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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비한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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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 2019-05-09 02:02:13  |   icon 조회: 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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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3.23. 김일성



[..... 반동분자와 반민주주의적 분자들과의 무자비한 투쟁을 전개하며

파쇼적, 반민주주의적 정당, 단체 및 개인들의 활동을 절대 금지 ....... ]





김일성의 20개조 정강



김일성이 1946년 3월 23일 발표한 정강. 북한에 설립될 정부의 성격과 기본과업을 명백히 밝힐 필요가 있는 상황에서 김일성은 당의 정치노선을 구체화하여 인민정권의 임무를 밝힌 11개조 당면과업과 20개조 정강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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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선의 정치경제생활에서 과거 일제통치의 온갖 잔재를 철저히 숙청할 것

2)국내에 있는 반동분자와 반민주주의적 분자들과의 무자비한 투쟁을 전개하며 파쇼적, 반민주주의적 정당, 단체 및 개인들의 활동을 절대 금지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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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기업소, 운수기관, 은행, 광산, 산림을 국유로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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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본인, 일본국가, 매국노 및 계속적으로 소작을 주는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할 것이며 소작을 주는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할 것이며 소작제를 철폐하고 몰수한 일체토지를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여 그들의 소유로 만들 것, 관개업에 속한 일체 시설을 무상으로 몰수하여 국가가 관리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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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20개조 정강이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시기 작성한 조국광복회 10대강령을 더욱 구체화하여 발전시킨 철저한 반제반봉건적 민주주의혁명의 강령으로서 조국의 통일독립과 나라의 민주화를 위한 남북조선 전체 인민들의 투쟁의 기치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http://kplibrary.com/nkterm/read.aspx?num=282







[.... 중앙인민위원회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파시스트에 대한 무자비한 투쟁을 더욱 더 강렬하게 전개하는 ....... ]



인공 중앙인민위원회, 모스크바3상회의결의 지지 결정서 발표


조선일보 1946년 01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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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해방이 우리 민족의 분열로 인하여 자력으로서 그 길이 열리지 못하고 연합국의 원조밑에서 국제문제의 해결과 관련하여 진행되는 때문에 우리는 완전독립의 획득에 있어서 수다한 국제적 제약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금반 모스크바회담이 조선민족해방에 대하여 가지는 의의를 지극히 크게 평가하여 그 규정과 이에 대한 태도를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첫째로, 그것은 카이로·포츠담양회담의 구체화라는 점에 역사적 의의가 있다. 조선의 독립은 이 회담에서 약속되었으나 그것은 시기도 방법도 결정되지 않은 것 추상적이오 막연한 것이었다. 其後의 국제문제해결과 조선민족의 노력에 의하여 금반 모스크바회담에서 건립의 범위와 방법이 처음으로 구체적 결정을 보게 된 것이다. 즉 적당한 시기가 최고 5년으로 되었고 적당한 순서가 신탁제도를 거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소위 배신 행위나 기만도 아니오 하등의 국제법 위반이 아니다.



둘째로, 공동위원회는 그 존재가 일본제국주의의 잔재를 소탕하고 조선의 자유독립국가건설을 원조 촉진하는데 사명이 있는 한 완전히 진보적 의사를 갖는다. 또 신탁제도 역시 그 내용이 조선독립을 달성하는 순서, 과도적 방도인 한 충분히 진보적 역할을 하는 것이며 8월 15일 해방으로부터의 위대한 일보전진이다. 그것은 을사조약이나 위임통치와는 전연 다른 것일 뿐 아니라 우리가 통상 이해하는 신탁과도 아주 판이할 것이다.



세째로, 금반 신탁제도는 그 책임이 3國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로 우리 민족자신속에 있다는 점에서 불가피적 필연이라고 본다. 우리는 아직도 일본제국주의의 잔재를 소탕치 못하여 친일파 민족반역자가 跳梁하고 민족은 분열되어 파시스트 데마고그가 민중의 일부를 현혹하고 반역적 자본가의 태업, 모리배의 준동으로 경제부흥은 곤경에 빠져 있다. 이러한 현상이 3國으로 하여금 우리의 갈망하는 완전독립을 천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은 깊이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정세의 판단 역량의 測定밑에서 이상과 같은 규정과 자기비판을 세우고 금반 모스크바회담의 진보적 역할과 현단계에 있어서의 그 필연성, 정당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우리 임무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신탁통치를 규정하고 문제를 해소하고 완전독립을 하루라도 속히 달성하는 유일최선의 방도는 무모한 반탁운동이나 연합국배척이나 독선전제나 내지 테러 폭행이 아니다. 그것은 국제정세의 몽매에서 기인하는 민족자멸책이다. 우리는 도리어 모스크바회담의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공동위원회 기타 제기관에 호의적으로 협력하고 임시적 민주주의정부수립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것이야말로 독립을 촉진하는 유일최선의 방법이라고 본다.



이러한 견지에서 중앙인민위원회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파시스트에 대한 무자비한 투쟁을 더욱 더 강렬하게 전개하는 동시에 정보부족으로 인하여 前日에 범한 오류, 반신탁의 태도를 솔직히 극복하고서 신탁반대위원회를 해산하고 세계민주주의의 원칙과 합치되는 강력한 민족전선에 총역량을 집중하는 한편 모스크바회담의 결정에 의한 모든 국제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할 것을 천하에 명시한다.”


朝鮮人民共和國中央人民委員會







1946.3.6. [ 38선철폐요구 국민대회 ]




[..... 生地獄 38以北의 同胞를 살리자 ...... ]

[..... 38以北의 言論·集會·結社의 자유를 다오 ...... ]


[....‘건국의 장애물인 38선을 철폐하라’....... ]




[ .....진정한 民意를 무시하고 소수인원의 恣意로 된 臨時人民委員會가 .... 민중을 억압 기만하여 ....... ]



38선철폐요구 국민대회 개최


동아일보

1946년 03월 06일




38線撤廢要求國民大會가 5일 오전 11시 반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이날 38선철폐요구국민대회에 군중이 들고 나선 기치와 표어는 다음과 같다.



38絞首線 撤廢

38以北의 農民의 食糧을 약탈 말라

生地獄 38以北의 同胞를 살리자

自主獨立의 전제조건이다

38以北의 機械없는 공장의 노동자를 살리자

38以北의 言論·集會·結社의 자유를 다오

言論機關은 반성하라 38以北의 진상을 정확히 報道하라

民族의 總意로 38線 撤廢를 요구하자



이날 오전 11시 반 대회장에는 남북 각지에서 모인 수천명이 ‘건국의 장애물인 38선을 철폐하라’ 38絞首線을 철폐하라라고 쓴 깃발을 휘날리고 국민의 총의를 무시한 38선의 철폐에 돌진하려는 결의가 움직이는 가운데 대회의 막이 열리었다.


개회사와 국기게양이 끝난 다음 애국가 합창이 성동중학교의 취주악대와 함께 있은 후 대회위원장 李允榮(平壤朝鮮民主黨副黨首)으로부터 “38선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 우리의 완전독립은 가망없다. 우리는 이 대회를 기점으로 38선철폐 국민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려 한다”라는 개회사가 있었다.


그 다음 임시정부 외교부장 趙素昻으로부터 李承晩, 金九의 축사를 대독한 후 서북선의 실정보고에 들어가 宋義淳, 崔奎恒, 白凡石 3인의 보고연설에 이어 다음과 같은 決議文 낭독이 있은 후 독립만세 삼창으로서 의의깊은 대회의 막을 닫고 동 오후 2시에 폐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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決議文



1) 朝鮮의 38도선은 外敵이 항복하기 전 聯合軍參謀總長會議에서 작전상의 필요로 획정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건대 금일의 朝鮮에 있어서는 이미 그 필요성을 인정치 아니한다. 이 후도 美蘇兩軍이 38선을 경계로 분할 주둔하여 현재와 같은 3천만 민족의 統一團結과 自主國家 건설에 지장이 클 뿐 아니라 국가경제의 파멸을 초래하여 國民生活을 도탄에 빠지게 하며 政治·經濟 文化·交通·通信·居住의 자유를 拘?하는 바 큼으로 우리는 3천만 민족의 이름으로써 聯合軍과 聯合軍總司令官 及 美蘇共同委員會에 대하여 38선의 즉시 철폐를 요구하여 其 목적의 관철을 기하기를 결의함.


1) 우리 동포중에는 □□을 기화로 선량한 동포들을 기만 □□하여 政權의 획득을 꾀하는 賣國奴가 있어서 심지어 光輝있는 祖國을 外夷에게 팔아 먹으려는 □□□ 이땅에서 횡행 활보하니 어찌 통탄치 아니하랴.


38以北을 바라보건대 진정한 民意를 무시하고 소수인원의 恣意로 된 臨時人民委員會가 있어 입으로 民主主義를 표방하면서 민중을 억압 기만하여 후일 政權의 횡탈을 꾀하려 하니 우리 어찌 만연 방관할 수 있으랴.


이제 우리 3천만 동포는 理論과 표방에 속지 말고 사리와 감정을 떠나서 현실을 엄정 냉정히 관찰하여 정사를 가르고 □□을 판단하여 우리의 추앙 신앙하는 民族의 領導者를 선택치 아니치 못하게 되었으니 여기서 우리는 朝鮮의 血統과 民族的 良心을 가진 3천만 동포의 이름으로 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을 절대 지지하는 것을 천하에 선명하여 써 內로는 民心의 歸一을 策하며 外로는 이를 萬邦으로 하여금 大韓國民의 完全統一政權으로 승인케 하기를 결의함.



大韓民國 28년 3월 5일

38線撤廢要求國民大會



동아일보 1946년 03월 06일





1946.3.


[.... 신문은 잇스나 38이남의 소식을 전혀 드를 길이 업는 이북 사람들의 ...... ]


1946.3.18.월요일. 동아일보.

" 라듸오"로 듯는 이남의 소식


평양에서 발행되는 신문은 잇스나 38이남의 소식을 전혀 드를 길이 업는 이북 사람들의 심정은 오즉 답답할 뿐이다. 그러나 지난번 , 미소회담에서 방송파장이 협정되면서부터 라듸오만은 잘들리어 , 서울중앙방송국으로부터 보내는 뉴스로서 자위한다고 한다.







1946.10.



[ ..... 두부를 斬切하며 面皮를 割하고 사지를 절단 ......


..... 容或打蹴을 당하고 입원치료자를 발견하면 此亦 採索 打殺 등 慘虐無道 .......

..... 유치장에 방화하여 생화장하기로 계획 ....... ]



대구치안총사령관 韓鍾健, 대구소요사태내용과 대책 발표


조선일보 1946년 10월 29일



순직경관 43명 부상자가 99명 행방불명자 13명 경찰청사 및 지서의 소각 파괴한 것이 51개소이며 경관의 사택을 파괴한 것이 292건 경관사재 및 기물약탈 512건이고 기타 관공리와 지방부호 및 우익측 요인의 살해 약탈 등으로 其 피해자 45명 부상자 97명 가옥방화 및 파괴와 가재의 약탈이 449건입니다. 이 피해는 경관의 발포에 의한 피해와 폭민의 폭행에 의한 피해를 합한 것입니다.


그 피해 약탈의 수단에 있어 單只 木棒 鐵片 등으로 타살함에 그치지 아니하고 살해당한 시체에 대하여 두부를 斬切하며 面皮를 割하고 사지를 절단하여 恰似蠻族의 人將相食인 정도에 도달할 뿐 아니라 容或打蹴을 당하고 입원치료자를 발견하면 此亦 採索 打殺 등 慘虐無道한 방법을 취하였으니 이 어찌 천인공노의 容恕할 여지가 있으리오.


각 지방 참상중 가장 심한 지방은 永川 倭館 善山 星州 軍威警察署 등인데 永川 倭館에 대하여서는 차후로 미루고 기타에 관하여 그 상황을 간단히 말씀드리면 善山 龜尾地方 暴民들은 10월 3일 오전 10시경 선산경찰서를 접수하고 선산경찰서의 간판을 파괴하고 그 대신 선산인민위원회 보안서라는 간판을 내걸고 경찰서 유치장에는 서장이하 서원 20여명의 지방 우익정당 요인들을 구속하고 서내에는 總務 搜査 등의 부서의 인사까지 결정하고 소위 인민재판을 개시하여 국민의 인권을 자유로 유린하고 있을때 10월 5일 오전 1시경 경성으로부터 來到한 應援部隊와 약 30분간 교전후 경찰청사를 탈환하며 유치장에 구속되어 사형에 직면하고 있던 수십명의 생명을 구조하고 동시에 지방주민의 생명 재산을 엄호하게 되고 성주지방에서는 10월 3일 오후 11시경 군중 3·4천명이 경찰서를 포위하고 대표자 5인이 경찰서장에게 대하여 경찰서의 무기고의 열쇠를 인도하고 경찰직원은 서장이하 총파업하라고 언어도단한 무리한 조건을 강요하므로 경찰서장은 단호한 태도로 이 조건을 一蹴하였읍니다. 그리한 즉 군중은 서장 수사과장 형사2명을 납치하여 서장 관사에 감금하고 동포 동족간의 살상으로 말미암아 대항치 않은 서원 20여명을 체포하여 유치장에 유치하고 일면 유치장에 방화하여 생화장하기로 계획하고 휘발유 일관을 준비하여 유치장 부근에 산포하고 방화하려던 순간 천심 무심치 않으므로 神助롭게도 응원부대 도착하여 격전을 한 후 청사와 직원들을 구출하고


군위지방에서는 10월 2일에 폭민들은 군위경찰서를 점령하고 서장 군수 우편국장 각 지서장 각 국장 식량영단출장소장 학교장 및 우익단체 요인 등 약 30명을 유치장에 구금하고 성주극렬분자와 동일한 수단으로 방화하여 생화장에 처할 계획으로 10월 4일 오후 3시에 충북응원부대 약 3백명이 도착하여 30분간 교전후 청사와 서원 및 지방유지들을 구출하게 되었읍니다.



