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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빨갱이가 판을 치는구려
icon 수박 빨갱이가 판을 치는구려
icon 2019-05-05 23:32:18  |   icon 조회: 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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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강간과 '다와이'… 짐승만도 못한 ‘야만적인 소련軍’


[88세 老記者의 現代史 체험①] 개가 交尾(교미)를 해도 구경꾼이 몰려드는 데, 번잡한 네거리에서 한 여자를 뉘어놓고 5~6명의 병사가 집단 강간을 하고 있었다.




金鏶(체험수기 우수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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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鏶



1928년 평양 출생으로, 1948년 단신으로 월남하였다. 1955년 <대구매일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부산 <국제신문>을 거쳐 <동양방송> 기자로 재직했다. 1974년 KBS 對北방송 사회교육 전문위원을 지냈고, 1988년 정년퇴직하였다. <동양방송> 기자로 판문점을 담당하고 있던 1967년 3월22일, 李穗根(이수근)의 북한 탈출 全과정을 생생하게 취재해 보도하는 역사적인 특종을 했다.




소련軍의 만행



16세, 중학교 3학년 때 해방이 되었다. 日帝(일제) 식민지 때에도 공산주의니 민주주의니 하는 말은 듣고 있었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를 못했다. 하지만 해방이 된 지 보름도 안 되어 공산주의가 어떤 것인지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방된 지 이틀 후인 17일 평양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고 중학교 3년 이상 남학생들은 학생 治安(치안)대원이 되어 평양의 주요거리들에 배치되었는데 22일부터 소련군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USA 표시가 분명한 미국제 지프와 트럭을 탄 소련 군인들이 평양거리에 밀려들어오자 거리 곳곳에서는 ‘다와이(약탈)’ 소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어느 날 전차길이 있는 평양의 번화가를 걷고 있었는데 지프를 타고 접근해 온 소련군 장교가 내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다와이’를 연발하기에 그 시계를 벗어 줄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입학기념으로 아버지가 사준 ‘스위스 12석’ 손목시계였다.


자기들이 해방시켜 주었다는 식민지의 중학생 손목시계를 ‘다와이’하는 이 장교를 보면서 ‘공산주의는 사람 못살 주의로구나’라고 직감하게 되었다.



손목시계를 ‘다와이’ 당한 지 이틀 후, 나는 평양에서 가장 번화한 조선은행 앞 네거리에서 대낮에 소련군 병사들이 집단 강간을 하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개가 交尾(교미)를 해도 구경꾼이 몰려드는 데, 번잡한 네거리에서 한 여자를 뉘어놓고 5~6명의 병사가 집단 강간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소련 군인 하나가 다발총을 하늘에 대고 드르륵 드르륵… 쏘면서 고함을 치는 소리가 ‘카레스케 노- 야폰스키’(조선 사람 아니다. 일본 사람이다) 참으로 짐승보다도 못한 야만이었다.


소련 군인들의 집단 强姦(강간)소동은 일본인만이 아니었다. 밤에는 조선인 거주지역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때문에 큰 거리에서 주택가로 들어오는 골목길 입구에는 나무판자와 철조망으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작은 출입구를 만들어 놓고 보초를 서게 되었는가 하면 한옥집 조선인 거주지역들에서는 소련 군인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부엌에 들어가 가마솥 뚜껑을 들고 나와 두들겼다.


그러면 집집마다 가마솥 뚜껑을 부지깽이로 두드리게 되고 여자들은 숨고 남자들은 골목 밖으로 나와서 침입해온 소련 군인들을 다른 곳으로 쫓아내었다. 이래서 해방이 된 평양에서는 편하게 잠잘 날이 드물었다.



내가 다니던 평양사범학교의 경우는 수업시간에도 소련 군인들의 ‘다와이’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우리 학교는 평양 비행장 옆에 있었던 탓으로 소련군이 점유한 까닭에 평양역 부근 일본인 소학교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2층인 이 학교의 아래층에는 만주에서 철수해 온 일본인 피난민들이 있었고 우리는 2층에서 공부를 했다.


