렇게 되면 민족주의자도 그들을 배척한 이유가 없어졌으므로 ´유일독립당 촉성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입으로 하는 말만 고쳤을 뿐이요, 속은 그대로 있어서 민족운동이란 미명하에 민족주의자들을 끌어넣고는 그들의 헤게모니(주도권)로 이를 옭아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민족주의자들도 그들의 모략이나 전술을 다 알아서 그들의 손에 쥐어지지 아니하므로 자기네가 설도하여 만들어 놓은 ´유일독립당 촉성회´를 자기네 음모로 깨뜨려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생긴 것이 ´한국독립당´이니 이 것은 순전한 민족주의자의 단체여서 이동녕(李東寧)·안창호(安昌浩)·조완구(趙琬九)·이유필(李裕弼)·차이석(車利錫)·김붕준(金朋濬)·송병조(宋秉祚) 및 내가 수뇌가 되어 조직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민족운동자와 공산주의자가 다른 조직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민족주의자가 단결하게 되매 공산주의자들은 상해에서 할 일을 잃고 남북 만주로 달아났다. 거기에는 아직 동포들의 민족주의적 단결이 분산, 박약하고 또 공산주의의 정체에 대한 인식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상해에서보다 더 맹렬하게 날뛸 수가 있었다.


예를 들면 이상룡(李尙龍)의 자손은 공산주의에 충실한 나머지 ´살부회(殺父會: 아비를 죽이는 회)´까지 조직하였다. 그러나 제 아비를 제 손으로 죽이지 않고 회원끼리 서로 아비를 바꾸어 죽이는 것이라 하니 아직도 사람의 마음이 조금은 남은 것이었다. 이 붉은 무리는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신민부´·´참의부´·´남군정서´·´북군정서´ 등에 스며들어가 능란한 모략으로 내부로부터 분해시키고 상극을 시켜 이 모든 기관을 혹은 붕괴하게 하고 혹은 서로 싸워서 여지없이 파괴하여 버리고 동포끼리 많은 피를 흘리게 하니, 백광운(白狂雲)·김좌진(金佐鎭)·김규식(나중에 박사가 된 김규식은 아니다) 등 우리 운동에 없어서는 안 될 큰 일꾼들이 이 통에 아까운 희생이 되고 말았다.



국제정세의 우리에 대한 냉담, 일본의 압박 등으로 민족의 독립사상이 날로 감쇄하던 중에 공산주의자의 교란으로 민족전선은 분열에서 혼란으로, 혼란에서 궤멸로 굴러 떨어져 갈 뿐이었는데, 엎친 데 덮치기로 만주의 주인이라 할 장작림(張作霖)이 일본의 꾀에 넘어가서 그의 치하에 있는 독립운동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일본에 넘기고, 심지어는 중국 백성들이 한인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가서 왜 영사관에서 1개에 많으면 10원, 적으면 3, 4원의 상금을 받게 되고, 나중에는 우리 동포 중에도 독립군의 소재를 밀고하는 일까지 생겼으니, 여기는 독립운동자들이 통일이 없이 셋, 다섯으로 갈라져서 재물, 기타로 동포에게 귀찮음을 준 책임도 없지 아니하다. 이러하던 끝에 왜가 만주를 점령하여, 소위 만주국이란 것을 만드니 우리 운동의 최대 근거지라 할 만주에 있어서의 위 운동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


애초에 만주에 있던 독립운동단체는 다 임시정부를 추대하였으나 차차로 군웅할거의 폐풍이 생겨, ´정의부´와 ´신민부´가 우선 임시정부의 절제를 안 받게 되었다. 그러나 ´참의부´만은 끝까지 임시정부에 대한 의리를 지키더니 이 셋이 합하여 새로 ´정의부´가 된 뒤에는 아주 임시정부와는 관계를 끊고 자기들끼리도 사분오열하여 서로 제 살을 깎고 있다가 마침내 공산당으로 하여 서로 제 목숨을 끊는 비극을 연출하고 막을 내리고 말았으니 진실로 슬픈 일이다.』[229-236쪽]



『이 때에 ´대일전선 통일동맹´이란 것이 발동하여 또 통일론이 일어났다. 김원봉(金元鳳)이 내게 특별히 만나기를 청하기로 어느 날 진회에서 만났더니 그는 자기도 통일운동에 참가하겠은 즉 나더러도 참가하라는 것이었다. 그가 이 운동에 참가하는 등 동기는 통일이 목적인 것보다도 중국인에게 김원봉은 공산당이라는 혐의를 면하기 위함이라 하기로 나는 통일은 좋으나 그런 한 이불 속에서 딴 꿈을 꾸려는(同床異夢) 통일운동에 참가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264쪽]



『노구교 사건이 일어나자 중국은 일본에 대하여 항전을 개시하였다. 이에 재류한인의 인심도 매우 불안하게 되어서 5당통일로 되었던 민족혁명당이 쪽쪽이 분열되어 조선혁명당이 새로 생기고, 미주대한독립단은 탈퇴하고 근본 의열단 분자만이 민족혁명당의 이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분열된 원인은 의열단 분자가 민족운동의 가면으로 쓰고 속으로는 공산주의를 실행하기 때문이었다.』 [266-267쪽]



『그러나 여기 의외의 고장이 생겼으니 그 것은 국민당 간부들이 연합으로 하는 통일은 좋으나 있던 당을 해산하고 공산주의자들을 합한 단일당을 조직하는 데는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주의가 서로 다른 자는 도저히 한 조직체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회의가 진행됨에 따라 민족운동 편으로 대세가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해방동맹과 전위동맹은 민족운동을 위하여 공산주의 조직을 해체할 수 없다고 말하고 퇴석하였다. 이에 좌유 5당의 통일이 성공하였으므로 며칠을 쉬고 있던 차에 이미 해산하였을 민족혁명당 대표 김약산(金若山)이 돌연히 탈퇴를 선언하였으니, 그 이유는 당의 간부들과 그가 거느리는 청년의용대가 아무리 하여도 공산주의를 버릴 수 없으니 만일 8개조의 협정을 수정하지 아니하면 그들이 다 달아나겠다는 것이었다.』 [279-280쪽]