건설과 질서를 절대로 요구하는 건국 초기에 있어 일대 불상사라 아니할 수 없고 우리 동포로서 무슨 죄악으로 相剋 相殺할 이유가 어디 있겠읍니까? 참으로 유감천만이 올시다. 우리는 이러한 사태는 외국인에게 정말 수치이며 우리의 독립을 지연시키는 한 원인이라고 볼 수 있읍니다. 경찰당국에서는 이 불상사를 하루바삐 급속히 수습하여 지방치안을 회복하도록 노력하고 있읍니다. 一面 지방 여러분께서도 동포애와 민족애로 과거의 마찰一蹴하시고 성심성의로 사태수습에 협력하여 주시는 덕분으로 치안이 복구되었음은 衷心으로 경의를 표하는 바 올시다. 그러나 일부 주모적 역할을 감행한 악덕분자에 있어서는 치안회복이 자기죄악 폭로와 검거를 우려하여 복구를 원치 않으며 도리어 이 혼란상태를 지속시켜 또한 확대를 원하는 일면 모략선전으로 전반사건에 관계된 사람이나 관계치 아니한 사람이나 체포만 하면 모두 총살을 시키니 모두 산으로 도피하라고 하며 또한 38선 이북의 金日成 將軍이 대군을 통솔하고 慶山郡 河陽地方에까지 당도하였으니 노농대중은 우리를 따르라 그렇지 않으면 모두 총살을 당한다고 無根之說로 양민을 誘導하여 경찰과 민간의 이반을 책동하니 참으로 유감천만이 올시다. 당시 興奮과 衝動으로 인하여 부화뢰동한 사람 혹은 대중심리로 현장에서 聲援한 사람 등을 산중으로 도피시켜 그 가족으로 하여금 경찰에 대한 怨聲을 조장시키고 있으니 여러분은 이러한 모략선전에는 절대 주의하셔야 합니다.


경찰은 언제든지 보상적 수단이나 혹은 복수적 감정은 절대 배격하고 공평무사를 지상명령으로 하고 一罰百戒의 원칙하에 주모적 역할을 한 사람과 또는 今般 사태에 관하여 살상 방화 약탈 등에 관하여 갖은 악독한 활동을 한 사람만 검거 탄압하는 것이 경찰의 최고 방침이며 악질분자의 선동과 使嗾에 의하여 무의식적으로 동작한 사람이나 또는 일시적 흥분과 감정에 따라서 부화뢰동 혹은 현장에서 성원한 정도에 불과한 사람에게 대하여는 검거하지 않을 방침이니 여러분께서는 그 점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시고 그러한 사람에게 대하여는 一日이라도 속히 각자 직장으로 돌아가서 종전대로 생업에 종사하도록 지도하옵시며 더우기 산에 도피하고 있는 농민동포 여러분도 속히 돌아와서 추수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방침은 今月 8일에 서게 되었으나 더우기 방침과 기 취지를 각 경찰서에 철저히 주지시키기 위하여 昨 十八日에 각 경찰서장 및 수사과장회의를 소집하였으므로 금후로는 각 경찰에서도 동일한 방침하에서 검거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기전에는 이 방침이 확립되지 아니하였을 뿐 아니라 혹은 경찰의 태도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에 검거정도가 과다한 점이 있다면 이것은 경찰이 신중히 조사하여 처리하고 있읍니다. 그리고 설혹 대중이 의식적으로 군중이 끌리어서 혹은 파괴 방화 약탈 성원 등의 행동에 가담하였다 할지라도 범인의 평소의 행동과 금후의 改悛程度 등을 참작하여 순진한 양민에 대하여는 동포애와 대국적 견지에서 선처할 방침이오니 各位는 충분히 이해하시옵고 사건 처리에 협력하여 주시옵기를 切望하나이다.”







1947.2.17. ‘북조선인민회의’ 구성

1947.2.21. ‘북조선 인민위원회’ 결성




[ ..... 오늘날 북한에서는 당시의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 탄생으로 규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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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1월 3일에는 북한 전역에서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하여 3,459명의 인민위원을 선출하였는데 북한은 당시 총유권자 4,516,120명의 99.6%가 투표에 참가하였다고 발표하였다.


1947년 2 월 17∼19일까지 3일간 각 도·시·군 인민위원회 위원 및 각 정당·단 체 대표 1,157명이 참석한 가운데‘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 대회’ 가 개최되어 여기에서 선출된 대의원 237명으로 ‘북조선인민회의’를 구성하였다.


북조선인민회의는 2월 21∼22일 이틀간 제1차 회의를 열고 ‘북조선 인민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북조선인민위원회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여 모두 22명으로 구성되었다. 정당별 구성은 북조선노동당 16명, 조선민주당 2명, 천도교청우당 2명, 무소속 2명이었다.
오늘날 북한에서는 당시의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 탄생으로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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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unibook.unikorea.go.kr/?sub_num=51&state=view&recom=2&ord=2009&idx=76






1947.3.1. 남로당 중앙



[ ...... 남로당 중앙에서는 ... 신문지상에 기고 ......

...... "반역도당들과의 무자비한 투쟁을 통하여 .......

..... 모스크바 3상 결정을 총체적으로 지지, 실천하는 광범한 인민운동을 .......

...... 민주주의 정당과 사회단체만을 토대로 임시민주정부를 꼭 수립하고, 정권이 인민위원회에 넘어오게 하여 ........ ]




[ .....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

..... 쉬지않는 투쟁을 전개해 우익이라 칭하는 반동분자들을 철저히 숙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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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투쟁은 단지 제주도에서만 일어난 사건은 아니었다. 이 투쟁은 남로당 중앙의 지령에 의해 전국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폭동'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29) 남로당 중앙에서는 "1946년 5월에 결렬된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를 촉진한다"는 미명아래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투쟁을 전개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다음과 같은 글을 신문지상에 기고하면서 투쟁을 적극 독려하였다.


"반역도당들과의 무자비한 투쟁을 통하여 조국의 민주독립을 보장한 모스크바 3상 결정을 총체적으로 지지, 실천하는 광범한 인민운동을 전개하여 인민의 압도적 여론으로서 미소공동위원회를 속개하게 하고, 미소공동위원회가 모스크바 3상결정을 총체적으로 지지·실천하는 민주주의 정당과 사회단체만을 토대로 임시민주정부를 꼭 수립하고, 정권이 인민위원회에 넘어오게 하여 이 인민위원회가 북조선과 같은 민주개혁을 즉시 실천하게 함에 있다. 우리 남조선노동당은 여러분의 선두에서 용감히 투쟁함으로써 기필코 자유와 민주독립을 전취할 것을 맹세한다."30)



이러한 남로당 중앙의 투쟁노선에 따라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에서는 제주도내의 각 읍·면, 공장, 직장 세포 앞으로 투쟁 지령문을 하달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3·1운동 기념투쟁에 관한 지시

작년 9월 철도파업으로 시작된 전국산업의 대파업과 10·1 대구인민항쟁으로 시작된 남조선의 대항쟁은 계속되고 있다 … 중략.


- 3·1 기념투쟁의 목표


① 농촌, 직장을 막론하고 근로인민의 생활 확보

② 삼상회의 결정의 충실한 실천만이 조선의 완전독립을 실현할 것이며, 그 결정의 구체화는 곧 미소공동위원회의 속개

③ 우리들은 사대주의를 배격하고 미군정과 타협해 우리 민주진영을 분열, 파괴, 약화시키는 기회주의자들에게 속지말고 인민투쟁의 피투성이 속에서 나온 남조선 노동당을 지지하고 그 지도하에 쉬지않는 투쟁을 전개해 우익이라 칭하는 반동분자들을 철저히 숙청 해야만이 우리의 승리를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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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기념투쟁에 대한 표어


① 민주 애국 투사를 즉각 석방하라!
② 최고지도자 박헌영선생 체포령을 즉시 철회하라!
③ 정권은 즉시 인민위원회로 넘겨라!
④ 진보적 노동법령을 즉시 실시하라!
⑤ 학원의 민주화!
⑥ 근로인민은 남조선노동당 깃발 아래로!
⑦ 남녀평등 법령 즉시 실시하라!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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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新資料에 의한 4 : 3 사건의 실제
- 前국방연구소 선임연구원 정석균








1948.2.


[ ..... 나는 이미 자연인이 아니라 공산당원이 되어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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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黨조직으로부터 나와 李, 金 셋에게 「대동청년단 대송면 단장을 제거하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우리는 黨命을 수행하기 위해 남성동에 있는 단장 집의 담을 넘었다. 나는 마당에서 망을 보고 둘은 내실에 침입하여 일을 저질렀다.


셋이 함께 도주하여 송정동의 가톨릭수녀원 천장 속에 숨어 있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나는 징역 8년을 선고받고 김천형무소에서 복역 중 6·25 전쟁을 맞았다』



2·7 투쟁은 4·3 제주도 폭동으로 어어졌고, 5월14일 북한은 남한으로의 송전을 중단했다. 그리고 10월19일 국군 제14연대에 의한 여수·순천반란이 일어났다.


―조직의 규칙이 뭐기에 살인명령을 무조건 받는단 말인가.


『나는 이미 자연인이 아니라 공산당원이 되어 있었다. 당 이외의 세계는 일단 파괴해 놓고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잡은 다음에 다시 건설하면 된다는 신념을 가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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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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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革命이란, 네가 살아있으면 내가 죽는다, 네가 이기면 내가 진다고 하는 무자비한...물리적 대결전을 요구 한다」고 로동신문(2000년 12월 22일자「正論 白頭의 銃(총)의 혈통」는 썼다. 죽일 것인가 죽임을 당할 것인가, 어느 쪽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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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4.11.


[..... 더욱 치열하게 더욱 광범위로 파괴·방화·살육 등 소위 무자비한 투쟁을 할 것은 틀림없는 ....... ]



[..... 모국의 지령을 받아서.... 북한의 인민위원회에서는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에게 대해서 총선거를 결사적으로 반대하라는 지령을 내리고 平壤에서는 거의 매일 이것을 방송 ....... ]




한민당, 선거문제에 관해 임위에 메시지 전달


동아일보 1948년 04월 11일, 1948년 04월 13일, 1948년 04월 15일




한민당, 선거문제에 관해 임위에 메시지 전달



우리나라의 독립을 원조하기 위하여 유엔총회에서 결의한 총선거를 온전히 수행하도록 할려는 귀 위원단의 가지 가지의 고심과 노력에 대해서 충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귀 위원단이 늘 고조하시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선거를 시행해야 한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로 생각합니다. 특히 본당은 이에 대하여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당은 과거에 있어서 당수 宋鎭禹씨와 정치부장 張德秀氏를 살해당한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금번 선거에 있어서도 입후보자를 암살할 계획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우리의 절대적 요망은 안심하고 입부호도 하고 선거운동도 하고 투표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귀 위원단이 특히 이 점에 유의하시는 것은 크게 다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금번 귀 위원단이 자유로운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 취한 방침은 결과에 있어서 자유로운 분위기를 파괴하게 될 우려가 많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크게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자유로운 분위기를 조성할려는 목적과 대상은 말할 것도 없이 선거를 잘하기 위해서 선거에 협력하는 사람들에게 마음대로 입후보도 하고 마음대로 투표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데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만일 민중으로 하여금 강제로 선거에 보이코트시킬 목적으로 폭동·파괴·방화·살육 등 수단을 不擇하는 사람들에게 그 행동을 마음대로 하도록 자유로운 분위기를 조성해서 제공한다면 그 결과는 무엇이 되겠습니까?




유엔의 결의에 보이코트하는 모국의 지령을 받아서 이번 총선거를 방해할려는 북한의 인민위원회에서는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에게 대해서 총선거를 결사적으로 반대하라는 지령을 내리고 平壤에서는 거의 매일 이것을 방송하고 있는 것을 우리들 자신의 귀로 직접 듣고 있습니다.


이 지령을 실행하기 위해서 2월 7일 이후 그들이 범한 폭동·파괴·살인·방화 등 건수(3월 23일 현재)는 다음과 같이 전율을 금할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경찰관서 108개소

테러 102건

경관피살 24인

동 부상 75인

경찰가족 피살 1인

동 부상 9인

관공리 피살 3인

동 부상 16인

양민 피살 12인

동 부상 131인

총기 피탈 79건

탄환 피탈 1,305발

기관차 파괴 61량

객차화차 파괴 11량

기차노선 파괴 13건

전화선 절단 214건

통신기구 파괴 9건

전주 절달 72본

동력선 절단 5건

경찰관서 방화 5건

관공서 방화 3건

양민가옥 방화 28건

관공서 파괴 13건

양민가옥 파괴 15건

도로교량파괴 29건




그리고 최근 북한에서 온 사람의 말에 의하면 선거 때는 북한의 공산군이 38이남으로 쳐내려 온다는 것을 선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신경전을 위한 일종의 모략적 풍설이라고 하더라도 선거일 임박해서는 지금보다 더욱 치열하게 더욱 광범위로 파괴·방화·살육 등 소위 무자비한 투쟁을 할 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연백지방에서는 음료수 우물에 독약을 투입하는 등 행동도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불안 공포속에서 어떻게 안심하고 입후보를 할 수 있으며 안심하고 선거운동을 할 수 있으며 안심하고 투표장소로 나갈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입후보하는 사람은 전쟁에 출전하는 병사처럼 비장한 결의를 가지지 않고는 입후보를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선거운동자중에도 많은 희생자가 날 것을 미리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유권자중에는 위협을 느껴서 본의 아닌 기권을 할 사람이 무수히 있을 것도 틀림없는 일입니다. 투표소의 파괴·방화·유권자등록명부의 파기·소실·투표함의 운반도중 피탈 등으로 선거를 몇 번이고 반복하지 않을 수 없는 위험성이 도시를 제한 전선거구에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거울 드려다보듯이 명확히 알면서도 거기 대응할 방안을 강구할 자유를 가지지 못한 것을 슬프게 생각합니다. 나라 없는 약소민족의 억울한 심정이 이런데서 일어나는 것을 깨달을 자유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직 한가지 방도가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이에 대한 적당한 조치를 기대하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귀 위원단은 이러한 사태를 몰각하고 그 시선과 고려를 전연 딴 방면에 집중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할 때 실망과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선거를 방행하기 위해서 파괴·방화·폭행·살인을 마음대로 하는 방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치 않고 그 폭동과 방해를 방지할 책임을 가진 경찰의 수족을 결박하고 선거를 수행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청년의 단체행동을 구속하기에만 주력한다면 그 결과는 선거일을 기하여 남북일대를 수라장화하고 생지옥화하는 것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 말을 여러분이 시인하실지 안 하실지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5월 10일까지 이것이 사실로 증명될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사실로 증명되는 때는 우리의 희생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고려하시기 바랍니다.