소련 군인들은 우리가 수업중인 대낮에도 이 피난민들을 습격했다. ‘마담 다와이‘(여자를 내놔라)를 연발하며 소련 군인들이 들이닥치면 ‘○○옥상(부인) 야라렛다요(당했다)’ 등 비명소리와 함께 이리저리 도망치는 피난민들로 온 학교 건물이 소란스러웠다. 이래서 일본인 피난민 속의 젊은 여자들은 얼굴에 검댕이 칠을 하고 누더기 옷을 입고 있었다.



소련군인들의 행패는 일본 피난민만이 아니었다. 우리 학교 음악실에 있던 온갖 악기들을 한밤중에 몽땅 털어간 사건도 있었다. 이러니 ‘우리를 해방시켜주신 위대한 소비에트를 향하여 배우자’는 소련 앞잡이 공산주의자들의 말이 학생들의 귀에 담아질 수가 없었다.



‘소련製 김일성’의 등장과 反蘇 학생운동



1945년 10월14일 ‘소련製 김일성’이 등장하면서부터 북한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이날 모란봉 공설운동장에서는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는데 처음에는 ‘소련군 환영 군중대회’라고 하더니 ‘김일성 장군 환영 군중대회’로 둔갑하였다.



이 군중대회에서 소련 軍政 장관 ‘로마넨코’는 30대 초반의 젊은이를 내세워 김일성이라고 하면서 ‘민족적 지도자요 절세의 애국자’라고 소개를 했다. 순간 군중들 속에서는 ‘가짜다…’라는 소리가 실망어린 한숨소리처럼 퍼져 나왔다. 평안도 지방에서는 ‘김일성 장군’이라는 항일투쟁 영웅에 관한 전설이 1920년대부터 널리 전해져 왔었으니 30대 초반의 ‘소련製 김일성’을 가짜라고 하게 된 것은 당연했다.



‘소련製 김일성’은 이때부터 이른바 ‘민주기지 노선’을 앞세우며 소련 군정의 지시에 따른 북한지역의 공산화 작업을 강행하게 되었는데 공산주의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곧이듣지 않게 된 학생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11월7일 함흥 ‘反共학생사건’에 이어 11월23일에는 신의주에서 反共反蘇(반공반소) 학생의거가 대규모로 터져 나왔다. 맨 주먹으로 봉기한 중학생들에게 인민위원회나 보안署(서) 공산 당사들에서는 처음부터 기관총과 小銃(소총) 심지어 소련군의 비행기로 機銃掃射(기총소사)까지 감행했다. 무자비한 무력진압으로 학생 23명이 피살되고 700여 명이 부상을 당했고, 1000여 명이 검거되어 그 중 100여 명이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대규모 反共反蘇 학생시위는 1946년 3월13일 함흥에서 또 발생, 일반 시민들까지 학생 편에 가세하여 보안署와 공산당 그리고 소련군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평양학생의 경우는 신의주나 함흥과는 그 양상을 달리한다. 평양에서는 소련군정이 左右同數(좌우동수) 인사로 구성되는 평남 인민정치위원회(위원장 曺晩植)을 앞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광복 초기에는 공산당과 학생들이 부딪치는 일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민족진영과 함께 모스크바 3相회의 결정인 신탁통치를 반대하던 공산당이 소련의 지시로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변하자 판세는 급변했다.


신탁통치를 완강히 반대해 온 曺晩植을 고려호텔에 감금하고 공산당 一色으로 ‘평남인민정치위원회’를 ‘평남인민위원회’로 개편했는가 하면,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수립했다. ‘임시’字만 붙어있을 뿐 사실상의 ‘북한단독 공산괴뢰정권’의 시초다.



평양서 불 붙은 학생운동


이로 말미암아 민족진영 인사들이 대거 38선 이남으로 넘어가게 되어 평양의 분위기는 매우 어수선 할밖에 없었다. 이 같은 변혁은 해방 이후 학생들의 첫 겨울방학 동안 있었던 일이다. 개학이 되자 각 학교의 학생 자치회 활동이 활발해지고 소련의 지시로 신탁통치 찬성을 선전하더니 토지개혁 등 공산화작업에 몰두하게 된 김일성 일당을 주시하게 된다. 여기서 당면하게 된 게 1946년 3·1절 행사이다. 김일성 일당은 해방 이후 첫 3·1절 행사를 북한 공산화 작업의 기폭제로 계획하고 있었다.