혹자는 위에 인용된 대목들에 담겨진 백범의 생각은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던 때의 일이고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귀국한 뒤에는 바뀌었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음에 인용하는 <백범일지>의 다른 대목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위에 인용된 대목은 <백범일지>의 ´하권´에서 인용한 것으로 이 ´하권´은 백범이 아직 중경에 있을 때 기술한 것이 맞다. 그러나 다음에 인용하는 대목이 포함된 ´나의 소원´은 백범이 중국으로부터 귀국한 뒤에 기술하여 1947년 11월에 발표한 글이다. 이 대목에 담겨져 있는 공산주의관을 소지한 백범이 그로부터 불과 5개월 이후인 1948년 4월 평양에 가서 북한공산주의자들의 ´수령´이었던 김일성에게 북한이 ´주장´하는 얘기를 과연 했을 수 있을 것인가. 필자는 이 나라 젊은 세대가 현혹되어서는 아니 되겠다는 생각에서 다음의 대목들을 인용한다. 범우사판 <백범일지>의 ´(나의) 정치이념´ 가운데 몇 토막이다. 특히 젊은이들이 읽기를 권한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한 개인 또는 한 계급에서 온다. 한 개인에게서 오는 것을 ´전체´ 또는 ´독재´라 하고 한 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며 통칭 ´파쇼´라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독재´의 나라에서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국민은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독재´다. 군주나 기타 개인독재자의 ´독재´는 그 개인만 제거되면 그만이거니와 다수의 개인으로 조직된 한 ´계급´이 ´독재´의 주체일 때에는 이 것을 제거하기는 심히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독재´는 그보다도 큰 조직의 힘이거나 국제적 압력이 아니고는 깨뜨리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나라의 양반정치도 일종의 ´계급독재´이거니와 이 것은 수백 년 계속되었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일의 ´나치스´의 일은 누구나 다 아는 일


그러나 모든 ´계급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독재´다. 수백 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독재´는 유교, 그 중에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학문·사회생활·가정생활·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다. 이 독재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된 것이었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 경제, 산업에까지 미쳤다.


우리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 있었다. 왜 그런고 하면 국민의 머리 속에 아무리 좋은 사상과 경륜이 생기더라도 그가 집권 계급의 사람이 아닌 이상, 또 그 것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범주밖에 나지 않는 이상, 세상에 발표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싹이 트려다가 눌려죽은 세 사상, 싹도 트지 못하고 밟혀버린 경륜이 얼마나 많았을까. 언론의 자유가 어떻게나 중요한 것임을 통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


지금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 즉 헤겔에게서 받은 변증법,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 이 두 가지와 스미스의 노동가치론을 가미한 마르크스의 학설을 최후의 것으로 믿어, 공산당과 소련의 법률과 군대와 경찰의 힘을 한데 모아서 마르크스의 학설에 일점 일획이라도 반대는 고사하고 비판만 하는 것도 엄금하여 이에 위반하는 자는 죽음의 숙청으로써 대하니 이는 옛날의 조선의 사문난적에 대한 것 이상이다.


만일 이러한 정치가 세계에 퍼진다면 전 인류의 사상을 마르크스주의 하나로 통일될 법도 하거니와 설사 그렇게 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그 것이 불행히 잘못된 이론일진대, 그런 큰 인류의 불행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학설의 기초인 헤겔의 변증법의 이론이란 것이 이미 여러 학자의 비판으로 말미암아 전면적 진리가 아닌 것이 알려지지 아니하였는가. 자연계의 변천이 변증법에 의하지 아니 함은 뉴턴, 아인슈타인 등 모든 과학자들의 학설을 보아서 분명하다.』[306-308쪽]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상임] http://www.dblee2000.pe.kr/

http://www.independent.co.kr/news/n_view.html?kind=main&id=4135








[ ...... 남북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로 .... 공산당이 침입 .......

...... 파괴 훼손하고 인명을 살해 .......

...... 白狂雲, 鄭一雨, 金佐鎭, 金奎植 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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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2월25일에 사망한 임시의정원 의장 宋秉祚의 이야기를 적고 있고 「自引言」이 1942년 3월22일의 중국 입법원장 손과의 연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본문의 탈고시점은 1942년 2월 말에서 3월 중순 사이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白凡逸志」 下卷을 집필


「백범일지」 하권은 金九가 1919년 4월에 상해에 도착하여 경무국장으로 일하기 시작할 때부터 임시정부를 중경으로 옮기고 광복군을 창설할 때까지의 사실을 기술했다. 따라서 서술내용도 상권의 그것과 중복되는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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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産主義者들과의 대결로 일관해



이처럼 「백범일지」 하권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金九 자신의 활동과 함께 주변 인물들의 행적에 관해서도 비교적 상세히 기술한 독립운동사의 성격이 짙은 회고록이다. 金九는 평생을 항일운동에 헌신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과의 대결로 일관했다.



따라서 「백범일지」 하권에서는 독립운동사에 대한 金九 자신의 입장을 확실하게 표명하고 있다. 임시정부 수립 초창기부터 격심하게 대립해 왔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이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곁들여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경무국장 시절에 국무총리 李東輝가 같이 공산주의운동을 하자고 권유하는 것을 크게 나무라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논쟁을 벌인 일들도 상권에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20여 년이 지나서 쓰는 하권에서 자세히 적었다. 그 뒤의 일들도 마찬가지였다.