금번에 改變된 형사소송법은 그 주안이 귀 위원단의 요청에 응하는 데 있는 모양인데 그것이 이상적 법이론으로는 훌륭하나 오늘날 한국의 현실에는 도리어 부적당한 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준전시상태 半계엄상상태에 있는 것이 사실인데 재판소에서 원거리에 있어서 심판관의 영장을 가져오는데 3일이나 걸리는 경찰관서에서는 도피하는 범죄자를 보고도 손을 댈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임시조치의 방법이 있다하나 그런 짓을 하다가는 피의자의 교묘한 법정 진술에 의해서 체포한 경찰관은 억울하게 1일 80원 미만의 봉급을 받아가지고 피의자에게 1일 1천원의 보상금을 물어주게 될 터이니 어떤 경관이 그런 모험을 하겠습니까?



더욱이 1일 80원을 받는 경관은 어느 나라 국민이며 1일 천원 보상금을 받을 범죄피의자는 어느 나라 국민이겠습니까? 범죄피의자는 언제든지 경관에 비해서 13배 이상의 수입이 있는 사람이요 그만큼 고등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란 이론이 어디서 나오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법률을 초안해낸 사업당국자가 벌써 경찰에 대해서 편견 내지 모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여기에 경찰은 사법관을 신뢰하고 범인을 취급할 용기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조치는 결국 경찰의 활동을 극도로 견제하고 공산당원들에게 파괴·방화·살인 등 행위를 마음대로 하도록 무경찰상태를 만들어 주는 것밖에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귀 위원단 여러분 우리의 말을 냉정히 친절히 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주위에서 여러분과 가장 친절히 가장 빈번히 접근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복면한 공산주의자(당원)와 그 공산당의 충실한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람(우리는 그 인물들을 지적할 수도 있습니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주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의 교묘하고 적극적인 끊임없는 중상적 소개에 의하여 여러분이 韓國民主黨에 대해서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는 것도 우리는 짐작합니다.



유엔보고서에 본당을 극우라고 규정한데서 그것을 알았습니다. 또 여러분의 주위에 공산당계열 분자들이 싸고 돌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실정을 바로 보지 못하신다는 것은 금번의 자유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조치로서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정말 자유분위기를 파괴하는 것은 공산당인데 그 공산당의 자유분위기 파괴공작을 방지하는 경찰과 청년단체를 자유분위파괴자로 오인한 것이 곧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여러분에게 불쾌감을 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이런 말을 솔직히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이해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다시 한 말씀드릴 것은 선거법 제12조와 제44조에 특히 유의해서 고려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개정 형사소송법과 선거법 제12조 제44조를 연락해서 생각할 때 극렬파괴분자들의 원하는대로 된 감이 있습니다.



2천명 미만을 한 區로 한 투표구 총수가 1만2천 이상이 되고 경찰서 지서 출장소 파출소 수가 2천4백 이상이요 군청 읍 면 동회사무소가 2천4백 이상이니 합계 1만4천8백이나 됩니다. 여기에 세무서 등기소 등을 합하면 요경계 장소가 도시를 제하고도 1만5천에 달할 것입니다. 그런데 남한의 경관총수는 4월에 증원이 되어가지고도 3만5천5백명밖에 안 된다고 하니 그렇다면 1만5천개소에 평균 2명의 경관배치도 곤란하며 그들은 행동을 극도로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에 5월 10일에는 총선거를 방해하는 자들이 활동을 마음대로 할 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벽지에 있는 투표소가 등록완료후 투표일까지 25일간에 한 번만 습격을 당해도 그 기일에 선거는 불가능할 것인데 습격한 의사를 가진 분자가 있기만 한다면 이것을 피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맹렬히 습격을 기도하는 분자가 있는 것도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여러분께서 기어히 그대로 한다고 하면 우리는 오직 독립을 위해서 깊은 한숨을 쉬고 뜨거운 눈물을 흘려가면서라도 이 무방비의 희생을 각오하고 선거에 최선을 다할 결심은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께서 한국의 현실사태를 좀더 이해하실 수 있다면 다음 세가지를 특히 재고려하여 주시기를 요청하고 싶습니다.



1) 형사소송법의 變改를 연기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2) 선거법 제44조의 투표구인원수(2천명)을 늘려서 투표구수를 줄이고 경비를 좀더 안전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3) 선거법 제44조 제2항의 사건이 발생할 때는 그 선거구 전체를 무효로 하지 말고 그 투표구만 다시 선거하도록 하기를 청합니다.






1948.4.4.


[......경찰관서 습격이 11개소 경찰관 사망이 4명 일반 청년 사상이 8명 ....... ]



제주도에서 총선거 반대 폭동 발생



게재지명 동아일보, 조선일보

게재일자 1948년 04월 07일

날짜 1948년 04월 04일



5일 시공관에서 개최된 총선거촉진대강연회석상 趙경무부장이 연설한 바에 의하면 4일 제주도에서는 총선거를 반대하기 위한 좌익분자들의 파괴행동이 있었다는데 그 피해상황은 경찰관서 습격이 11개소 경찰관 사망이 4명 일반 청년 사상이 8명 경찰지서 습격이 5개소나 있었다 한다.







조병옥, 제주소요사건과 관련 공산계열의 만행 폭로


1948년 06월 08일

경향신문 1948년 06월 09일



조경무부장은 공산계열이 감행한 만행의 진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남조선의 질서를 교란하고 치안을 파괴하여 북조선과 같이 소련에 예속시키려는 공산계열의 목적달성을 위하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무자비한 폭동만행은 총선거실시에 따라 민중에 대한 공포심 주입과 단말마의 최후 발악으로 더 한층 포학과 잔인성을 나타내었으니 그 일예를 제주도 폭동에서 들면 다음과 같다.



폭동이 일어나자 1읍 12면의 경찰지서가 빠짐없이 습격을 받었고 저지리 청수리 등의 전 부락이 폭도의 방화로 전부 타버렸을 뿐만아니라


그 살상방법에 있어 잔인무비하여 4월 18일 신촌서는 6순이 넘은 경찰관의 늙은 부모를 목을 짤러 죽인후 수족을 절단하였으며 대동청년단 지부장의 임신 6개월된 형수를 참혹히 타살하였고


4월 20일에는 임심중인 경찰관의 부인을 베를 갈러 죽이였고 4월 22일 모슬포에서는 경찰관의 노부친을 총살한 후 수족을 절단하였으며 임신 7개월된 경찰관의 누이를 산채로 매장하였고


5월 19일 제주읍 도두리서는 대동청년단간부로써 피살된 김용조의 처 김성히와 3세된 장남을 30여명의 폭도가 같은 동리 김승옥의 노모 김씨(60)와 누이 옥분(19) 김중삼의 처 이씨(50) 16세된 부녀 김수년 36세된 김순애의 딸 정방옥의 처와 장남 20세된 허연선의 딸 그의 5세 3세의 어린이등 11명을 역시 고히숙집에 납치 감금하고 무수 난타한 후 눈노름이라는 산림지대에 끌고가서 늙은이 젊은이를 불문하고 50여명이 강제로 윤간을 하고 그리고도 부족하여 총장과 죽창·일본도 등으로 부녀의 젖·배·음부·볼기등을 함부로 찔러 미처 절명되기전에 땅에 생매장하였는데 그중 김성히만이 구사일생으로 살어왔다.


그리고 폭도들은 식량을 얻기 위하여 부락민의 식량 가축을 강탈함은 물론 심지어 부녀에게 매음을 강요하여 자금을 조달하는 등 천인이 공노할 그 비인도적 만행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정도이다.”







1948.3.


[ ...... 월남동포가 약 150만 명이고 그후도 계속적으로 매달 2, 3만 명이 월남중 ....... ]



월남자 140만 명, 귀환동포 200만 명 등 이재민 실태


대한일보 1948년 09월 11일



해방 이후 해외 각지로부터 귀환한 해외동포, 38이북으로부터 남하한 월남동포 또는 그 동안 마비상태에 빠진 각 생산공장에서 수없이 밀려나온 실업자군, 기타 친족·가족 등을 잃어버리고 거리를 방황하는 어린이·노인 등 300여만 명이 지금 남조선 각지에서 조국애도 동포애도 인정도 모르는 채 정처없이 헤매이고 있다.


즉 그 동안 보건후생부·외무처·노동부 등에서 지난 3월말까지 조사한 숫자로만 보더라도 월남동포가 약 150만 명이고 그후도 계속적으로 매달 2, 3만 명이 월남중에 있다고 하며 해외귀환동포는 모두 212만 7,503명, 세궁민이 약 1백만 명, 실업자가 약 103만 명 그밖에 孤子·불구자 등의 구호를 요하는 자 약 21만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 구호를 요하는 자 수는 실로 남조선 총인구의 약 15%에 해당하는 300만 정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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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10.



[ ...... 순천경찰서장 양계원 ..... “나는 순천군민의 고혈을 빨은 서장이요” .......


...... 연속해서 외치지 않을 때에는 청년학생들이 주위에서 죽창으로 찔렀다 ........ ]




[ ...... ‘인민공화국 만세’ ... ‘인민군 만세’ ........ ]




여순사건, <기자 현지답사 : 계엄령 선포된 순천의 거리 표정>


세계일보 1948년 10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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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시내에서 일보를 들이자 피비린내는 코를 찌르고 시가에 즐비한 각 상점 유리창과 문과 벽은 총맞은 흔적이 거미줄 같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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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에 들어가 한 때 반란군의 인민재판소로 되었다는 경찰서 정문을 들어서자 차마 바라 볼 수 없는 정복 경관의 시체는 무려 50여 명이나 눈에 띠고 시내 이곳저곳에는 2일전의 격전을 말하는 듯이 무수한 시체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시체를 운반하는 그의 가족이 있는가 하면 시체를 안고 대성통곡하는 노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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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각 방면에서 들은 정보로 종합하면 지난 20일 미명, 여수에서 경찰서를 접수한 국군 제14연대는 즉시로 여수 4시발 통근열차를 이용하여 동일 상오 9시 20분경 순천역에 도착한 후 역을 점령하는 한편 순천을 포위 공격하였다고 한다. 여수반란을 이미 연락으로 알게된 경찰은 부근 각처에서 경찰을 긴급 동원하여 교전 시에는 이미 4백여 명이 참가하게 되었으나 마침 광주에서 응원대로 급파된 국군 제4연대 약 2백여 명이 반란군에게 포위당하여 장교 수 명을 살해한 후 반란군과 합류하게 되어 반란군 측은 더욱 유리하게 되었다 하며 경찰과 3시간여의 교전 중 경찰은 거의 다 쓰러지게 되고 반란군은 동 20일 하오에는 순천경찰서에 쇄도하여 정복을 입은 경찰관들은 모조리 총살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반란군은 경찰서를 접수함과 동시에 마침 유치중인 죄수 20여 명을 즉시로 석방하여 그들로 하여금 21일 8시경에는 당시 청년학생 수천 명을 동원하여 경찰에서, 노획한 무기를 그들에게 제공하는 동시에 인민군을 편성하여 인민군사령부를 경찰서에 인민위원회를 민족청년단 사무소에, 인민재판소를 군청에 각각 설치하는 한편, 그들 청년학생들의 안내로 각 관공리 及 경찰가족 우익정당, 청년단체를 모조기 검거하여 인민재판소에 부치었다고 하는데 검거된 사람은 무려 4백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그 중 간부급은 총살형을 받은 자도 있고 나머지 백여 명은 23일 국군의 진주로 사형집행 수분 전에 구출된 자도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순천경찰서장 양계원씨의 총살형은 가장 처참하였다고 한다. 즉 사형집행전 그를 시내에 끌고 다니며 동씨로 하여금 “나는 순천군민의 고혈을 빨은 서장이요”라고 외치게 하고 만일 연속해서 외치지 않을 때에는 청년학생들이 주위에서 죽창으로 찔렀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당시 경찰, 우익정당·단체, 부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부근 주민에게 분배하여 주었다고 한다.


그들은 또한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에 도주하고 38선은 철폐되어 인민군이 남조선 전부를 점령하였다”는 삐라를 시내에 살포하는 한편 ‘인민공화국 만세’와 ‘인민군 만세’를 절규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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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들은 인명피해 상황을 나열하면 반란군에게 피살당한 자는 경찰관 약 350명(감찰관 4명을 포함), 철도조역 1, 차석검사 1, 경찰후원회장, 한민당 위원장, 대한노총 건설대 교관 2, 대청 부단장, 기타 관공리, 우익 청년단체 관계자, 경찰가족 及 일반민중 약 500명 포함 9백여 명에 달하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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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 김일성


"반동분자, 비협력분자, 도피분자를 적발하여 '무자비'하게 숙청하라"


(1950년 6.25 남침 직후 서울 시내에 뿌려진 김일성의 호소문, 출처: "꽃피는 산하-6.25의 흔적을 찾아서")








[ ..... 동네 사람들이 돌아가며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 ]



다물칼럼/내가 본 6.25 당시의 인민재판


노 희 상(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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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민군은 산 속으로 숨었을 뿐 철수한 것이 아니었다. 동네에는 이상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는데, 마치 테러 직전의 음산한 기분 같은 그런 것이었다. 인민군은 보이지 않았지만 동네 빨갱이들은 더 기승을 부리고 다녔다. 붉은 완장을 찬 대 여섯 명의 빨갱이들이 우리 집에 쳐들어와 온 집을 죽창으로 쑤시며 아버지를 내놓으라고 을러대는 장면이 지금도 눈에 또렷하다.



며칠 뒤에는 인민재판을 한답시고 동네 한 가운의 밭으로 다 모이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집에 남고 할머니만 갔는데 나는 몰래 따라갔다.


옥수수 밭 한 가운데서 벌어진 인민재판은 다름 아닌 사람을 죽이는 것이었다. 말뚝에 묶인 채 서 있는 누군지 모를 사람을 동네 사람들이 돌아가며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나는 무서워 옴짝달싹 못하고 숨어 있다가 집으로 도망쳐왔다. 방 안에 들어가서도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한 채 숨만 할딱거리는 나를 보고 어머니가 채근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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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우리 동네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밝은 공기가 감돌았다. 인민군이 완전히 물러갔다는 얘기가 한 바퀴 돌고나서야 사람들은 숨을 쉴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서천읍내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사람들은 또 공포에 질려 있었다. 장에 갔다 온 사람의 말로는 인민군이 철수하면서 읍내 유지들을 교회당에 모아놓고 불을 질렀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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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은 사람을 일렬로 운동장에 뉘어놓은 다음 ......