이들은 각 학교 학생들을 3·1절 행사에 동원할 것을 지시하면서 이날에 사용될 구호까지 배정했다. 그 첫번째가 ‘우리를 해방시켜주신 위대한 소비에트 만세’였고 두 번째가 ‘…스탈린 대원수 만세’로 20개에 달하는 구호가 모두 소련과 공산주의를 찬양하고 공산화 개혁을 촉구하는 것들이고 맨 마지막 하나가 ‘조선자주독립만세’였다.



각 학교 자치회가 분개했다. 우리의 선열들이 ‘소비에트 만세’니 ‘스탈린 만세’나 부르자고 3·1운동을 일으켰단 말인가? 3·1절을 하루 앞둔 2월28일 각 학교 자치회장들은 평양 神學校(신학교)에 모여서 3·1운동을 모독하며, 북한공산화에 狂奔(광분)하는 공산도당에 항거하기 위해 무기한 동맹휴학을 결의, 이날 오후 각 학교별로 즉시 단행했다. 이래서 평양 驛前(역전) 광장에서 열린 3·1절 기념행사에는 단 한 명의 학생도 참가하지 않았고 그 후 40일 가까운 동맹휴학이 계속되었다.



한편 3·1절 기념행사는 평양 驛前 광장에서 열려 김일성이 주석단에 등장하여 연설을 시작하자 한 反共청년이 수류탄을 던졌으나 아쉽게도 김일성은 처단하지 못하고 소련 군인 한 명만이 부상하는 사건이 있었다.



소리 없이 끌려간 학생들



4월 초부터 학생들은 동맹휴학에서 벗어나 학교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날이 가도 보이지 않는 학생들이 있었다. 38선 以南(이남)으로 넘어갔는지 아니면 시베리아로 끌려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평양 학생들은 ‘공산당에 항거하는 동맹휴학은 했지만 신의주나 함흥에서처럼 공산당과 싸우는 행동은 하지 않았는데 시베리아로 끌려가기야 했겠는가’하고 자위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이러는 사이에 5월1일 ‘메이데이’ 행사에 동원되어 街頭(가두)행진을 하게 되었다. 학생들이 행진하는 평양거리의 요소마다 공산당이 배치한 선동원들이 학생대열을 향하여 親蘇공산구호를 선창하며 학생들이 이에 호응하도록 선동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마치 사전에 약속이나 한 듯이 전혀 호응하지 않고 묵비권 행진을 하였다.


행사 주최 측은 無言(무언)행진을 해온 각 학교 학생들을 평양시청 앞 광장에 집합시켜놓고 인민위원회 간부들이 격렬한 어조로 연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나서 구호들을 선창했다. 그래도 親蘇 공산구호에 아무도 따르지 않았다. 마지막에 한 간부가 ‘조선자주독립만세’를 선창했는데 이때는 모든 학생들이 시청광장이 떠나갈 듯한 우렁찬 함성으로 ‘조선자주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공산당은 각 학교들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사범학교의 경우는 여름방학이 끝나자 강동군 보안서장을 하던 자가 교장으로 부임해 왔으며 교실마다 김일성 초상화를 걸어 놓았다. 낯선 전입생이 늘어나더니 공산당의 하부조직인 ‘民靑’(민주청년동맹)이 침투해 왔다.



1946년 가을부터 1947년 봄에 걸쳐 각 학교들에서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없어지는 학생들이 생기게 되었다. 각 학교들에는 학생들의 동호인 모임이나 서클이 있기 마련인데 反共反蘇(반공반소) 사상 경향인 서클을 탐색해서 소리 없이 한밤 중에 잡아가는 일이 생긴 것이다. 反共反蘇사상이 있다고 해도 아무런 행동이나 표현도 하지 않은 동호인 모임이나 서클에 가담했다는 것만으로 한밤중에 집단체포해, 소련군 軍犯(군범)재판에 넘겨 시베리아로 끌어간다.