상해 독립운동자들의 좌우합작운동이었던 1923년의 國民代表大會나 뒤이은 한국유일당운동, 1930년대의 좌우익진영의 협동전선운동과 朝鮮民族革命黨 결성 등에 대해 반대 입장을 취했고, 1940년대에 들어서도 중국 정부의 강력한 통합종용에도 불구하고 金元鳳이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에 임시정부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반대한 일 등을 솔직하게 적고 있다. 공산주의에 대한 金九의 이러한 인식과 대응은 李承晩의 그것과 일치하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만주지역의 무장독립운동이 분열하게 된 근본 원인도 공산주의자들의 책동 때문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공산당들은 상해의 민족운동자들이 자기의 수단에 농락되지 않음을 깨닫고 남북 만주로 진출해서, 상해에서보다 십백 배 더 맹렬하게 활동하였다. 李相龍의 자손은 殺父會까지 조직하고 있었다. 살부회에서도 체면을 생각해서인지 회원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아비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너는 내 아비를 죽이고 나는 네 아비를 죽이는 것이 규칙이라 하였다.


남북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로 正義府, 新民府, 參議府 외에 南軍政署, 北軍政署 등 각 기관에 공산당이 침입하여 각 기관을 여지없이 파괴 훼손하고 인명을 살해하였다. 白狂雲, 鄭一雨, 金佐鎭, 金奎植 등 우리 운동계에 다시없는 건강한 장군들을 다 잃어버렸고, 그로 인하여 내외지 동포의 독립사상이 날로 미약해져 갔다.〉31)



여기서 언급한 金奎植은 조선민족혁명당의 김규식과는 동명이인으로서 청산리 전투에도 참가했던 만주 무장단체의 지휘관이었다. 그리고 金九가 말한 공산주의 테러리스트 집단인 살부회의 존재를 확인할 만한 다른 자료는 발견되지 않는다.


金九는 만주지역의 무장단체들과 임시정부의 관계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 것도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의 알력 때문이었다고 적었다.



〈동북 3성[만주]의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와 임시정부의 관계는 어떠하였던가. 임시정부가 처음 조직되었을 때에 3부는 임시정부를 최고기관으로 인정하고 추대하였다. 그러나 그 뒤 3부가 점차 할거하여 군정과 민정을 합작하지 않고 세력을 다투어 서로 전쟁까지 하였다. 『스스로 업신여기면 다른 사람도 나를 업신여기게 된다』 함은 바로 이를 가리킨 격언이라 할 수 있다.…


종전의 정의, 참의, 신민 3부 중 참의부는 임시정부를 시종일관 옹호 추대하였다. 그런데 3부가 통일하여 정의부로 되자 서로 짓밟아 종막을 고하게 된 데에는 공산당과 민족당의 충돌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공산진영이나 민족진영의 말로는 같은 운명으로 귀결되었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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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孫世一의 비교 評傳 - 이승만과 김구
64. 『나는 李承晩입니다!』― 短波방송으로 破壞공작 선동







1939


[ ...... 20년래의 한인분쟁은 모두 다 공산당의 장난에서 비롯 .........

...... 가지가지 명의를 빌려 전후방으로 스며들어 술책을 .......

...... 우리의 운동은 민족주의냐 공산주의냐 하는 양대 주의의 분기점에 .......

...... 三韓半島가 장차 붉은색으로 물드는 것을 어떻게 참을 수 있을지 ........ ]




연재 孫世一의 비교 評傳 - 이승만과 김구

59. 韓國光復軍 창설하고 重慶임시정부 主席이 되다



金九와 金元鳳의 「公開信」을 실현하기 위한 「韓國革命運動統一七團體會議」가 1939년 8월27일에 江에서 열렸다. 그러나 두 共産主義者團體가 곧 탈퇴하고, 계속된 5黨會議도 土地國有化정책과 臨時政府문제로 의견이 대립되다가 결렬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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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九 자신은 정당통합운동이 실패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의 책동 때문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리하여 기강에서 7당 통일회의를 개최하였다.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은 광복진선 소속의 원동지역 3당이며,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민족전위동맹·조선혁명자연맹 등 4개 단체는 민족전선연맹 소속이다. 개회 후 대다수 쟁점이 단일화되는 것을 간파한 해방, 전위 양 동맹은 자기 단체가 해소되기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설명하고 퇴장해 버렸다. 양 동맹은 공산주의 단체이므로 민족운동을 위하여 자기 단체를 희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이전부터 주장하던 터이니, 크게 놀라거나 괴이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이에 곧장 5당 통일의 순서를 밟아 순전한 민족주의적 신당을 조직하여 각 당 수석 대표들이 8개조의 협정에 친필 서명하고 며칠간의 휴식에 들어갔다. 그런데 민족혁명당 대표 金若山[김원봉] 등이 갑자기 『통일문제 제창 이래로 순전히 민족운동을 역설하였으나, 민족혁명당 간부는 물론이고 의용대원들까지도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터에 지금 8개조를 고치지 않고 단일조직을 결성하면 청년들이 전부 도주케 되니 탈퇴한다』고 주장하여 결국 통일회의는 파열되었다.〉10)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金九의 배신감은 통합회의가 결렬된 뒤에 국민당 중앙당부의 서은증에게 보낸 편지에도 잘 드러나 있다. 이 편지에서 金九는 노골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을 비판했다. 金九는 먼저 중국국민당 관계자들이 한인독립운동의 분열이 내부 갈등 때문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선입견이라고 말하고, 20년 동안 지속되어 온 한국독립운동자들의 분열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공산당의 방해공작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三韓半島가 붉은색으로 물드는 것을 어떻게 참을 수 있을지…』



〈20년래의 한인분쟁은 모두 다 공산당의 장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들은 때로는 단독으로, 때로는 연합으로 온갖 방법을 다하여 민족운동의 역량을 삭감하였습니다.