.... 일렬로 죽은 사람을 밟고 가도록 하였다....... ]



[ ..... 이 참혹한 현장에는 그 가족들도 다 참석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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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1950년 6·25를 맞았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3학년으로 기억된다.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나는 전과 다름없이 학교에 다닐 수 있었고 모든 것이 평화롭기만 하였다.


그런 어느 날 선생님으로부터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며칠 있으면 신대초등학교(예산군 광시면 신대리 소재)에서 연극공연이 있으니 우리 학교에서도 모두 다 참가해야 한다고 하셨으며 몇 학생을 모아 음악 연습도 시키셨다.


그때 나도 그중에 끼게 되었으며 며칠간은 흥분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으며 그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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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찌는 듯한 더위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연극을 보러 간다는 기쁨에 그런 정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드디어 목적지 운동장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으며 정문을 통하여 일렬로 순서 있게 들어갔다. 나는 우측 제일 앞줄에서 두 번째 줄에 자리하여 연극을 보기에는 아주 좋은 자리였다.



그로부터 얼마가 지났을까. 넓은 운동장은 각 동네에서 모인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이제 조금 후에는 기대하는 연극이 시작되겠지, 초조하고 흥분된 마음으로 기다리며…. 조금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연극을 하려면 그럴 듯한 무대가 있고 무대가 있으면 주위에는 그림이나 연극에 필요한 시설들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교단 위에는 무명치마 저고리를 입은 여인 서너 명이 앉아 있었고 교단 아래쪽에는 젊은 청년 두서너 명이 서 있을 뿐이다. 운동장에는 각 동네에서 모인 사람들로 꽉 차 있건만 그렇게 조용할 수가 없었다.



침묵이 흐르고 잠시 후, 젊은 청년 한 사람이 종이로 말아 접은 확성기를 입에 대고 누군가를 호명하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호명된 사람이 관중을 헤치고 교단 앞으로 나왔다.


젊은 청년이 종이로 말아 접은 확성기를 입에 대고 『이 사람을 죽여야 옳소, 살려야 옳소』하고 묻는다.


넓은 운동장은 죽은 듯이 고요하고, 8월의 뜨거운 태양은 작렬하건만…. 지금 여기는 시베리아의 혹독한 한파가 몰아닥친 듯 누구 하나 살려야 옳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인민재판



아…, 이럴 수가. 이것이 인민재판이란 말인가! 호명된 사람을 교단 앞 운동장에 무릎 꿇리고 어깨 오른쪽, 왼쪽을 사정없이 몽둥이로 내려친다. 참혹한 현장. 총으로 죽이는 것도 끔찍한 일인데 몽둥이로 사람을 패 죽이는 현장 .….


나는 몸서리가 쳐지고 내 친구의 손을 꼭 잡고 있었건만 사시나무 떨듯이 떨었다. 이 끔찍한 살육의 현장을 보기 위해 나는 지난밤 잠도 설치고 설레는 마음으로 이곳에 왔단 말인가.

이 끔찍한 현장을 피하여 도망이라도 하였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도 없었다. 운동장 주위에는 인민군이 총을 들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살육은 계속되고 죽은 사람을 한쪽으로 밀어 놓는다.


죽은 사람 가운데는 설죽어서 꿈틀거리는 사람도 있었는데 단상에 앉아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무명치마 저고리의 여인이 쏜살같이 내려와 설죽은 사람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욕설을 퍼부으며 다시 끌어내어 죽이는 모습을 보며, 나는 할 말을 잊었고, 떨어야만 했다.


도중에는 도망가다 잡힌 사람들도 있었는데(2~3명으로 기억됨) 그 사람들은 포승줄로 결박하여 무대앞에 무릎을 꿇려 놓았다. 그날 저녁 시냇가 모래사장에 생매장되었다고 하였다. 이 얼마나 잔인무도한 일인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8월의 긴긴 낮시간이 야속하기만 하다. 연극은 계속되고 나는 친구의 손을 잡고 그저 떨고만 있었다.


그때였다. 우리 아랫마을에 사는 구장 어른이 호명된 것이다. 그 어른이 운동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먼저와 똑같은 방법으로 어깨 우측과 좌측을 사정없이 내려친다. 순간 연세가 높으신 구장 어른이 물구나무서듯 거꾸러지면서 호주머니에서 옥수수가 쏟아져 나온 것이다. 연극을 보시면서 간식으로 드시려고 삶은 옥수수 몇 개를 호주머니에 넣고 오신 것이다.



아― 이럴 수가. 몽둥이를 든 젊은 사람의 다리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그들이 살려줄 사람들인가. 발길질을 하며 다시 몽둥이로 사정없이 패 죽인 것이다. 이 참혹한 현장에는 그 가족들도 다 참석했다. 이 광경을 직접 목격한 그 가족들은 어떠한 심정이었을까?



연극은 계속되었고 8월의 긴긴 해도 서산을 넘을 무렵 그 끔찍한 연극도 막을 내렸다.

죽은 사람을 일렬로 운동장에 뉘어놓은 다음 맨 우측렬부터 일렬로 죽은 사람을 밟고 가도록 하였다. 물론 몽둥이를 들고 직접 사람을 죽인 장본인이 대열을 지켜본다. 한 사람이라도 건너뛰면 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



나도 순서가 되어 죽은 자를 밟고 지나가는데 몸은 사시나무 떨 듯 떨리고 명치 부위는 더욱 더 아파 왔다. 엉겁결에 한 사람을 건너뛰어 다음 사람의 정갱이 부위를 밟는 순간 뒤에서 몽둥이를 든 사람이 큰 소리를 쳤다. 나는 순간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너무도 무서웠고 하루 종일 떨고만 있었기에….



9·28 수복의 감격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들판을 지나 서낭당 고개를 넘어야 했다. 10여 리 길을 걸어오는 동안 나는 어떻게 집에 왔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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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10910&C_CC=AZ

6.25 手記/초등학생이 본 인민재판







[ ..... “죽여”, “죽여라” .........

..... 총알이 아깝습니다. 때려잡아 죽여야 합니다.”..........

..... “때려죽여라” ........ ]



..........................................................................


논두렁에 9명의 시체가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두개골이 깨져 피가 넘쳐흐른 사람, 얼굴이 일그러진채 鮮血선혈이 낭자한 사람, 뒷골이 터져 엎드려진채로 죽은 사람, 머리에서 터진 피가 아직도 빨간 것을 보면 죽은지 얼마 안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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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재판 하는 빨치산들 “총알 아까우니 때려죽이자”>



원씨 할아버지는 아직도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그리고 방금 전에 일어났던 끔찍한 광경을 그대로 우리(국군)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소리소리 지르는 놈은 한 30쯤 돼 보이는 대장 이었던가 봐. 이놈이 동네사람들을 모아놓고 하는 말이, ‘지금부터 인민재판이다. 여기 와서 반동들 처단에 참가하지 않는 놈은 미 제국주의 앞잡이로 똑같이 처단할 것이다. 여기 통행증이 있다. 이걸 안 가진 놈은 죽을 줄 알라.’


그러면서 쇠줄로 묶어서 엮어놓은 사람들을 보고 ‘이 반동들은 우리 인민의 피를 빨아 배때기가 불러온 놈들이다. 김일성 동지를 배반하고 인민공화국을 반대한 악질반동---여기 있는 검둥개새끼(경찰제복 입은 사람)는 거창 농민들을 개같이 부려먹던 놈들이다. 뒷다리가 부러진 누렁이 개새끼(상이군인)는 이승만 괴뢰정권 앞잡이로 우리 영용한 인민군을 죽인 놈이다.”


대장은 잠시 무서운 눈초리로 지주인 한씨를 쏘아보고 말했어.


“이놈은 여러분의 피와 땀을 빨아먹은 살찐 돼지 같은 놈이다---옆에 있는 이자(청년단원)는 우리 빨치산을 괴롭혀온 악질 반동분자다─”


또 잠시 이들을 쏘아보다가 목청을 가다듬어, “이자들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오?”하며 동네사람들을 둘러보는 거야.


그러자 한 청년이 손을 들었어요. 좌익 민애청 단원이었지. “죽여야 합니다.” 민애청단원이 외치자 여기저기서 “죽여”, “죽여라” 아우성 치는 게 모두들 살기가 등등해. 짜고 하는 짓들이야.


대장은 다시 되물었어.


“어떻게 죽이면 좋겠오?” 똑같은 청년이 대답했어요.

“반동들을 총살 하는 게 마땅합니다. 하지만 총알이 아깝습니다. 때려잡아 죽여야 합니다.”

여기저기 서 “때려죽여라”가 공허하게 메아리쳤지. 동네사람들은 그저 무서워서 벌벌 떨기만 할뿐, 아무도 아무 소리도 못했어요.




<따콩 총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경찰관 목을 비튼 닭 모양으로 푸드득---이내 움직이지 않아>



대장은 동네사람들 앞으로 다가왔어요. 그중에 만삭인 임산부가 있었지. 임산부를 보고 묻는거야.


“반동들을 어떻게 처치하면 좋겠오?”

임산부는 얼떨결에,
“네, 때려 죽여야 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죽여라”의 합창이 울려 퍼졌오.


조씨 노인의 설명은 계속 됐다.

“다들 짜고 하는 짓이었소. 공비 40여 명이 끌고 온 경찰관과 청년 10명을 쭉 둘러싸고 ‘때려죽이라’는 고함에 호응하듯 따콩 총 개머리판으로 먼저 경찰관 한 명의 머리를 힘껏 내려 치더구만. 검은 제복의 경찰관은 그 자리에 힘없이 쓰러져 목을 비튼 닭 모양으로 푸드득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내 움직이지 않더만.


그런 식으로 열 명을 다 때려눕히자 보초 서던 놈이 달려왔어. 대장 쪽을 보고 소릴 지르는거야. 국방군 놈들이 온다고. 그러자 10명을 때려죽인 빨치산 공비 40여 명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덕유산 골짜기로 사라졌어요. 지금도 그 골짜기 안에 어딘가에 숨어 있을거요. 한 시간도 안 됩니다─”



노인의 말이 끝나자 중대장이 우리 분대에게 즉각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노인들이 공비들이 잠적한 길목을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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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논단 2009.1.
◆덕유산 빨치산 토벌이야기①

李贊植 / 예비역 육군준장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52> 휘파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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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놈은 일부러 죽을 자리 찾고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옮겨간 지 며칠 안돼서 동네에 두 가지 사건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하나는 나 다니던 산정국민학교의 유명한 공산주의자 박선생의 시국강연이고 다른 하나는 같은 날 그 동네출신 전직 경찰관에 대한 인민재판이었다.



동네방죽 옆에 있는 너른 마당에서 박선생 강연이 먼저 열렸다. 한창 더울 때인데도 박선생은 검은 중절모에 검은 양복을 반듯이 차려입고 연신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피를 토하듯 열정적인 강연을 했다.

영용한…영웅적인…위대한…쓸어버립시다…만세, 만만세…

이런 단어들밖엔 기억이 없다.

그리고는 박수, 또 박수….



인민재판은 끔찍했다. 어린 나에겐 잘 이해 안되는 논고, 동의, 동의의 함성이 지나고 죽창으로 처형을 할 차례인데 아무도 나서질 않는다. 피고의 얼굴은 백짓장 단계를 지나 송장모냥 시커멨다.


한 사람이 불쑥 앞에 나섰다.

술에 취한 것 같았다.



눈을 질끈 감고 요렇게만 하씨요, 죽창을 저놈 아랫뱃대기에다 요렇게 대놓고 눈을 질끈 감고 기합을 준단 말이씨! 요렇게! 야아아앗!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내빼버렸다. 도망가는 내 뒷등어리에 갑자기 솟아난 네 개의 눈동자에는 모두들 눈을 질끈 감고 죽창을 피고의 아랫배에 갖다대고 야아아앗! 기합을 넣고 힘을 주는 모습이 선명하게, 붉은 피 번지듯 선명하게 비쳐졌다. 그래서 나는 지금껏 인민재판의 실상을 꼭 눈으로 본것처럼 기억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천길 구덩이 속에서 솟아오른 도철의 얼굴들이었다. 사람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실제로 본 것이 아니다.

나처럼 방상씨(方相氏)의 네 눈이 상상으로 본 것. 그것이 인민재판이다.

그것을 실제로 본 사람들은 다 죽었다. 혼이 죽어버린 것이다. 그것을 보고 나서도 혼이 살아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렇다.

그것은 죽임이 아니라 산자에 대한 검은 저주였다.







1950.6. 김일성


"반동분자, 비협력분자, 도피분자를 적발하여 '무자비'하게 숙청하라"


(1950년 6.25 남침 직후 서울 시내에 뿌려진 김일성의 호소문, 출처: "꽃피는 산하-6.25의 흔적을 찾아서")




1950.6.28. 김팔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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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8일 북한 공산군이 기습 남침으로 서울을 강점하자 미쳐 피난을 하지 못했던 서울시민 중에 을지로에서 인쇄소 애지사(愛智社)를 경영하던 소설가 팔봉(八峰) 김기진이 있었다. 그는 세종로 부민관(지금 서울시의회) 앞에서 보위부 앞잡이인 소위 가두 특수대에 끌려 나와 인민재판을 받았다.



평소 거래가 있던 영락연판소 직공이며 남로당 중구 출판노조원이던 노동운이 검사를 자칭하며 읽어 내려간 죄목은 다음과 같았다.


“반동분자 김팔봉은 갖은 반동적인 행동으로 민족을 팔고 동포들을 배신하면서 인민을 거역하는 글을 써 왔고 최근에 와서는 공화국이 내린 자수권고에 불응하면서 반동행위를 계속해 온 악질입니다.”



노동운이 동원된 군중을 보고 외쳤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악질을 살려야 옳습니까! 죽여 버려야 옳습니까!”


그러자 군중 속에 숨어있던 아지프로(선전원 агитпроп)들이 제각기 소리를 지르며 “죽여라, 반동은 없애 버려야 한다.”라고 호응했다.


서울옾셋공사 인쇄직공이던 자칭 재판관 이영기가 다시 물었다.

“여러분 어떻게 죽여야 합니까!”

프락치들이 외쳤다.

“때려 죽여야 합니다.”

“그러면 인민의 이름으로 반동분자 김팔봉에 대한 판결을 내리겠습니다.”