나의 경우는 ‘희망단’이라는 이름의 서클에 가담하고 있었는데 10여 명 회원이 모두 反共反蘇 행동을 한 바 없고, 단지 공산당 때문에 세상이 어렵게 되고 있지만 희망을 갖고 살자는 취지일 뿐이었다. 우리 회원들은 아침에 등교하면 모이는 장소가 있었다. 밤새 안녕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하루는 내가 등교를 해서 모임장소에 갔더니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큰일 난 사건을 직감하고 담임선생에게 조퇴를 하겠다고 알리고는 학교를 뛰쳐나왔다. 내 숙소이던 누님 집에 가려고 하는데 그 누님이 골목 앞에 나와 있다가 나를 보자 ‘어젯밤에 너 잡으러 왔었다’고 했다. 나는 그날 밤 숙소이던 누님 집에 가지 않고 친구 집에서 자고 학교에 나갔던 것이다.



10여 일이 지난 뒤 한 회원 집에서 소련군 통역관을 통해 알아본 즉 체포된 회원 모두가 ‘反動罪(반동죄)’로 7~8년 형을 받고 시베리아로 끌려갔다는 소식이다. 나는 생각 끝에 시골에 있는 내 유모 집에 숨어 있기로 했다.




‘김집’에서 ‘김원휘’로 改名



나는 ‘어떻게 하면 잡혀가지 않고 북한에서 살아갈 수가 있겠는가’하고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1947년에 만 17세가 되는 나는 公民證(공민증)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유모집에서 그리 멀지않은 내 본적지의 面사무소를 찾아가 내 호적을 떼어 보았다. 나는 크게 놀랐다. 日政 때 ‘창씨개명’을 했던 석 자 이름이 그대로 되어있었다. ‘김집’이란 외자이름은 없어지고 ‘김원휘’라는 석 자 이름이다. 面사무소가 어떤 착오를 일으켰는지는 알 바 없고 나에게는 천우신조였다. 나는 그 호적을 근거로 공민증을 발급받아 ‘김원휘’로 행세할 수가 있게 되었다.



당시 북한에서는 學制(학제)개편이 단행되어 중학교 3학년과 4학년이 동시에 졸업을 하게 되어 1947년 여름에 졸업시험을 일제히 치르게 되었다.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고 해도 졸업시험에 합격만 하면 졸업자격을 주게 되는데 졸업시험 문제집이 두 달 전에 배포되었다. 나는 4학년 졸업시험 문제집을 구입해 공부를 했다. 4학년 졸업시험에 합격하면 대학에 진학하든가 새로 생기는 고급 중학교 3학년에 진학할 수가 있다. 學制개편 덕택에 중학교 4학년 졸업시험을 쳐서 평양 교원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평양 교원대학은 중국에서 온 공산당 연안파 두목 김두봉(한글학자)이 학장이었고 이름만 대학이지 실은 중학교 敎員(교원)양성소나 다름없었다. 나는 수학과를 선택했는데 1년 동안은 별 탈 없이 다닐 수가 있었는데 1948년 학년 초를 앞두고 문제가 발생했다. 대학 再배치 사업으로 평양교원대학이 황해도 해주로 나가게 되었는데 38선에 근접한 해주인 까닭에 학생들의 思想(사상)을 검열한다는 것이었다.



38선을 넘다



출신 성분에서부터 성장과정을 면밀히 조사하는 思想검열에 ‘김집’을 ‘김원휘’로 위장한 내가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조마조마하여 조심스럽게 학교에 나갔더니 학생과에 근무하는 내 친척이 다가와서 ‘보안부에서 네 일건서류를 갖고 갔다. 뛰라’고 했다. 이제는 38선 以南(이남)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급히 아버지를 찾아가 이남으로 넘어가자고 말씀드렸다. 한참동안 침묵하던 아버지는 ‘이북은 조선 땅이 아니냐? 日帝 36년도 견뎠는데 참아 보자꾸나…’고 하셨다. 더 이상 아버지에게는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너는 잡히면 시베리아로 끌려간다.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뛰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본가집 친척이 초년 과부로 아들 하나를 키우며 살았는데, 광성중학교 3학년에 다니던 그 아들이 한밤 중에 잡혀가 시베리아로 끌려간 사실도 말해주었다. 어머니가 38선 안내비 등 급히 旅費(여비)를 마련해 주셔서 8월 한여름 밤에 38선을 넘었다. 그날은 황해도 청단의 장날이었는데 ‘가거라 38선’ 노래가 구슬프게 반복되고 있었다.