중국이 당의 숙청을 개시한 이래로 그들은 관내 각지에서 감히 공공연하게 비법적이고 무리한 방법으로 질서를 교란하지는 못하였으나, 동북방면에서 독염을 토하여 살인 방화하며 못 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중국이 7·7사변[노구교사건]으로 항전을 개시하고 국공합작을 한 이래로 그들은 편승할 기회라고 생각하고 가지가지 명의를 빌려 전후방으로 스며들어 술책을 부렸습니다. 그러나 중국국민당이 민족운동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자 그들은 모든 것을 독단하여 처리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우리 민족운동자들이 힘을 키우는 것을 극히 꺼리어 통일이라는 미명 아래 민족운동의 대두를 파괴하려고 동분서주하면서, 마치 광복운동에 성의가 있는 듯이 행동했습니다. 기실은 그들의 마음속에 언제 조국이 있었겠습니까. 그 결과로 7당과 5당의 통일을 파괴시킨 것입니다.


오늘에 이르러 우리의 운동은 민족주의냐 공산주의냐 하는 양대 주의의 분기점에 서 있어서 바둑 한 알을 잘못 놓으면 대국을 잃고 말 것입니다. (국민당)중앙에서 확실하게 민족운동자를 도와주시면 일체 공작은 모두 주동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고, 그러면 그들은 속임수를 부릴 수 없게 되며, 항일공작도 저절로 일치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대등한 방법으로 통일을 조성하려 하거나 또는 그밖의 원조를 한다면 우리의 전도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고, 통일운운 하는 것은 더욱 멀어질 것입니다.…〉



金九는 한국독립운동이 분열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이데올로기 대립이라고 설명하고, 만약 지금과 같은 좋은 기회를 놓치면 장차 한반도가 붉은색으로 물들게 될지 모른다면서 국민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호소했다.


〈총괄하여 말한다면 한인의 분규는 완전히 주의의 대립에 기인한 것이지 결코 어떤 선입견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중국이 항일전을 한 지가 이미 2년 반이 지났으나 우리는 이에 대하여 전혀 공헌한 것이 없으므로 부끄러워서 죽을 지경입니다. 만일 또다시 시일을 천연하고 앉아서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를 잃는다면, 그것은 비단 역대 조상과 후세 자손에게 빚지는 일이 될 뿐만 아니라 三韓半島가 장차 붉은색으로 물드는 것을 어떻게 참을 수 있을지, 생각하면 전율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간곡히 기원하건대 양찰하시고 먼저 드린 말씀을 통촉하시어 조속히 구제해 주심으로써 민족운동이 중도에서 정지되어 또다시 좌절되는 일이 없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11)



이처럼 金九는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을 동등하게 대우하면서 통일만 요구하는 국민정부의 정책이 크게 못마땅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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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1.1.


[ ..... 국민아, 우리 임시대통령 李承晩 각하가 上海에 오시도다. ........


..... 그의 명령에 복종하자 .......

..... 우리의 생명을 그의 호령 밑에 바치자. ........ ]




[ ..... 집행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혁명정부를 조직해야 ......

......〈친미 우익그룹에 지도적 역할을 계속 맡겨 두는 것은 무의미한 행위〉 .... 임시정부에서 탈퇴 ........ ]





孫世一의 비교 評傳 (37)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임시대통령 각하, 上海에 오시도다』

孫世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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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2월13일에 각료들과 임시정부 직원들을 인견한 李承晩은 12월24일에 육군무관학교 졸업식에 참가한 것을 시작으로 공식 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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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臨時政府 制度改革을 둘러싼 論爭


1921년 1월1일자 「獨立新聞」이 李承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로 최대의 경의를 표하고 있는 것은 그의 지도력에 대한 임시정부 인사들의 관심과 기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국민아, 우리 임시대통령 李承晩 각하가 上海에 오시도다. 우리는 무슨 말로 우리의 元首를 환영하랴. 우리 民國의 첫 원수를 우리 故疆(고강)의 서울에서 맞지 못하는 비애를 무슨 말로 표하랴.


국민아, 통곡을 말고 희망으로 이 결심을 하자.

우리의 원수, 우리의 지도자, 우리의 대통령을 따라 광복의 대업을 완성하기에 일신하자. 합력하자. 그는 우리의 大元帥(대원수)시니 獨立軍人되는 국민아, 우리는 그의 지도에 순종하자. 그의 명령에 복종하자. 죽든지 살든지, 괴롭거나 즐겁거나,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그의 호령 밑에 바치자.


진실로 우리 대통령을 환영할 때에 우리가 그에게 바칠 것은 화관도 아니오 頌歌(송가)도 아니라 오직 우리의 생명이니, 우리의 생명이 가진 존경과 지식과 기능과 심성을 다 그에게 드리고, 마침내 그가 「나오너라」하고 戰場으로 부르실 때에 일제히 「네」 하고 나서자. 민국 3년 원단에 국민아, 일심으로 「우리 대통령 李承晩각하 만세」를 높이 부르자.〉32)


그것은 어떻게 보면 당면한 위기 국면에 대한 불안감에서 기인하는 자기최면적인 환호의 발로였는지도 모른다.




國務會議에서 李承晩과 李東輝가 격론 벌여



1월1일 오전에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의 신년축하식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한 李承晩은 참석자들을 오찬에 초대했다. 이때의 기념사진에는 李承晩, 安昌浩, 李東輝의 세 거두와 金九를 포함하여 모두 59명의 얼굴이 보이는데,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통틀어 그 정도의 인원이 직접 참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李承晩은 1월 초부터 본격적인 집무를 시작했다. 임시정부는 재무부가 쓰던 건물에 그의 집무실을 마련했다. 먼저 국무위원을 비롯하여 내무부·외무부·재무부·군무부의 업무보고가 있었고,33) 5일부터 국무회의가 열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에 국무회의의 회의록은 작성되지 않았던 것 같다. 李承晩을 임시정부에서 축출하기로 방침을 정해놓고 있던 이동휘 등 한인공산당으로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李承晩의 위임통치 청원문제를 들고 나왔을 것은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34) 대논쟁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李承晩은 이때의 국무회의와 관련하여 좀 다르게 서술하고 있다.