그러자 김팔봉은 “이 후레자식 놈들아! 죽이려면 어서 죽여라! 이 천벌
2019-05-09 02:02:13
211.169.1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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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재판 2019-05-09 02:03:38



[ ..... 인민재판을 거쳐 죽창이나 칼·낫과 같은 원시적 무기로 난도질하여 처형하거나 고문 및 학살을 ........ ]



[ ..... 반동분자로 낙인찍히면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먼 친척까지 몰살 ....... ]




"반동분자, 비협력분자, 도피분자를 적발하여 '무자비'하게 숙청하라"




[특집] 한국전쟁 시기 인민군 및 左翼측의 민간인 학살 행위


학살당한 민간인 총 122,799명, 납북자 수 84,532명




Written by. 김필재 2005-09-05



6.25 전쟁당시 북한 인민군과 좌익(左翼)측의 학살 유형은 주로 비무장한 적(敵)에 대한 대량의 보복 처벌이었다. 그 형태는 대개 '인민재판' 혹은 '처형'의 형태를 취했다. 특히 인민군 점령지역에서는 인민군의 전폭적 후원을 받은 지방 좌익들이 활개치면서 우익인사 및 그 가족들을 인민재판을 거쳐 죽창이나 칼·낫과 같은 원시적 무기로 난도질하여 처형하거나 고문 및 학살을 자행했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의 경우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경찰이나 군인 그리고 이들의 가족들을 체포해 그 자리에서 인민재판에 회부했으며, 체포를 거부할 시에는 즉결처형을 했다. 인민군은 공무원, 군, 경찰, 학자 등 소위 인텔리 계층을 최우선 대상으로 학살했다. 그 대상에는 부녀자와 어린이들까지 대거 포함되었고, 반동분자로 낙인찍히면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먼 친척까지 몰살 당했다.



1950년 9월 20일 김일성은 이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살려둔 수감인사들에 대한 '제거' 조치를 전체 점령지역의 행정기구에 하달했다. 후송을 하되, 후송 곤란시에는 즉결처치하라는 것이 주내용이었다. 그러나 당장 먹을 군량미도 다 떨어져가는 마당에 어떤 인민군이 우익을 먹여가며 재워가며 후송하겠는가. 이것은 사실상 '전면적 학살'을 지시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학살 당한 민간인 총 122,799명, 납북자 총 84,532명



전남에서도 800여 명의 양민이 무참하게 학살당했으며, 전북 무안에서는 퇴각하는 인민군이 주민 80명을 묶어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은 후 태워죽이기도 했다. 목포시의 경우 목포시 연동의 미곡 창고에서 300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살해되었으며, 전남 임자도의 경우 전 주민의 절반 이상이 인민군과 지방 좌익에 의해 처형됐다.


총 4권으로 이루어진 '6·25 사변 피살자 명부'(공보처 통계국. 작성일 1952년 3월31일)에는 59,964명의 피살자 명단이 실려 있다. 이 명부는 범례(凡例)에 "6·25 사변 중 공무원 및 일반인이 잔인무도한 괴뢰도당에 피살당한 상황을 조사 편찬하였다"면서, 대상을 "군경(軍警)을 제외한 비(非)전투자에 한하였다"고 밝혀, 인민군 등 좌익에 의해 피살된 사람들의 명단만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전라남도' 지역 피살자만 43,511명 (전체의 72.6%)



명부에는 5만9964명의 피살자 가운데 전남 지역에서 피살된 사람이 43,511명으로 전체의 72.6%를 차지하고 있다. 다음으로 전라북도(5,603명), 충청남도(3,680명), 경기도(2,536명), 서울시(1,383명), 강원도(1,216명) 順이다. 그 외 경상남도 689명, 충청북도 633명, 경상북도 628명, 제주도 23명, 철도경찰 62명이 좌익에 의해 피살된 것으로 기록됐다. 전체 피해자 가운데 남자가 44,008명, 여자가 15,956명이다.


여성 피살자 15,956명 가운데 13,946명이 전남 지역에서 피살됐다. 피살자가 집중된 전남 지역에서도 특히 영광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 전남 지역 피살자 43,511명 중 절반에 가까운 21,225명이 영광군에서 피살됐다. 영광지역 여성 피살자는 전국 여성 피살자의 절반 가까운 7,914명이다.



영광군 인근 지역의 피해도 컸다. 전북 지역 피살자 5,603명 중 2,364명이 피살된 고창은 행정구역은 전북에 속해 있지만 영광과 이웃해 있는 지역이다. 전남 지역에서도 영광과 이웃한 郡인 나주(3,596명), 장성(4,306명), 함평(1,954명) 등에서 피살자가 많았고 영암 지역에서도 7,175명이 피살됐다.



이외에도 6.25 전쟁 당시 소위 '바닥빨갱이들'에 의해 가장 큰 피해자집단 중 하나는 종교인들이었다.


지금까지 정리된 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6·25 당시 인민군과 바닥빨갱이들에 의해 학살당한 목사·신부·장로·수녀들은 신원이 밝혀진 사람만 174명에 달한다. 또한 인민군이 퇴각하며 납북된 종교인들도 184명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기독교인에 대한 집단학살은 전남 영암읍 교회사건 등 3개월 이하의 인공치하 동안 조직적으로 전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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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 평양 칠골리에서만 2,500여명 학살



한편 미군의 38선 이북으로 진격하자 인민군은 북으로 후퇴하면서 북한 지역에서도 숱한 학살극을 벌였다. 김일성은 6.25남침 때에 북한지역에서 이른바 북한 내 불순분자 색출을 모토로 '예비검속'(豫備檢束)을 했는데, 이들에 대한 성분조사는 악명높은 '정치보위부'에서 실시했다. 김일성은 미군이 압박해 들어오자마 모조리 이들을 학살했다.


국군과 미군의 평양 입성 후에야 확인된 사실이지만, 김일성의 북한정권은 사람들을 새끼줄로 묶어 총살한 다음 시체를 우물 속이나 창고, 방공호에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구체적으로는 평양의 칠골리에서 2,500여명, 평양 승호리 인근의 사도리 뒷산에서 4,000명 정도가 학살당했고, 평양의 기림 공동 묘지터와 용산 공동묘지에서도 학살이 있었다.


함흥에서는 함흥감옥에서 700명, 충령탑 지하실에서 200명, 정치보위부가 있는 3곳의 지하실에서 300명, 덕산의 니켈 광산에서 6,000명, 반룡산 방공굴에서 8,000여 명이 학살당했다. 또한 함흥시에서만 모두 1만 2,000여 명이 퇴각하는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학살당했다. (출처: "자유공화국 최후의 날", '지옥유폐 130일-원산 대학살 사건의 전모', 박계주 著)



이처럼 만인이 보는 앞에서 학살을 당한 민간인이 122,799명(‘대한민국통계연감’, 1952년 발간)이고, 납북자 수는 84,532명, 전쟁 중에 죽은 민간인이 244,633명이다.



<자료1. 김일성의 대량 학살 책임을 보여주는 戰時하 김일성의 발언 및 지시>



-"후방을 철옹성같이 다져야 한다. 도피분자, 요언(妖言) 전파 분자와 무자비하게 투쟁하며 밀정 및 파괴분자를 적발, 가차없이 숙청하고 반역자는 무자비하게 처단해야 한다" (1950년 6월 26일, 방송을 통한 김일성의 지시하달, 출처: "남북한 관계 사료집 22권")


-"반동분자, 비협력분자, 도피분자를 적발하여 '무자비'하게 숙청하라" (1950년 6.25 남침 직후 서울 시내에 뿌려진 김일성의 호소문,출처: "꽃피는 산하-6.25의 흔적을 찾아서")


-"국군장교와 판검사는 무조건 사형에 처하고, 면장, 동장, 반장 등은 인민재판에 부친다"(1950년 6월 30일 포고문, 출처: "정치범은 자수하라"와 "반동분자 처리지침")


-"숨어 있는 반동도배들이 자수하기를 기다리면서, 그 반동분자들과 투쟁하지 않는 경향이 당일꾼들에게 만연되고 있는 현상은 극렬히 비판해야 한다." (1951년 1월 21일, "적에게 일시 강점 당하였던 지역에서의 반동단체에 가입하였던 자들을 처리함에 관하여"라는 군사위원회의 결정 3개항을 설명하면서)


-"악질반동에 대해 복수하려는 것은 극히 정당한 일입니다." (1950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정기대회에서 진술한 김일성 동지의 보고/”한반도 분단의 재인식”-신일철 著)




<자료 2. 남한 지역에서 발생한 북한군 양민 학살 현황>


(출처: 공보처 통계국 '6.25 사변 민간 피해 조사표'. 단위 : 명)


지역 사망 학살 납치
서울 29,688 8,800 20,738
경기 62,621 7,511 16,057
충북 24,320 3,409 6,312
충남 23,707 5,562 10,022
전북 40,462 14,216 7,210
전남 14,193 69,787 4,171
경북 35,485 6,609 7,534
경남 19,963 6,099 1,841
강원 17,122 6,825 10,528

총계 사망-244,663 학살-28,945 납치-84,532
(교전이 직접 벌어지지 아니한 제주는 제외)




<자료 3. 북한지역에서 발생한 북한군 양민 학살>


아래는 주로 UN군의 북진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인민군 주력부대가 퇴각하며 발생한 학살이다.


1. 함남 원산(元山)학살

- 발생장소 : 원산시 시내, 신풍리 여왕산, 원산 앞바다, 원산인민교화소
- 방식 : 4명 1개조로 묶어 방공호에 집어넣고 집단총격으로 사살
- 희생자 수 : 1,700여명


2. 함남 함흥학살

- 발생장소 : 함흥인민교화소, 충령탑 지하실, 정치보위부 지하실, 함흥북쪽 덕산니켈광산 반용산
방공호
- 방식 : 집단 무차별 총살, 방공호의 경우 폭사, 우물 생매장, 투석
- 희생자 수 : 12,000여명 (납치자, 실종자 포함되지 않은 수임)


3. 강원 고성(高城) 학살

- 발생장소 : 교외 저수지
- 방식 : 저수지로 몰아넣은 후 폭사
- 희생자 수 : 800명


4. 함남 영흥(永興) 학살

- 발생장소 : 영흥국민학교 운동장, 영흥 방공호
- 방식 : 무차별 난사
- 희생자 수 : 1,520명


5. 함남 순천(順川) 학살

- 발생장소 : 순천 북서쪽 터널
- 방식 : 무차별 난사
- 희생자 수 : 200명


6. 함남 신고산(新高山) 천주교도 학살

- 발생장소 : 인근 과수원(사과밭)
- 방식 : 장작 몽둥이로 집단 가격 후 살아남은 자는 총살
- 희생자 수 : 190명


7. 황해 해주(海州) 학살

- 발생장소 : 해주형무소 등
- 방식 : 독살, 해주지역 우물에 집단 생매장 후 돌로 무차별 가격, 소사(불 태워 죽임)
- 희생자 수 : 아이 업은 부녀자들 포함 1,200여명 (이 학살은 종군기자들에 의해 UN에 보고됨)


8. 함북 갑산군(甲山郡) 학살

- 발생장소 : 양유리 줄버드나무 밑, 부흥리 굴, 지경리 느티나무 밑, 읍내 우물 다수
- 방식 : 총살, 우물에 집단 생매장
- 희생자 수 : 420명


9. 함남 고원군(高原郡) 학살

- 발생장소 : 운곡면 차탄 다리밑, 관평역과 흑토령 중간 저지대, 성내리 뒷산 공동묘지
- 방식 : 무차별 총살
- 희생자 수 : 800명


10. 황해 수안군 학살

- 발생장소 : 운곡면 차탄 다리밑, 관평역과 흑토령 중간 저지대, 성내리 뒷산 공동묘지
- 방식 : 무차별 총살
- 희생자 수 : 1,100명
(konas)


http://www.konas.net/article/article.asp?idx=7199







[ ...... 전주형무소에 수감된 우익 인사 1,000여명 가운데 500여명을 곡괭이와 삽 등으로 학살 ......... ]



64년 만의 추모식..삼삼오오 모인 유족, 여전히 숨죽인채 흐느껴


[단독] "1950년 전주는 한국의 킬링필드였다!"

향토사학자 이인철씨 충격 증언 "50년 전북인사 5백여명, 인민군이 때려 죽여"



[조광형 기자] 2014-10-14




2005년 12월 1일 발족한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위)'는 일제강점기부터 80년대까지 있었던 인권유린과 폭력, 학살, 의문사사건 중에서 왜곡되거나 은폐된 진상을 밝히는데 주력해 왔다. 특히 과거사위는 6.25 전쟁 당시 있었던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에 포커스를 맞추고 2006년부터 4년 동안 전국 13곳에 대한 발굴 작업을 통해 1,617여 구의 유해와 6,020여 점의 유품을 발굴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사건의 대부분은 한미 연합군이나 국군 헌병대, 경찰이 연루된 '미제사건'들이었다. 이를테면 무고한 양민들이 보도연맹원이나 좌익분자로 몰려 경찰 등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됐다는 내용들이다.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눈 비극적인 전쟁이 발생하면서 '양측 모두' 억울한 희생이 뒤따랐다. 전쟁 중은 물론, 전쟁 후에도 지독한 후유증으로 수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고 가정이 파탄나는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과거사위가 소명하려는 사건에는 하나같이 '좌익세력'이 피해자로 등장하고 있다. 발표 내용만 보면 한미 양군과 경찰은 반민주적ㆍ반인권적 행위를 저지른 잔혹한 반동분자(反動分子)들이다. 이같은 과거사위의 진실(?) 규명 노력과, 각종 영화에서 미화되는 북한 인민군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남한을 침략한 북한군이 마치 억울한 피해자처럼 비쳐지는 심각한 착시(錯視)현상마저 나타나고 있다.


지난 9월 26일 전라북도 전주의 작은 공원에서 64년 만의 진혼곡이 울려 퍼졌다. 9.28수복 직전, 도망치던 북한 인민군이 전북 우익인사 수백명을 삽과 곡괭이 등으로 무참히 살해한 사건을 상기하고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단발마의 비명으로 수많은 인사가 영문도 모른채 생을 마감했지만 그 누구 하나도 거들떠보지 않던 사건이었다.