개성수용소를 거쳐 서울에 왔다. 서울에는 내 오촌 숙부가 일정 때부터 살고 있었다. 서울 용산에서 材木商(재목상)도 하고 개성 부근의 인삼밭도 갖고 있는 부자였다. 해방 후에는 서울 역전에 있는 옛 총독부 館舍(관사)를 점유하고 있었다. 내 어머니도 서울에 가거든 네 오촌집에 가 있으라고 하며 주소도 가르쳐 주었다. 서울에 온 나는 오촌 숙부집으로 들어갔다. 숙부님은 외출중이고 숙모만이 있었는데, 숙부님의 처남이 공부하는 방에 들어가 숙부님이 귀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빨갱이 냄새를 맡다



나는 책장에 있는 책들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이북에서 소련이 각 학교에 朝蘇(조소)문화협회를 통해 공급한 《볼세비키당사》와 《사회 발달사》 등 소련에서 우리말로 제작된 공산주의 포교用 책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의 책들이 이남에까지 배본이 되었다는 사실과 내 숙부님의 처남이 그 책을 꽤 열심히 공부한 흔적이 있었기에 나는 놀라고 충격을 받았다. 이 집에서 빨갱이 냄새를 맡은 것이다.


얼마 후 숙부님이 귀가했다. 나를 보자마자 ‘영보(본인의 兒名)야, 이북은 조선 땅이 아닌가? 왜 넘어왔냐?’고 했다. 북에서 아버지가 ‘이북은 조선 땅이 아니냐’고 한 말과 똑같은데 나에게는 몹시 서럽고 실망스러운 충격이었다. 눈물이 나오려고 하기에 얼굴을 돌리며 ‘작은아버지 나는 이 집의 食客(식객) 노릇하려고 온 게 아니요. 시베리아에 끌려가지 않고 조선 땅에서 살려고 왔어요’라고 말하고는 현관문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그 집에서 나와 서울역 쪽으로 맥없이 걸어가고 있는데 숙모님이 따라와서 호주머니에 얼마간의 돈을 넣어주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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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빨갱이’와 ‘수박 빨갱이’


이럭저럭 몇 날을 보낸 뒤 서울대학교 교수인 학교 선배를 찾아가 대학에 들어가는 문제를 상의하게 되었다. 선배 교수님은 평양에서 넘어온 나와 같은 처지의 학생 두 명을 나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나서 ‘지금 대학은 제대로 공부할 형편이 못 된다’고 하면서 우리더러 학과를 따질 것 없이 商科(상과)대학에 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우리 3人 일행은 교수님의 말씀대로 상과대학에 가기로 의견 일치를 보았고, 교수님은 우리를 상과대학 쪽에 연락해 놓았다.



그래서 우리 3人은 청량리 電車(전차) 종점에서 한참 걸어서 상과대학을 찾아갔더니, 학교 국기 게양대에는 인민공화국旗가 펄럭이고 있었다. 북한의 인민공화국이 아직 정식으로 수립도 되지 않았는데 북한에서 배포한 인민공화국 헌법초안에 있는 깃발을 이곳 빨갱이 학생들이 만들어 걸어 놓은 것이 분명했다. 우리 3인은 눈에 불이 나서 그 깃발을 끌어내려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학교 사무실로 뛰어 들어가 “이 학교에는 태극기도 없소?”라고 고함을 질렀다.


우리는 태극기를 국기 게양대에 걸어놓고는 학교 입학에 관한 서류와 절차 등을 확인하고 나서 학교를 나와 청량리 전차 종점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10여 명의 학생들이 길을 막고 우리를 에워싸더니 몰매를 쳐서 우리는 땅에 엎드린 채 매를 맞게 되었다.



이 몰매 소동은 경찰이 호각을 불며 출동하자 끝났는데 학생들은 모두 도망을 쳐서 매맞은 우리 3인만이 경찰과 대면하게 되었다. 우리는 경찰관들을 향해 말했다.

“이북에서 사과 빨갱이를 피해 이남에 왔는데 여기는 수박 빨갱이가 판을 치는구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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