〈李총리가 내부결속을 唱하는 동시에 反省悔悟(반성회오)를 표명하며 앞으로는 協同一致하겠다는 주지로 각료들을 면려하였고, 기왕에 퇴거를 선언한 安총판도 출석 시무하매, 國事의 원만히 商議決行됨을 切望하고 豫喜(예희: 미리 기뻐함)하였노라.

불의에 李총리가 현 정부 제도를 폐지하고 委員制로 개정하자는 안을 돌연히 제의한 바 연석회의에서 여차한 대변경은 이해관계가 어떻든지 의정할 權利와 실행할 道理가 없으므로 의안이 성립치 못한지라.…〉35)



이동휘가 「반성회오」를 어떻게 표명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임시정부의 제도개혁 문제는 이 무렵 상해인사들 사이에서 가장 열띤 논란거리가 되고 있었다. 그 논의를 주도한 사람은 한형권으로부터 모스크바 자금을 건네 받아 가지고 온 金立이었다. 그는 날마다 큰 음식점에 사람들을 불러 모아 집행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혁명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여론을 유도했다. 이동녕, 이시형, 신익희 등 기호파인사들은 이러한 모임에 나타나지 않았으나 안창호는 참석했다고 한다.36) 이동휘가 제의한 위원제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명시되지 않았으나, 그것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인민위원회 제도와 같은 것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때의 李承晩과 이동휘의 논쟁과 관련하여 金九는 뒷날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 임시정부 직원 중에서도 공산주의니 민족주의니 하는 분파적 충돌이 격렬해졌다. 심지어 정부의 국무원 중에도 대통령과 각부 총장들 간에 민주주의냐 공산주의냐로 각기 옳다는 주장을 좇아 갈라졌다. 그 대강을 거론하면, 국무총리 이동휘는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대통령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주창하였다. 이로 인해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의견 불일치로 때때로 논쟁이 일어나 國是(국시)가 서지 못하고, 정부 내부에 괴이한 현상이 거듭 일어났다.〉37)


임시정부의 보위를 책임지고 있는 金九의 고충이 어떠했는지가 느껴지는 술회이다.




委員會制와 臨政幹部들의 分散活動 주장도



또한 이동휘 그룹은 임시정부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하여 주요 간부들이 각기 적당한 지역에 배치되어 실질적인 활동을 추진할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김규식은 모스크바에서, 이동휘는 시베리아에서, 이동녕과 이시영은 만주에서, 안창호는 미주에서,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신규식은 광동에서, 신채호와 남형우는 북경에서 활동하고 노백린은 사관 양성에 주력하며, 상해에는 김립을 총책으로 한 연락부만 두고, 각처에 있는 사람들은 1년에 한 번씩 만나서 회의를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38) 이와 비슷한 임시정부 간부들의 분산 활동 방안은 안창호도 주장하고 있어서 흥미롭다.39)



임시정부 간부들의 분산 활동은 사실상 임시정부의 해산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위원회제로 바꾸자는 주장과도 모순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일본경찰의 정보보고는 이동휘는 이때의 국무회의에서 임시정부를 시베리아로 옮길 것을 제의했으나, 이 역시 李承晩 등의 반대에 부닥쳤다고 기술하고 있다.40)




대통령제를 위원회제로 바꾸자는 이동휘의 제안에 대해서는 李承晩은 물론 안창호도 반대했다. 그러자 이동휘는 사임을 청원했다. 李承晩과 각원들이 극력 만류하였으나 이동휘는 1월24일에 〈나의 쇄신의안을 정무회의에 제출하였으나, 한마디 심의도 없이 구겨 없앴기 때문에 나의 실력으로서는 이 난관을 타개하기 어렵다〉41)는 요지의 선포문을 발표하고 광동으로 가버렸다. 내무총장 이동녕이 그를 대신하여 1월25일에 국무총리 대리 겸임으로 임명되었다.



이동휘의 사임은 곧 한인공산당의 임시정부 탈퇴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동휘는 러시아 외무인민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친미 우익그룹에 지도적 역할을 계속 맡겨 두는 것은 무의미한 행위〉라고 판단하여 임시정부에서 탈퇴했다고 적고 있다.42) 그리고 한인공산당의 이러한 결정은 「대중의 전적인 신뢰를 받는 최고혁명기관」을 다시 조직하는 계획과 관련되어 있었다.43) 그것은 국민대표회 소집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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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무경 이동휘씨가 위원제를 제창하니, 곧 러시아 정부 제도를 채용하자 함이라 ........

...... 그 의견이 서지 못함에 이동휘씨는 곧 사직하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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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東輝의 委員制는 러시아制度라서 反對


이날의 李承晩의 연설 내용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의 하나는 국무총리 이동휘가 사퇴하게 된 경위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때에 국무경 이동휘씨가 위원제를 제창하니, 곧 러시아 정부 제도를 채용하자 함이라. 다른 나라 사람들은 무엇이라 하든지 우리의 좋을 대로 위원제를 쓰자 하였으나, 필경 결론은 그 의견이 서지 못함에 이동휘씨는 곧 사직하고 밖으로 나아갔소이다』


이동휘의 위원제 주장을 국무회의가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소비에트 러시아의 정치제도이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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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38)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李承晩, 워싱턴 군축회의에 한국 대표단장으로 가다







* 김구




[ ..... 기미년, 즉 대한민국 원년에는 국내나 국외를 막론하고 정신이 일치하여 민족 독립운동으로만 진전 ......


..... 점차로 봉건이니, 무산혁명이니 하는 말을 하는 자가 생겨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선에도 사상의 분열, 대립이 ....... ]




[ ..... 이동휘가 ...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니 .... 나와 같이 공산혁명을 하는 것이 어떤가......