오래 전 '인민을 해방시키겠다'며 내려온 북한 인민군은 본인들의 '원활한 도주'를 위해 5백여명을 때려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유가족이 부지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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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추모식을 진두지휘한 향토사학자 이인철(85)씨는 "'전주형무소 학살 사건'은 전국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잔학한 사건인데, 이장 이후 64년에 이르는 오늘까지 제대로 된 추모식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유족들조차 전주형무소에서의 죽음에 관한 사실을 침묵함으로써 정치적으로도 잊혀진 사건으로 치부돼 왔다"고 개탄했다.


'전주형무소(舊 전주교화소) 학살 사건'은 한미연합군이 서울 탈환을 앞둔 1950년 9월 26일 자정 무렵부터 27일 이틀간 북한군이 전주형무소에 수감된 우익 인사 1,000여명 가운데 500여명을 곡괭이와 삽 등으로 학살한 사건을 일컫는다.


희생자들은 1950년 7월 20일 전라북도 지역을 침공한 북한군이 지역의 추종 세력을 동원, '반동분자'로 규정해 전주형무소에 가둔 우익 인사들로, 대한민국 건국 초기 지도자급 인사인 손주탁 반민특위위원장과 오기열, 류준상 초대 제헌국회의원을 비롯해 이철승 건국학련위원장(前 국회 부의장)의 부친 등이 포함됐다.


당시 학살당한 인사 중 300여명의 시신은 가족 등에 의해 수습됐으나 나머지 175구는 합동 매장됐다 1955년 전주시 효자공원 묘지에 이장, 안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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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newdaily.co.kr/mobile/mnewdaily/newsview.php?id=219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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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이 6.25 때 90만 양민을 학살했다고?


끔찍한 역사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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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의 주장과 달리 실제 6·25전쟁 중 민간인 학살의 주체는 전쟁을 일으킨 북한군과 「바닥빨갱이」로 불리는 남한 좌익들이었다. 북한군이 서울에 들어오자 좌익들이 이른바 人民裁判(인민재판)을 통해 경찰과 군인 가족을 잡아 죽이기 시작한 것이다.


6.25전쟁 중 북한군과 좌익들이 학살한 민간인은 총 122,799명(「대한민국통계연감」, 1952년 발간)에 이른다. 이 숫자는 남경대학살, Warsaw Getto의 유태인 학살과 함께 20세기 세계적 학살사건 중 하나로 기록된다. 붉은 완장을 차고 다니던 좌익들은 대개 총이 없었으므로 죽창이나 도끼, 쇠스랑, 괭이 곤봉 등으로 무장했고 곡괭이와 삽으로 우익인사들을 찔러 죽이는 원시적 학살행위를 저질렀다.



開戰 초기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처형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일보의 「30만 보도연맹원 학살」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左편향된 역사해석으로 물의를 빚어 온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委, 위원장 안병욱) 조차 2009년 11월26일 『6.25 직후 국민보도연맹원 등 4,934명이 국가기관에 의해 집단 학살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었다. 진실화해委는 이날 『1950년 6월 25일부터 9월 중순경까지 국민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들이 육군본부 정보국 CIC(방첩단)와 경찰, 헌병, 해군 정보참모실, 공군정보처 소속 군인과 우익청년단원에 의해 소집-연행-구금된 후 집단 학살됐다』며 『확인된 희생자는 4,934명』이라고 발표했었다.


세계일보는 4천 여 명으로 확인된 보도연맹원 희생자 숫자를 30만 명으로 부풀려 놓았지만 그 근거는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6·25전쟁 중 좌우익 사이 報復(보복)을 말하기도 하지만 9·28 서울 수복 이전은 좌익의 人民裁判이었고 9·28 이후는 대한민국 정부에 의한 구속·재판이라는 公的 처벌을 통해 이뤄졌다.



양동안 한국학 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9·28 서울 수복 이후 소위 우익들에 의한 좌익 보복 역시 국회에서 私刑(사형)금지법령이 만들어지면서 금지됐을 뿐 아니라 살해당한 우익들의 가족들 역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어서 보복을 하기도 어려웠다. 人民裁判으로 양민학살을 주도한 좌익들은 이후 재판을 통해 수감돼 처벌을 받았다』고 말했다.



<『경찰관들 살해해 배를 갈라 간을 꺼내 씹기도...』>



전쟁사학자들은 6.25전쟁 당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12만 양민학살」이 세계적 학살로 기록되는 이유는 피해자 수는 물론 그 殘酷性(잔혹성)에 있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경남 남해군에서는 경찰관들을 살해해 배를 갈라 간을 꺼내 씹거나 절명한 경찰관 경찰관의 배에 1척이나 되는 소나무 말뚝을 박기도 했다.



경기도 양평군에서는 반공인사 600여 명이 철사줄로 묶어져 휘발유를 끼얹어 지고 웅덩이에 생매장됐다.


전주형무소에서는 감옥에 있던 우익인사들이 살해된 후 도랑에 던져졌고 도랑이 시체로 가득 차자 우물에 던져졌고 우물이 차자 뒤뜰에 버려졌다. 대전형무소에서는 수감돼 있던 1,742명의 우익인사와 가족들이 모두 학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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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libertyherald.co.kr/article/view.php?&ss%5Bfc%5D=1&bbs_id=libertyherald_news&doc_num=8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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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와서 쳐라! 매일 와서 폭격을 해야 한다니까!』


죽음을 싣고 오는 폭격기를 반갑게 기다리는 북한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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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타의에 의해 같은 민족이 남북으로 갈라지고 해방된 지 5년, 공산 치하 북한에서 공산 교육을 받아야 했다.


『지금까지의 세계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계급은 있어서 안되며 全세계 인간은 평등해야 하며 부르주아를 타도하고 무산계급의 사회를 이룩해야 한다』는 공산당사를 줄줄 외우도록 공부했었다. 그러나 온 누리가 빨갛고 그 속에서 배운 것이 비록 마르크스 레닌의 유물사관이었다고는 하나, 이론과 현실의 모순성을 직접 보고 느꼈기에 결코 속속들이 붉게 물들 수 없었다. 죽음을 무릅쓴 많은 사람들이 38선을 넘기 시작했다. 북한 사람들은 자유를 갈망하며 남한에 의한 통일을 염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6·25 남침으로 공산군은 오히려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라디오 앞에 모여 앉아 귀를 기울였다.

『어느 부대 어디까지 진군! 무슨 부대 어느 곳을 점령!』

의기양양한 인민군의 전황을 들으며 애꿎은 라디오만 두들긴다.


『북쪽만 가지고 모자라 남쪽까지 빨갱이를 만들겠단 말인가』

무더위 속에 라디오를 솜이불 안에 들여놓고 잡음 섞인 남한 방송을 초조한 마음으로 몰래 도청한다.

『어느 부대 어디까지 후퇴. 무슨 부대 무사히 어느 지점까지 철수!』

맥없이 밀려가는 남쪽 뉴스를 들으며 다시금 라디오를 두들긴다.

『도대체 남한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무섭고 억압된 북한 사정을 상상이나 하는지』



자꾸만 밀려가는 정세에 실망하며 그래도 매일같이 날아와 폭탄을 투하하는 남한 비행기를 후련한 마음으로 올려다 보고 있었다.

『자꾸 와서 쳐라! 매일 와서 폭격을 해야 한다니까!』


죽음을 싣고 오는 폭격기를 반갑게 기다리는 북한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제트기 편대의 하늘을 찢는 소리, 공중을 선회하며 차례 차례 목표를 향해 급강하, 로켓 포탄의 작렬하는 소리가 고막을 찢는다.


몇 번인가 반복하고 전투기 날아가면 이윽고 고공비행의 폭격기 소리와 함께 점선을 그으며 줄지어 폭탄이 떨어진다. 기분 나쁜 바람과 함께 대지가 진동한다.



무섭고도 아름다운 야간 공중 폭격



밤은 밤대로 말로만 듣던 조명탄이 캄캄한 밤하늘에 보름달같이 둥글게 수없이 공중에 걸린다. 낮보다 더 밝은 밤에 공중 폭격이 시작된다. 정말 무서웠다.


그러나 꿈많던 소녀 시절이기에 둥근 조명탄이 아름다운 만월같이 터지는 폭탄의 불똥이 무수한 반짝이는 별들처럼 공포 속에 순간의 착각을 일으킨다.


9·28 수복. 마음이 떨린다. 戰勢(전세)가 호전되기만 바라며 차츰 치열해가는 전쟁, 그리고 폭격 속에 국군과 UN군의 전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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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접어들었다. 국군이 입성했다. 태극기를 들고 어른 아이 목청 돋워 만세를 부른다. 탱크 소리 요란하고 줄 잇는 군용트럭 그 양옆을 땀에 젖은 군복에 총부리를 겨누고 北으로 전진한다.


젊은 국군장병들과 UN병사들이 여유 있는 웃음 속에 윙크를 하며 손을 흔든다.
쫓겨가는 인민군, 전진해가는 국군 다 같은 우리네 귀한 아들들인데 그들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의 눈과 생각이 평등하지 않았다. 인민군을 미움의 눈으로 바라보고 국군에겐 힘찬 박수를 보냈다.


공산체제를 싫어하고 자유를 갈망하던 5년 간의 억압 속에서의 나온 마음의 발로였다. 겁먹고 쫓기는 인민군, 뒤쫓는 국군. 同族(동족)끼리의 이 가슴 아픈 현실이 UN군의 진격으로 통일로 이어지길 바랐던 희망과 기쁨도 잠시, 북 치고 피리 불며 압록강을 건너 중공군이 물 밀듯 내려오고 있었다. 이제 우리 북한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전세는 다시 바뀌었다. 추위와 피로에 지친 국군과 UN군이 묵묵히 철수하기 시작했고 인민군은 또다시 총부리를 겨누고….



아버지 따라 대동강 다리 건너다


찬바람 부는 겨울날 길을 메우며 피난민 대열이 이어졌다.

『우리도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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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런데도 우리는 비행기가 더 자주 뜨기를, 바다 쪽으로부터 들리는 함포사격이 더 치열해지기를 기다리고 거기 희망을 걸었다 ....... ]



[ ..... 우리 세대 대부분의 평범한 노인들 공통의 정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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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부에 비판적인 청소년들이 흔히 그랬듯 이북이 사회주의 낙원이란 선전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바뀐 세상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려고 했다. 나는 전혀 두려움 없이 바뀐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갔다. 나는 빈손이었지만 그 사이에 붉은 깃발까지 준비한 사람도 많았다.



그렇게 북쪽에 호의적인 사람들이 도열한 가운데 인민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진주해 들어왔다. 말로만 듣던 탱크와 따발총을 그때 처음 보았다. 상상도 못해 본 어마어마한 병력이었다. 꿈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탱크가 마치 양민들의 가슴팍을 밀고 들어오는 것 같은 공포감을 맛보았다.



그 후 공포의 나날이 계속됐다. 유엔군이 참전하고 미군 비행기가 서울 상공에 뜨기 시작했다. 굶주림과 공포정치의 무서움을 그 여름의 혹서는 더욱 잔인하게 달구었고 혹서가 누그러질 무렵 서울 상공은 밤낮없이 미군 폭격기 차지였다. 오폭도 잦아 민가 밀집 지역이 불바다가 되기도 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식량을 구하러 교외로 빠져나가던 민간인들이 머리 꼭대기까지 하강한 전투기의 무차별 기총소사를 맞고 잔혹하게 살해되는 일도 비일비재였다. 아마 따발총 맞고 죽은 수효보다 기총소사 맞고 희생된 민간인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비행기가 더 자주 뜨기를, 바다 쪽으로부터 들리는 함포사격이 더 치열해지기를 기다리고 거기 희망을 걸었다. 입 밖에 내지는 못했지만 속으로 열렬하게 미국의 병력이 이기라고 응원한 것은 따발총보다는 비행기가 더 강해 보이니까 이왕이면 강자 편에 붙으려는 비겁한 마음에서였을까. 아니다. 폭격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학정(虐政)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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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이라기보다는 꽃다운 나이에 6.25를 겪은 우리 세대 대부분의 평범한 노인들 공통의 정서라고 말하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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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620667

[중앙시평] 초여름 망필(妄筆)
[중앙일보] 입력 2005.06.21

박완서 소설가







[ ..... 쾅쾅 때려 부셔라! 쾅쾅 때려 부셔라! ....... ]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46> 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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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서 인민재판이 시작되고 돌과 죽창으로 사람을 때려죽이고 찔러 죽이는 증오와 원한의 피투성이 보복이 되풀이되었다.


밤낮으로 폭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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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이모들은 비행기만 나타났다하면 대낮에도 구석에 포개둔 이불속에 머리만 틀어박고 온몸은 훤히 드러낸 채로 덜덜덜 떠는 데에 똑같았고, 꿩이 그렇다던가,


큰집에선 반대로 옥살이 할아버지가 마당까지 일부러 나와 비행기를 쳐다보며 마치 비행기 조종사가 들을 수 있기라도 하듯이 주먹을 휘두르며 쾅쾅 때려 부셔라! 쾅쾅 때려 부셔라! 소리소리 지르셨다. 사랑하는 문태 숙부가 잡혀가 숱한 고생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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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나가면 친공적 교사들의 지휘통솔 하에 학교 운동장을 빙빙 돌며 행군하는 것이 다였다. 그 때마다 노래를 불렀는데 기억나는 것은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이란 김일성 노래와 학교 교사 정면에 붙여놓은 거대한 김일성 초상과 스탈린 초상이다. 새파랗게 젊은 김일성을 원수님이라 부르는 것도 이상했지만 코쟁이 스탈린을 대원수님이라고 부르라 하는 건 더욱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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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북한 기습적인 남침


1950년 10월 7일 인민해방군 4만여 명 티베트 지역 진격.

1950년 10월 19일 유엔군 평양 점령.

1950년 10월 19일, 약 20만 명의 '인민 의용군' 압록강 건너기 시작.

1950년 10월 26일 14시 15분

한국군 제6사단 제7연대는 마침내 한.만 국경선상의 초산을 점령하고 압록강변에 태극기를 꽂았다.

1950.12월 4일 평양철수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또 다시 빼앗겼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조인 즉시 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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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총장〓이 전쟁은 엄청난 피해를 기록했습니다. 추산으로는 북한은 인구의 28.4%인 272만여명을 사망과 난민으로 잃었고, 남한은 133만여명을 주로 사망자로 잃었습니다. 남과 북 모두에서 무고한 양민이 참으로 많이 학살됐습니다.