..... ´제3국제공산당´의 지휘와 명령을 안 받고도 할 수 있습니까?" .... "안 되지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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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백범은 ´임시정부´를 이끄는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너무나도 괴로움을 당한 나머지 "공산주의자들과는 아무 것도 더불어 함께 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같은 백범의 생각은 <백범일지>(서울; 범우사, 2002.8.5, 3판3쇄)의 관련 대목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음은 그 인용이다.



『기미년, 즉 대한민국 원년에는 국내나 국외를 막론하고 정신이 일치하여 민족 독립운동으로만 진전되었으나 당시 세계 사조의 영향을 따라서 우리 중에도 점차로 봉건이니, 무산혁명이니 하는 말을 하는 자가 생겨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선에도 사상의 분열,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임시정부 직원 중에도 민족주의니, 공산주의니 하여 음으로 양으로 투쟁이 개시되었다. 심지어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가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이에 반하여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은 데모크라시를 주장하여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고 대립과 충돌을 보는 기괴한 현상이 중생첩출하였다.

예하면, 국무회의에서는 러시아에 보내는 대표로 여운형(呂運亨), 안공근(安恭根), 한형권(韓亨權) 세 사람을 임명하였건마는, 정작 여비가 손에 들어오매 이동휘는 제 심복인 한형권 한 사람만을 몰래 떠나 보내고 한이 시베리아를 떠났을 때쯤 하여 이 것을 발표하였다. 이동휘는 본래 강화진 위대참령으로서 군대 해산 후에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이름을 대자유(大自由)라고 행세한 일도 있다.



하루는 이동휘가 내게 공원에 산보하기를 청하기로 따라갔더니, 조용한 말로 자기를 도와달라 하기로 나는 좀 불쾌하여서 내가 경무국장으로 국무총리를 호위하는 데 내 직책에 무슨 불찰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 씨는 손을 흔들며, "그런 것이 아니라, 대저 혁명이라는 것은 피를 흘리는 사업인 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니 이대로 독립을 하더라도 다시 공산주의 혁명을 하여야 하겠은 즉 두 번 피를 흘림이 우리 민족의 대불행이 아닌가, 그러니 적은이(아우님이라는 뜻이니 이동휘가 수하동지들에게 즐겨 쓰는 말)도 나와 같이 공산혁명을 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내 의향을 묻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이 씨에게,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 데는 ´제3국제공산당´의 지휘와 명령을 안 받고도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이 씨는 고개를 흔들며, "안 되지요" 한다. 나는 강경한 어조로, "우리 독립운동은 우리 대한민족 독자의 운동이요, 어느 제3자의 지도나 명령에 지배되는 것은 남에게 의존하는 것이니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반되오. 총리가 이런 말씀을 하심은 대불가(大不可)니 나는 선생의 지도를 받을 수가 없고, 또 선생께 자중하시기를 권고하오" 하였더니 이동휘는 불만한 낯으로 돌아갔다.



이 총리가 몰래 보낸 한형권이 러시아 국경 안에 들어서서 우리 정부의 대표로 온 사명을 국경 관리에게 말하였더니 이 것이 모스크바 정부에 보고되어, 그 명령으로 각 철도 정거장에는 재류 한인 동포들이 태극기를 두르고 크게 환영하였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여서는 러시아 최고 수령 레닌이 친히 한형권을 만났다. 레닌이 독립운동 자금은 얼마나 필요하냐 하고 묻는 말에 한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200만 루블이라 대답한 즉 레닌이 웃으며, "일본을 대항하는 데 200만 루블로 족하겠는가?" 하고 반문하므로 한은 너무 적게 부른 것을 후회하면서 본국과 미국에 있는 동포들이 자금을 마련하니 당장 그 만큼이면 된다고 변명하였다. 레닌은, "제 민족의 일은 제가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고 곧 외교부에 명하여 200만 루블을 한국 임시정부에 지불하게 하니 한형권은 그 중에서 1차분으로 40만 루블을 가지고 모스크바를 떠났다.



이동휘는 한형권이 돈을 가지고 떠났다는 기별을 받자 국무원에는 알리지 아니하고 또 몰래 비서장이요, 자기의 심복인 김립(金立)을 시베리아로 마중 보내어 그 돈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고 직접 자기 손에 받으려 하였으나, 김립은 또 제 속이 따로 있어서 그 돈으로 우선 자기 가족을 위하여 북간도에 토지를 매수하고 상해에 돌아와서도 비밀히 숨어서 광동 여자를 첩으로 들이고 호화롭게 향락 생활을 시작하였다. 임시정부에서 이동휘에게 그 죄를 물으니 그는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러시아로 도망하여 버렸다.



한형권은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통일운동의 자금이라 칭하고 20만 루블을 더 얻어 가지고 몰래 상해에 돌아와 공산당 무리들에게는 돈을 뿌려서 소위 국민대표대회라는 것을 소집하였다. 그러나 공산당도 하나가 못 되고 세 파로 갈렸으니 하나는 이동휘를 수령으로 하는 상해파요, 다음은 안병찬(安秉贊)·여운형을 두목으로 하는 일쿠츠크파요, 그리고 셋째는 일본에 유학하는 학생으로 조직되어 일인 복본화부(福本和夫)의 지도를 받은 김준연(金俊淵) 등의 엠엘(ML)당파였다. 엠엘당은 상해에서는 미미하였으나 만주에서는 가장 맹렬히 활동하였다.



있을 것은 다 있어서 공산당 외에 무정부당까지 생겼으니 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丁奎) 두 형제와 유자명(柳子明) 등은 상해, 천진 등지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의 맹장들이었다.



한형권의 붉은 돈 20만 원으로 상해에 개최된 국민대회라는 것은 참으로 잡동사니회라는 것이 옳을 것이었다. 일본, 조선, 중국, 아령 각처에서 무슨 단체 대표, 무슨 단체 대표 하는 형형색색의 명칭으로 200여 대표가 모여 들었는 데. 그 중에서 일쿠츠크파, 상해파 두 공산당이 민족주의자인 다른 대표들을 서로 경쟁적으로 끌고 쫓고 하여 일쿠츠크파는 창조론, 상해파는 개조론을 주장하였다.


창조론이란 것은 지금 있는 정부를 해소하고 새로 정부를 조직하자는 것이요, 개조론이라는 것은 현재의 정부를 그냥 두고 개조만 하는 것이었다. 이 두 파는 암만 싸워도 귀일이 못 되어서 소위 국민대표회는 필경 분열되고 말았고, 이에 창조파에서는 제 주장대로 ´한국정부´라는 것을 ´창조´하여 본래 정부의 외무총장인 김규식(金奎植)이 그 수반이 되어서 이 ´한국정부´를 끌고 해삼위로 가서 러시아에 출품하였으나, 모스크바가 돌아보지도 아니하므로 계불입량(計不入量)하여 흐지부지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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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민테른 = 제3 인터내셔날(1919∼1943)



[ ......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대치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와 소비에트 권력의 인정'을 '제3 인터내셔날의 기본적인 원리'로 ........ ]

[ ...... '국제 소비에트 공화국의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 ]


[ ...... 제2차 총회 .... '철의 원칙'과 '가능한 한 최대한의 중앙집권화'를 요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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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 인터내셔날(1919∼1943). 1차대전이 발발하여 제2 인터내셔날이 해체되면서 레닌은 1914년 11월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제2 인터내셔날은 죽었다. 기회주의자들에 의해서 쓰러졌다. … 제3 인터내셔날이여! 영원하라. …' ('사회주의 인터내셔날의 위치와 임무', CW 28, p. 40) 이러한 제3 인터내셔날-일명 공산주의 인터내셔날 또는 코민테른[Commintern]이라고도 불린다.-은 1917년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성공하고 중부 유럽에 혁명적 열기가 고양되던 시기에 볼세비키의 제창으로 1919년 3월 모스크바에 세워졌다.



1차 총회에서 레닌은 '국제 소비에트 공화국의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앞의 책, 28권 p. 477)고 선언함으로써 당시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분위기와 기대를 표현했다. 그 후에 모든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대치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와 소비에트 권력의 인정'을 '제3 인터내셔날의 기본적인 원리'로 선언했다.(앞의 책, 31권 pp. 197∼8)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세계 연합(Degras 1971, 2권, p. 465)'은 비록 그것이 1935년 이후에 쇠퇴했다고 할지라도 그의 존재를 통하여 공식적인 목적을 유지시키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1920년 7월∼8월 사이에 열린 제2차 총회에는 41개국의 당과 조직으로부터 대표들이 참석했고 프랑스 사회당과 독일 USPD에서도 참관인이 참석했는데, 이들 프랑스와 독일 사회당의 참석자 대부분은 그 해가 가기 전에 코민테른에 가입할 것을 제안하였다. 새로운 인터내셔날이 불안정한 사회민주적 요인들에 의해 해이해질 우려가 있다는 데 유의하여 총회는 엄격한 21개항의 가입 조건을 규정하였다. 가입을 원하는 모든 당들은 개량주의자와 온건 중도파들을 노동운동의 책임 있는 위치에서 모두 축출해야 하며, 군대 내에서의 체계적인 선전을 포함하여 합법적인 운동과 비합법적인 운동을 펴나가야 한다. 그 시대를 '첨예화된 시민전쟁' 시기의 하나로서 규정하면서 당을 중심으로 한 '철의 원칙'과 '가능한 한 최대한의 중앙집권화'를 요구했다. 즉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코민테른의 집행권 아래서 모든 내용이 결정되기를 요구했다.(Degras, 1권 pp. 166∼172)



코민테른은 그의 법령에 '백색인만을 위해서 존재했던 제2 인터내셔날의 전통과 완전히 단절한다.'고 천명했다. 코민테른의 임무는 모든 유색인 노동자들을 포용하고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제2차 총회는 레닌이 기초한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를 채택했는데, 이 테제는 민족 및 식민지 해방운동이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싸우는 노동계급 운동과 소비에트 러시아와 반제국주의적 동맹을 맺을 필요성을 강조하였다.(Degras, 1권 pp. 138∼44)


1920년에 쓰여진 레닌의 팜플렛 '좌익 공산주의-소아병적 혼란'에서 그는 코민테른에 있어서의 '극좌익적인' 경향과 대립했으며, 코민테른의 반동적인 노동조합 내에서의 작업과 의회 선거에 공산주의의 원칙적인 참여를 주장하였다. 그것은 그가 1921년 제3차 코민테른 회의에서 목도했던 조류였다. 그때 그는 혁명의 파고가 퇴보하고 러시아 외부의 공산당들이 노동계급의 소수만을 대표하며, 근본적으로 러시아적 경험에 근거한 이전까지의 공세적 혁명 저술이 더 이상 서구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회의는 노동계급의 즉각적인 요구를 위해 투쟁할 국내외 노동계급 정당들의 통일전선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코민테른의 집행위원회와 제2 인터내셔날, 그리고 비엔나 동맹이 1922년 베를린에서 회의를 열었으나 의견의 일치를 보는 데에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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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laborsbook.org/dic/view.php?dic_part=dic01&idx=101

[인터내셔날 ] (Internationals,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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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 창설대회는 1919년 3월에 열렸는데 21개국 35조직 52명의 대표가 참석했다. 각국 공산당은 코민테른 밑에 평등하게 존재한다는 명분이 내세워졌다.


그런데 다음해인 1920년 7, 8월의 제2차 대회에서 정체를 드러낸 레닌의 각국 공산당에 대한 ‘21개조’ 요구에 의해 러시아 공산당에 의한 지도, ‘민주집중제’라고 칭하는 공산당독재나 공산당 내의 상의하달제도, 비합법수단도 포함한 계급투쟁의 의무화 등이 강요됐다. 온건 좌파도 과격파로 변신당한 것이다.