미국은 사망 실종자를 합쳐 6만3000여명의 희생자를 냈고, 중국은 100여만명의 희생자를 냈습니다.


남북 모두 국토 파괴와 재산 손실 역시 매우 컸습니다. 특히 남과 북 사이의 사회적 이질화를 한층 더 확대시키고 고착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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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30일 서울신문



전쟁 피해 통계



3년 유여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이번 동란도 27일 행하여진 휴전조건으로써 그 종막을 고하였는데 이번 동란 중 얻은 피해상황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학교피해:교실파괴 또는 손상 33만 8,154교실

△인명피해상황:납치 4만 2,732명, 학살 12만 2,799명, 사망 23만 6,475명, 부상 22만 8,580명, 행방불명 29만 8,175명, 합계 92만 8,761명

△주택피해상황:전파 28만 1,782호, 반파 21만 3,478호, 합계 59만 5,260호

△기타:전재고아 및 부랑아 10만 명, 전재미망인 50만 명, 윤락여성 10만 명, 피난민 1,118만 3,428명






한국 전쟁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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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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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통계에 따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11.1%에 해당되는 113만 명의 인구가 전쟁을 통하여 사망하였고, 양측을 합하여 250만 명이 사망하였다. 80%의 산업시설과 공공시설과 교통시설이 파괴되었고, 정부 건물의 4분의 3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으며, 가옥의 절반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미군은 약 54,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이는 베트남 전쟁 때보다는 약간 적은 수이지만 훨씬 짧은 시기에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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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통계에 따르면, 60만 명이 전쟁 중에 사망하였고, 전체 참전국의 사망자를 모두 합하면 2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의 사망자는 백여만 명이 넘으며 그중 85%는 민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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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백만 명이 죽은 전쟁이 얼마 전이었는데 군인들로선 사회 혼란이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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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도 장면을 동정한다. 그런데 2~3년을 기다릴 수 없었던 이유는 휴전선이다. 수백만 명이 죽은 전쟁이 얼마 전이었는데 군인들로선 사회 혼란이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장면은 쿠데타 나니 사라졌는데 그게 국군이 아니고 북한군이었다면 나라가 어떻게 됐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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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김호기 토론: ‘5·16은 쿠데타로 시작, 혁명으로 끝났다’

2011.5.







[ ...... 중·고등학교 학생들까지 통일문제를 북한 학생들과 토론한다며 판문점행을 허가해 달라고 데모를 .......

..... 제발 데모 좀 그만하라는 데모까지 ........ ]



[ ..... 또다시 북한의 남침을 걱정하는 시민들도 많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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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우리 사회상은 그야말로 극심한 무정부적 혼란시기였다.


모든 서울의 거리들은 각계각층의 데모로 날이 새고 날이 저물었다.


중·고등학교 학생들까지 통일문제를 북한 학생들과 토론한다며 판문점행을 허가해 달라고 데모를 했고, 심지어는 제발 데모 좀 그만하라는 데모까지 등장한 판이었다.

당시 장면 국무총리가 하는 일이란 허구헌날 데모대 앞에서 요구조건에 대해서 해명하고 정부의 입장을 설명하느라 아무 일도 못했을 정도다. 그런 무질서의 틈을 타서 또다시 북한의 남침을 걱정하는 시민들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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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3. 횃불데모는 한밤중까지 계속


[ ..... 진압대의 얼굴을 불타고 있는 횃불로 바로 찔렀다. .......

..... 데모대는 무소부지(無所不至)의 형세로 서울 시내 거리 어디에라도 ....... ]



[.... 배후에서 실무적으로 은밀히 주도했던 인물은 유병묵...사회당 조직부장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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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악법 반대 데모의 이면



장면(張勉) 정권 아래 진보세력의 반(反)정권 투쟁에 있어 군중투쟁의 절정을 이룬 것은 ‘2대 악법 반대투쟁’이었다. 이 투쟁은 당시 장면 정권이 국회에 제출해 가결시키려 했던 ‘반공임시특별법’과 ‘데모규제법’을 폐기시키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2대 악법 반대투쟁의 절정은 1961년 3월22일 밤 8시부터 시청 앞에서 시작된 야간 횃불데모 때였다.


횃불데모는 한밤중까지 계속됐다. 마침내 통제를 이탈한 일부는 중앙청에서 안국동을 지나 장면 총리의 사저로 향해 혜화동에 이르렀다. 데모대와 경찰대가 서로 대치하다 데모대의 맹공으로 방어선이 뚫리자 경찰은 최루탄 30여 발을 쏘아 겨우 데모를 진압했다. 이는 국내 시위 진압사에서 최루탄의 위력을 실감시킨 첫 사건이었다.


당시 경찰은 끝내 찾아내지 못했지만, 이 데모 계획을 배후에서 실무적으로 은밀히 주도했던 인물은 유병묵(劉秉默) 선생이었다. 유병묵은 일제 강점기부터 여운형(呂運亨)의 측근으로 해방공간에서는 조선인민당·근로인민당 창당에 관여했고, 2대 악법 반대 데모 당시에는 최근우(崔謹愚)의 사회당 조직부장으로, 사실상 당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계획에 따라 3월22일 오후 2시, 혁신계 총 연합 세력은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밥 달라 우는 백성, 악법으로 살릴소냐!” “데모가 이적이냐, 악법이 이적이냐!”라는 구호 아래 ‘2대 악법 반대 성토대회’를 열었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혁신계에 속한 조직 대중이 아니라 대부분 비조직 군중이었다. 우리는 빌려온 낡은 지프차에 마이크를 달고 아침 일찍부터 서울 시내 일원을 반복해 순회하면서 “오늘 오후 우리 모두 시청 앞 광장에 집결해 4·19혁명의 민주성과를 폐기하려는 장면 정권의 파쇼적 폭거를 시민의 힘으로 막자”고 선동했고, 그 결과 많은 군중이 집결할 수 있었다.



오후 8시, 어둠이 밀려오는 시청 앞 광장에서 야간 데모를 시작할 때 나는 데모대의 최전열에서 전진했다. 손에 든 횃불은 방어용 수단으로는 더없이 좋았다. 나는 장창처럼 긴 각목 끝에 석유에 적신 솜뭉치를 철사로 단단히 묶은 다음 거기에 불을 붙여 횃불로 만들었다. 그러고선 횃불의 불타는 끝을 전방으로 향하게 하는 공격 자세로 데모에 나섰다.


좌우와 뒤를 훑어보니 혁신계 정당의 장년 선배들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서로 격려 한마디 할 겨를이 없었다. 대열을 짓자마자 데모대를 짓밟으려는 경찰 진압대가 횃불 창 끝이 닿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서 몽둥이를 휘두르며 육박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전열의 우리는 육박해오는 진압대의 얼굴을 불타고 있는 횃불로 바로 찔렀다. 사실 이는 대단히 위험한 동작이었다. 우리의 장창형 횃불이 경찰 무장보다 길었고 우리의 동작이 무자비했으므로 최초의 밀집 충돌에서 경찰의 대오는 그대로 밀려나 붕괴됐다.



기마대도 출현했으나 우리가 횃불로 지지는 바람에 말이 놀라 도망치면서 아무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데모대는 무소부지(無所不至)의 형세로 서울 시내 거리 어디에라도 가고 싶으면 마음대로 진출할 수 있었다. 나도 다 타버린 ‘횃불창’을 버리고 어둠의 장막이 내려진 서울 거리를 구두닦이, 양아치와 어깨동무해 “밥 달라 우는 백성, 악법으로 누를쏘냐”라고 목이 쉬도록 외치며 하염없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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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5.


[ .....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결성준비위원회가 생겼다. ......

......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남북 학생 판문점에서 만나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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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4월혁명 후 통일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극우 세력은 이를 사회 혼란으로 규정했다. 일각에서는 이런 혼란 때문에 '5.16혁명'이 불가피했다는 주장도 한다.



서중석 : 1960년 가을 들어 중립화 통일안이 퍼진다. 1961년 2월엔 민족자주통일협의회(민자통)가 생기면서 통일 문제가 강하게 제기됐다. 이 무렵 2대 악법 반대 투쟁도 일어났다. 장면 정부가 반공법하고, 나중에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로 알려졌는데 이때는 데모 규제법이라고 불린 걸 만들려고 하니 반대 운동이 당연히 벌어진 것이다.


1961년 5월 초에는 서울대 민족통일연맹(민통련, 1960년 11월 발기 모임이 열림)을 넘어 19개 대학에서 참여한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결성준비위원회가 생겼다. 그러면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남북 학생 판문점에서 만나자", 이러지 않나.



이것 때문에 5.16쿠데타가 일어났다고 볼 수는 없다. 쿠데타 세력은 훨씬 이전부터 계획을 세워놓았다. 참 좋은 핑계거리를 줬다고는 볼 수 있다. 어쨌건 반공 의식을 강하게 가진 일반인 중 상당수가 이걸 불안하게 볼 수는 있었다. 더군다나 극우 반공 세력은 그렇잖아도 여러 가지가 불안한 상태였다. 군부에서도 일부는 이런 걸 불안하게 생각하지 않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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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구한 박정희? 장준하는 왜 그리 판단했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48> 5.16쿠데타, 일곱 번째 마당
김덕련 기자, 최하얀 기자

2014.06.25 프레시안







“가자 북으로,오라 남으로,만나자 판문점에서”


1961.5.13. 민자통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통일촉진 궐기대회'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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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ㆍ19민중항쟁은 제2의 8ㆍ15해방처럼 열린 정치공간을 창출하였다. 그에 따라 정치권에 나타난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이른바 ‘혁신세력’의 등장이었다. 이들 혁신세력 중 상당수는 ‘혁신정치세력’으로서 상층의 정당 정치활동에 주력하였다. 이들과 달리 혁신정당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기층 민중의 광범한 조직화를 바탕으로 대중운동을 중시하며 활동하였던 ‘혁신운동세력’은 4ㆍ19 이후 새롭게 형성된 각 혁신정당과 사회단체를 망라하여 민족자주통일협의회를 조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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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자통은 경남, 경북, 전남, 전북, 충남 등 5개 도협의회를 기반으로 중앙협의회를 구성하여 명실상부한 전국 단위의 조직을 형성하였다. 전국적으로 5만 명의 회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이야기되었는데, 사회운동 단체로서는 6·25전쟁 이후 최대 규모라 할 수 있다. 각 지방에서도 민자통 지방협의회의 주도로 자체적인 대중운동을 수행할 만큼 자기 완결성을 갖춘 지방 조직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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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자통은 학생들의 남북학생회담 제의도 적극 지지하여 1961년 5월 13일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통일촉진 궐기대회'를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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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민자통은 “남북학생회담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는 취지의 결의문을 채택한 후 “가자 북으로,오라 남으로,만나자 판문점에서” , “UN군은 남북학생회담의 모든 편의를 제공하라” , “나가자 통일의 광장으로” 라는 구호를 외치며 중앙청 앞까지 시위행진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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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5. 사상계 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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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61년 5.16 군사혁명 직후 지식인들의 잡지인 ‘사상계(장준하 선생)’의 권두언(卷頭言)을 보면 당시 지성인들이 청년장교의 혁명을 기다려 왔고 이에 적극 지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5.16 군사혁명 직후에 발간된 사상계 권두언(卷頭言) 내용을 그대로 아래 인용한다.



5.16 혁명과 민족(民族)의 진로(進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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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정에 달한 국정(國政)의 문란, 고질화(固疾化)한 부패, 마비상태에 빠진 사회적(社會的) 기강(紀綱)등 누란의 위기에서 민족적(民族的) 활로(活路)를 타개하기 위하여 최후수단으로 일어난 것이 다름 아닌 5.16 군사혁명(軍事革命)이다.


4.19 혁명(革命)이 입헌정치(立憲政治)와 자유(自由)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혁명(民主主義革命)이었다면, 5.16 혁명(革命)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無秩序)와 공산주의(共産主義)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民族主義的) 군사혁명(軍事革命)이다.


따라서 5.16 혁명(革命)은 우리들이 육성하고 개화(開花)시켜야 할 민주주의(民主主義)의 이념(理念)에 비추어 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위급한 민족적(民族的) 현실(現實)에서 볼 때는 불가피(不可避)한 일이다. 그러나 이번의 군사혁명(軍事革命)은, 단지 정치권력(政治權力)이 국민(國民)의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넘어갔다는데서 그친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혁명공약(革命公約)이 암암리에 천명하고 있듯이, 무능(無能)하고 고식적(姑息的)인 집권당(執權黨)과 정부(政府)가 수행하지 못한 4.19 혁명(革命)의 과업을 새로운 혁명세력(革命勢力)이 수행한다는 점(點)에서 우리는 5.16 혁명(革命)의 적극적 의의(意義)를 구(求)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에서는 5.16 혁명(革命)은 4.19 혁명(革命)의 부정(否定)이 아니라 그의 계승(繼承), 연장(延長)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냉철히 생각할 때, 4.19 일년 만에 다시 정변(政變)을 보지 않으면 안 된 이 땅의 비상(非常)하고 절박한 사태에 대한 책임을 우리는 어느 한 정당(政黨)이나 개인(個人)에다만 전적(全的)으로 뒤집어씌움으로써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 배후에서 또는 주변에서 사회적(社會的)혼란(混亂)을 선동한 방종 무쌍했던 언론(言論), 타락한 망국적(亡國的) 금력선거(金力選擧), 이미 도박장으로 화(化)한 국회(國會), 시세에 끌려 당쟁(黨爭)에만 눈이 어두웠던 소위 정객(政客)들에게도 책임이 적지 않으며, 보다 넓은 의미에서는 국민각자(國民各自)에도 다소를 막론하고 간접적 책임이 있음을 우리들은 준렬하게 자아반성(自我反省)하지 않을 수 없다.


5.16 군사혁명(軍事革命)으로 우리들이, 과거의 방종, 무질서(無秩序), 타성(墮性), 편의주의(便宜主義)의 낡은 껍질에서 자기탈피(自己脫皮)하여 일체의 구악(舊惡)의 뿌리를 뽑고 새로운 민족적(民族的) 활로(活路)를 개척할 계기는 마련된 것이다.