각국 공산당은 명목상 코민테른의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러시아공산당의 각국 지부로서의 활동을 계속해야 했고, 중국공산당(1921년)이나 일본공산당(1921년 또는 1922년)처럼 신설되게 됐던 것이다.


1923년 정월 초하루 공산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벨로루시를 합쳐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을 발족시켰는데 실권은 이미 병든 레닌(1924년 1월 사망)으로부터 스탈린에게 옮아가 있었다. 그 후에도 얼마 동안 코민테른은 소련의 다른 관료조직과는 일단 별개 조직이었다. 그러나 코민테른의 첩보부문은 1934년 11월 5일의 특무기관 대개조 때 내무인민위원부(NKVD) 내에 설립된 국가보안국(GBGU)에 흡수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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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6.27.


자유시 참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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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 참변은 1921년 6월 27일에 러시아 연해주 자유시(이만시, 알렉세예프스크, 스보보드니)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자유시 사변,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도 불린다.


레닌의 적군(Red Army)이 대한독립군단 소속의 조선 독립군들을 포위, 대부분이 사상당하고 나머지는 모두 강제노역소로 끌려간 사건이다. 조선의 분산된 독립군들이 모두 집결하였었기 때문에, 사실상 조선의 독립군 세력이 모두 괴멸된 사건이다.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자 불상사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스보보드니(러시아어: Свобо?дный)는 한국어로 자유라는 뜻이다. 러시아 혁명 이전에는 알렉세예프스크였다가, 이후에 스보보드니로 바뀌었고, 한국인들은 의역을 하여 자유시로 불렀다.[1]


[편집] 배경


1920년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명분하에 간도 참변을 일으켰다. 따라서 한국독립군들은 이동 중에 미산에서 독립군을 재편성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으며, 독립군은 연해주의 이만(달네레첸스크)에 집결하였다.



[편집] 자유시의 독립군들


대한국민의회의 문창범과 자유대대의 오하묵등은 자유시에 군대주둔지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지휘권을 둘러싸고 이르쿠츠크파와 상하이파가 대립했다. 이사건으로 독립군은 대부분이 상하이파 공산당으로 들어갔다.


1921년 6월 27일 갈란다라시윌린은 사할린의용대의 무장해제를 단행하기로 했다. 28일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에서 파견된 군대가 사할린 의용대에 접근했고, 이후 제29연대 대장은 사할린의용대 본부에 들어가 복종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사할린의용대가 불응하자 공격명령을 내려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자유시사변은 사할린의용군이 볼셰비키군의 포위와 집중공격에 쓰러진 참변이었지만,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간의 대립투쟁이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이 전투 끝에 전사자 ·도망자를 제외한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편집]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적색군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로 이동하였고, 적색군을 도와 내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적색군은 내전에 승리한 후 독립군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하려 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공격함으로써 무수한 사상자를 낸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야기하였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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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1.


[ ...... 極東人民代表大會 .... 獨立問題에 대하여는 별다른 言及이 없었고

共產勢力확장에 대하여서만 결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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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쏘外交에서 또 하나 특기할 일은 1922年1月21日부터 2月2日까지 「모스코바」와 「레닌그라드」(당시의 페트로그라드)에서 개최된 極東人民代表大會의 參加였다. 同大會는 極東아시아에서의 共產主義革命을 遂行하기 위한 課題를 토의하는 大會였는데 韓國中國日本蒙古쟈바 러시아 등의 지역에서 144名의 代表가 參加하였다.


韓國은 23個團體에서 선발된 52名이 參加하였는데 이중 重要人物은 李東輝·朴鎭淳·呂運亨·金奎植·羅容均·金始顯·張建相·朴憲永·林元根·金奉淵·金元慶·權愛羅등이었다. 144名의 參加者중 52名이 韓國代表였다는 것은 이 大會가 얼마만큼 韓國問題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졌던가를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大會에서 채택된 韓國問題의 결의안은 다음에서 볼 수 있듯이 獨立問題에 대하여는 별다른 言及이 없었고 共產勢力확장에 대하여서만 결의하고 있다.



一. 韓國에는 工業發展이 미약하여 階級意識이 형성되어 있지 않아 階級運動은 시기가 빠르다.

二. 韓國의 대다수 住民이 低水準의 農民이니 이들이 공명하는 民族獨立運動을 전개하고 階級運動者(共產主義者)는 이 운동을 지도하여야 한다.

三. 上海臨時政府는 名稱만 과대하고 實力이 이에 동반하지 못하여 지금까지 유감이 허다함으로 改革할 필요가 있다.



以上의 對쏘外交活動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처음부터 韓·쏘關係는 共產革命을 전제로 한 특수한 접촉이었으며 그 중간에 共產主義者들이 개재되어 많은 물의를 자아냈다. 따라서 共產主義團體의 분열 뿐만 아니라 臨時政府의 운영도 크게 위태롭게 하였다. 쏘련은 1922年共產黨의 再建과 1924年國民代表大會를 통한 共產勢力挽回에 어느 정도 힘을 기울였으나 끝내 실패하였다. 따라서 以後의 對쏘外交關係는 거의 단절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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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臨時政府와 歐美와의 關係

申載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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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민족대회의 소집은 상해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큰 분란을 야기시켰다. 그 대표적인 것이 상해 한인사회에서 3·1 운동 이전부터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여 온 新韓靑年黨의 분열과 해체였다. 신한청년당에는 경무국장 金九를 포함하여 교통총장 孫貞道, 학무총장 대리 金仁全, 재무차장 李裕弼, 임시의정원 부의장을 역임한 趙尙燮, 상해민단장을 지냈고 李承晩의 상해 통신원인 임시의정원 의원 張鵬 등 임시정부 관계자들이 많이 가입되어 있었다. 신한청년당은 태평양회의 후원회 활동에 열성적이었고, 워싱턴회의가 열리
2019-06-26 01:3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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