혁명정권(革命政權)은 지금 법질서(法秩序)의 존중, 강건한 생활기풍(生活氣風)의 확립, 불량도당(不良徒黨)의 소탕, 부정축재자(不正蓄財者)의 처리, 농어촌(農漁村)의 고리채정리(高利債整理), 국토건설사업(國土建設事業) 등에서 괄목할만한 출발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누백년(累百年)의 사회악(社會惡)과 퇴폐한 습성(習性), 원시적(原始的) 빈곤(貧困)이 엉크러져 있는 이 어려운 조건 밑에서, 정치혁명(政治革命) 사회혁명(社會革命) 도덕혁명(道德革命)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이해(理解)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혁명정권(革命政權)이 치밀한 과학적(科學的) 계획(計劃)과 불타는 실천력(實踐力)을 가지고 모든 과제를 해결해 나아갈 것을 간곡히 기대하는 동시에 동포들의 자각(自覺)있는 지지(支持)를 다시금 요청해서 마지않는 바이다.


불리(不利)한 지정학적(地政學的) 위치와 막다른 정치적(政治的) 한계상황(限界狀況)에서, 국제공산제국주의(國際共産帝國主義)와 대결하면서 자유(自由)와 복지(福祉)와 문화(文化)의 방향으로 국가(國家)를 재건(再建)하여야할 우리들의 민족적(民族的) 과업은 크고도 어렵다. 이제 모든 정치권력(政治權力)은 혁명정권(革命政權)에 집중되었고, 혁명정권(革命政權)은 민족백년(民族百年)의 운명을 그 쌍견에 짊어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혁명정부(革命政府)는 우리사회를 첩첩히 억매고 있는 악순환(惡循環)의 사슬을 대담하게 끊어야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민정(民政)아닌 군정(軍政)의 의미(意味)가 있는 것이요, 혁명(革命)의 가치가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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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ewstow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4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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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6.25. 동아일보



오호! 조국

< 6.25 11주에 즈음하여 >



조병화



인간의 역사가 그러하였고
그러하듯이
후일의 역사가는
오늘 이날을
'1950년 6월25일 북한공산군 남침하다'
이렇게 그저 한줄로 정리해버리겠지만
그렇게 정리를 당하기엔
너무나 비참한
생생한 현실
불구의 가족, 불구의 나라, 불구의 기억이 아니냐



아 ! 인간의 역사가 그러하였고
그러하듯이
후일의 역사가는
오늘 이날을
'1950년 6월25일 북한공산군 남침하다'
이렇게 그저 한줄로 해치워버리겠지만
그 공포, 그 불안, 그 학살, 그 파괴,
그 약탈, 그 기아, 그 린치,
그 고문,


살륙의 백주에서
너와 나의 생존은 창백한 기적
인간불모의 그저 먼지였다



생명은 내것도 아닌 것
네것도 아닌 것
2천만, 천만, 합하여 3천만
조국이라는 이름의 하나
우리의 것


조국이여
보금자리여



죽어간 사람과 남은 사람이
기억 속에서 만나는 오늘
너와 나는
서로 사랑을 기르자
인간의 역사가 그러하였고 그러하듯이
후일의 역사가는
오늘 이날을 단 한줄로 정리해버리겠지만
아! 너무나 으스러진
너와 나의 가슴



자유여 !
호흡이여 !
손목이여 !








[ .....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였습니다. 뭔가가 일어나야 한다는 분위기였지요. .......

..... 5·16이 터지자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 ]




[ .... 쿠데타에 대해 거부감 ... 대부분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

..... 혁명을 일으키려고 한 세력이 박정희 외에도 여럿 있었어요. ........



...... 민주당은 자기들끼리 신파와 구파로 나뉘어 허구한 날 싸움판을.......

..... 부산에서는 학생들이 판문점에서 이북 학생들을 만나겠다고 올라오질 않나…

...... 서울 거리는 ‘데모크레이지(demo-crazy)’였어요. 매일같이 시위만 했습니다. ........ ]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③]


‘박정희 축출’ 다짐했던 미국, 베트남 파병 대가로 정권 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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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당시가 반공이 불가피한 시기였다는 점입니다. 5·16 쿠데타가 일어날 무렵 북한은 군사·경제적으로 상당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어요. 소련, 중공과 군사동맹도 맺고 있었고. 반면에 우리는 내외적인 위협에 의해 언제 무너질지 모를 상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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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 저 개인적으로는 박정희를 하나의 잣대로 평가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시기적으로 몇 단계로 나눠서 이뤄져야 할 것 같아요. 특히 5·16 직후의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그 이후의 평가와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군사혁명이 좋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5·16이 나던 무렵은 도저히 나라가 유지될 수 없는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였습니다. 뭔가가 일어나야 한다는 분위기였지요.


4·19는 학생들이 주도했지만, 4·19 이후 들어선 민주당 정부가 제 역할을 못하는 바람에 학생들도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역할을 더 많이 했습니다. 오히려 혼란을 조장했다고 할까요. 그래서 지식인들 중에는 비록 바람직하진 않지만, 보다 건전한 생각을 가진, 애국심으로 충만한 군인들이라도 나와줬으면 좋겠다고 바라던 이가 적지 않았어요. 그랬기에 저는 5·16이 터지자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윤보선씨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또한 5·16이 좌익혁명이 아니라는 게 분명해졌고, 박정희라는 사람을 직접 만나고 보니 상당한 기대를 걸게 됐어요.



‘민생고 해결’ 다짐과 청렴함에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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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제가 그를 호의적으로 본 것은 혁명공약 중에 국민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키겠다는 내용(‘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박정희씨는 정말 가난한 농촌에서 농민의 설움이 뭔지, 굶주림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자란 사람입니다.


그래서 “민생고를 해결하고 부정부패를 뿌리뽑으면 자연히 국민의 지지를 얻을 것이고, 그러면 저절로 민주주의를 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습니다.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독재할 생각일랑 말고 민생부터 챙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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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에 제가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본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매우 청렴하게 살았다는 점입니다. 그때 박정희 반대자들이 ‘박정희 집에는 피아노가 스무 대나 있다’는 등의 소문을 퍼뜨렸는데, 그건 다 중상모략입니다. 제가 잘 알아요. 박정희는 우리 교회에 나오던 박덕혜 집사의 바로 옆집에 살았는데, 아주 작은 기와집이었습니다. 5·16 후에도 거기서 살았죠.


박 : 신당동 집 말입니까?


강 : 그래요. 5·16이 일어난 뒤에 저도 가봤는데, 낮에는 집이 눈에 잘 띄지도 않았어요. 늦은 밤에 군인 몇 명이 그 앞에서 보초를 서는 걸 보고서야 박정희 집인 줄 알았죠.

제가 박정희에게 기대를 건 또 하나의 이유는 박정희라는 이름이 쿠데타 이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당시에 육군 소장쯤 되면 모를 사람이 없었어요. 대부분 정치군인들인 데다가 부정부패로 엄청난 재산을 모았거든요. 우리 교회 옆에도 양모라는 육군 소장이 살았는데, 아침마다 그 집 앞 쓰레기통에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정도예요.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다 남긴 갈비 같은 걸 가져갔어요. 장군들이 거의 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박정희라는 이름을 제가 전혀 몰랐다는 것은 그만큼 돈 먹지 않고 살았다는 얘기 아니겠어요?



미국, 한국민 반응에 당혹


박 : 5·16이 터지자 ‘올 것이 왔다’고 하셨다는데, 윤보선씨는 그 말 때문에 쿠데타 1년 후인 1962년부터 지금껏 논쟁에 휘말려 왔습니다. 과연 그 말이 무슨 의미였을까요(윤보선 대통령은 1961년 5월16일 아침 혁명군 박정희 소장과 유원식 대령(훗날 국가재건최고회의 재경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올 것이 왔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1년이 지난 1962년 5월 유원식의 진술로 밝혀졌다. 유원식은 이에 대해 “윤보선이 이전부터 쿠데타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았고 이를 방조했다”고 주장한 반면, 윤보선은 이를 부인하며 “혼란한 장면 정부하에서 무슨 사태가 터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쿠데타가 일어났다기에 그렇게 말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이는 쿠데타에 대한 윤 대통령의 애매한 태도와 연결되어 현재까지도 논란을 빚고 있는 부분이다)?


강 : 그 말이 일부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윤보선씨가 쿠데타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닐 거예요.


박 : 사전에 쿠데타 모의를 알고 있었던 게 아니냐는 논쟁을 낳은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강 : 윤보선씨가 공개적으로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해요. 다만 당시 윤씨는 장면 정권의 실정에 대해 크게 실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죠. 어떤 의미에선 쿠데타를 성공시킨 게 윤보선씨일 수도 있어요. 당시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가 윤 대통령에게 “사인만 하시면 쿠데타군을 진압하겠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윤보선씨가 “우리 한국에선 며느리가 물에 빠져도 시아버지가 들어가서 안고 나오지 못한다”는 식으로 얘기를 한 거예요. 박정희를 물리치려면 또 피를 흘려야 할 텐데 그건 못하겠다고 거절한 겁니다. 결과적으로 그래서 쿠데타가 성공한 것 아닙니까(당시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던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은 그린 주한 미국 대리대사와 함께 1961년 5월16일 오전 11시 윤보선 대통령을 찾아가 쿠데타군을 진압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윤대통령은 이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면서 거국내각 수립 필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이는 장면 정부에 대한 윤보선 대통령의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주는데, 매그루더 사령관은 이러한 윤보선의 입장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고 이것을 곧 워싱턴에 보고했다-박태균·‘5·16 쿠데타와 미국’ ‘역사비평’ 2001년 여름호 참조).




무성한 쿠데타說



박 : 5·16 쿠데타와 관련해 여쭤보고 싶은 게 또 하나 있습니다. 당시 미국대사관에서 워싱턴에 보낸 문서들을 보면 한국의 상황이 이상하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쿠데타가 일어났는 데도 한국인들이 조용하다는 거예요. 쿠데타가 일어나면 국민들이 합법 정부를 지지하고 쿠데타에 반대하는 소요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당시 쿠데타 정부에 대한 지식인들의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강 : 제가 보기에는 상당수 지식인들이 지지했어요. 올 것이 왔구나 싶어서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그럴 만도 했죠. 민주당 정부는 도무지 나라를 끌어갈 수 없는 정부였어요. 한마디로 완전히 카오스였습니다. 수습할 수 없는 상태였어요. 오죽하면 ‘독재는 나쁘지만 무질서보다는 낫다’는 말이 나왔겠습니까. 그러니 뭔가 일이 터져서 ‘정리’를 해야 선거라도 치를 수 있지 않겠나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일반 국민 중에도 미국 사람들이 본 것처럼 쿠데타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이들이 좀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때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죠. 때문에 그 무렵엔 혁명을 일으키려고 한 세력이 박정희 외에도 여럿 있었어요. 내가 알기에도 두세 군데는 됩니다.


박 :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죠.


강 : 가령 김홍일 장군은 저더러 “이러이러한 계획이 있으니 도와달라”고 했고, 그밖에 이범석에게도 모종의 계획이 있다, 이한림 장군도 움직인다는 등의 말이 많이 돌았어요(실제로 당시 미 CIA 한국지부에서는 박정희와 관련된 쿠데타설 외에 이범석을 중심으로 한 민족청년단의 쿠데타 음모에 대한 정보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저는 혁명이 어디에선가는 일어나리라고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저도 협조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니 혁명이 성공해서 그 사람들이 뭘 같이 하자고 하면 입장이 무척 난처할 것 같고, 실패해도 모의한 사람으로 연루될 것 같아서 그런 상황을 피하려고 일단 일본으로 떠났죠. 책에는 교회 일로 갔다고 썼지만.


박 : 일본으로 가신 게 정확히 언제입니까.


강 : 1961년 5월 초인 듯합니다. 1962년 4·19 2주년 무렵을 계기로 어디선가 혁명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어요. 민주적인 국민선거를 통해 민주당 정부가 선 지 8개월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그걸 못 참고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8개월 만에 민주당 정부는 완전히 죽을 쑨 겁니다. 의거를 일으킨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가면서 민주당에 정권을 맡겼는데, 민주당은 자기들끼리 신파와 구파로 나뉘어 허구한 날 싸움판을 벌였습니다(신파는 장면 계열로 1955년 민주당이 결성될 때 민주당에 합류한 원내 자유당 계열, 흥사단 계열 등으로 구성됐다. 구파는 1945년에 결성된 한국민주당과 1949년 한국민주당을 모태로 조직된 민주국민당의 주도세력들을 의미한다).


결국 신파가 내각의 실권을 잡았는데, 신파 내부에서도 노장파와 소장파가 대립하면서 자기들끼리 싸움하느라고 아무것도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마당에 부산에서는 학생들이 판문점에서 이북 학생들을 만나겠다고 올라오질 않나…4·19로 데모크라시(democracy)를 쟁취했지만, 당시 서울 거리는 ‘데모크레이지(demo-crazy)’였어요. 매일같이 시위만 했습니다.
그러니 이북의 움직임이 걱정될 수밖에요. 그런 시점에 쿠데타가 터졌기에 군사혁명 자체를 반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군인들이 집권하는 것에 대해 불안감은 있었지만, 식자들은 대부분 ‘당장은 할 수 없지 않겠나, 좀 기다려보자’는 태도였죠.


박 : 쿠데타 직후 시기에 대해서는 너무 부정적으로 볼 이유가 없다는 말씀이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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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는 높이 평가받아야



박 : 저도 목사님 생각에 동의합니다. 박정희를 평가하면서 부정적이다, 혹은 긍정적이다 하면서 전생애를 한칼로 잘라 판단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강 : 그렇습니다. 뭐든지 일도양단해서 한 쪽만 보려하는 데서 역사적 평가에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경제만 해도 그래요. 실제로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우리 경제라는 건 경제라고 할 수도 없었어요. 그야말로 기아에 허덕이는 농업국가였습니다.


제가 지금도 박정희씨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 양반이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 진심에서, 자신의 생래적 양심에 따라 이들 굶주리는 국민을 가난에서 해방시키고자 했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하면 농민들이 제대로 벌어먹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경제를 살려 기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경제발전을 위해 자기개혁을 독려한 것은 그 목적도 순수했고, 성과도 상당했습니다. 이런 점은 분명 높이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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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권 9개월여의 기간 중, 3회의 전면개각이 있었고, 국무위원의 평균 재임기간은 2개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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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공화국헌법은 전반적으로 입헌주의 성격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장면(張勉)총리의 민주당(民主黨)정권 하에서 헌정의 실제는 매우 불안정하였다. 집권 9개월여의 기간 중, 3회의 전면개각이 있었고, 국무위원의 평균 재임기간은 2개월 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