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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공으로 통일하자 3천리강산
icon 멸공으로 통일하자 3천리강산
icon 2019-05-05 23:29:04  |   icon 조회: 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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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런데도 우리는 비행기가 더 자주 뜨기를, 바다 쪽으로부터 들리는 함포사격이 더 치열해지기를 기다리고 거기 희망을 걸었다 ....... ]



[ ..... 우리 세대 대부분의 평범한 노인들 공통의 정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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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부에 비판적인 청소년들이 흔히 그랬듯 이북이 사회주의 낙원이란 선전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바뀐 세상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려고 했다. 나는 전혀 두려움 없이 바뀐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갔다. 나는 빈손이었지만 그 사이에 붉은 깃발까지 준비한 사람도 많았다.



그렇게 북쪽에 호의적인 사람들이 도열한 가운데 인민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진주해 들어왔다. 말로만 듣던 탱크와 따발총을 그때 처음 보았다. 상상도 못해 본 어마어마한 병력이었다. 꿈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탱크가 마치 양민들의 가슴팍을 밀고 들어오는 것 같은 공포감을 맛보았다.



그 후 공포의 나날이 계속됐다. 유엔군이 참전하고 미군 비행기가 서울 상공에 뜨기 시작했다. 굶주림과 공포정치의 무서움을 그 여름의 혹서는 더욱 잔인하게 달구었고 혹서가 누그러질 무렵 서울 상공은 밤낮없이 미군 폭격기 차지였다. 오폭도 잦아 민가 밀집 지역이 불바다가 되기도 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식량을 구하러 교외로 빠져나가던 민간인들이 머리 꼭대기까지 하강한 전투기의 무차별 기총소사를 맞고 잔혹하게 살해되는 일도 비일비재였다. 아마 따발총 맞고 죽은 수효보다 기총소사 맞고 희생된 민간인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비행기가 더 자주 뜨기를, 바다 쪽으로부터 들리는 함포사격이 더 치열해지기를 기다리고 거기 희망을 걸었다. 입 밖에 내지는 못했지만 속으로 열렬하게 미국의 병력이 이기라고 응원한 것은 따발총보다는 비행기가 더 강해 보이니까 이왕이면 강자 편에 붙으려는 비겁한 마음에서였을까. 아니다. 폭격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학정(虐政)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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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이라기보다는 꽃다운 나이에 6.25를 겪은 우리 세대 대부분의 평범한 노인들 공통의 정서라고 말하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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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620667

[중앙시평] 초여름 망필(妄筆)
[중앙일보] 입력 2005.06.21

박완서 소설가







1950.12.20. 신문기자 총궐기대회


[ ...... 적색제국주의의 살육과 공포와 노예화정책을 분쇄하고 조국과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총궐기 ........ ]


신문기자 총궐기대회 개최


동아일보 1950년 12월 21일



오랑캐가 쳐들어오고 있다. 조국은 지금 위기에 직면하였으니 만주벌판에서 꿈틀거리던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이 돼지의 무리가 삼천리 강토를 짓밟고 3천만 민족의 앞가슴에 청룡도를 내밀은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당 태종과 수 양제의 백만 침략군을 무찌른 선조의 영광과 5천년 불패의 역사가 연면히 계승되어 우리의 혈관을 줄기차게 흐르는 조국애로 총단결 총궐기하여 손에 손에 정의의 총칼을 들자!


오랑캐를 무찌르려는 민족의 기백은 이제 전 민족을 궐기시켰으니 일찍이 민주주의 생활의 자유와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싸워온 우리 한국의 전 언론인도 위기에 대한 인식을 더욱 새롭게 하여 전선에 궐기할 때는 왔다.


언론의 자유가 박탈된 공산당 전제하에서는 늘 헐벗음과 굶주림과 노예화의 길 밖에 없으니 우리는 언론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서도 이 空前絶後의 위기를 극복하여 조국과 민족의 영예를 보존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에 한국의 전 언론인은 궐기하였으니 어제 20일 시공관에서 열린 신문기자 총궐기대회는 자유옹호의 굳은 결의 있음을 전 세계에 선포하는 선언을 채택하였으며, 유엔사무총장, 미국 대통령, 유엔군총사령관 및 일선 장병에게 각각 별항과 같은 메시지를 보내었다. 이날 오전 10시 조금 지나서 계획된 신문기자 총궐기대회는 순서에 따라 다음과 같은 회순을 원만히 진행시켰다.



▵개회 ▵주악(서울시 음악대) ▵묵념(전몰 장병에게) ▵개회사:서울신문 吳宗權 ▵격려사:국방장관(張차관 대독), 공보처장(李차장 대독) ▵선언 及 메시지:1. 선언(동아일보, 金三奎), 1. 유엔총회에(조선일보, 成仁基), 2. 미 대통령에(연합신문, 林元圭), 3. 맥원수에(경향신문, 민재정), 4. 일선장병에(승리일보, 具常) ▵기념강연(정훈국장 이선근) ▵격려사(시경국장 李益興), 동(유엔 공보관 메레델) ▵주악 ▵만세삼창



▹선언문



이 나라의 민주주의적 자유를 수호하고 확립하는 것을 유일한 사명으로 하는 우리 언론인 일동은 6·25사변을 계기로 이 자유가 얼마나 귀중한 가를 더욱 통감하였고 중공의 도발적인 참전에 의하여 전 인류가 막대한 위기에 직면하게 된 이때에 인류의 운명을 살육과 공포와 노예의 함정으로부터 구출하는 유일한 길은 민주주의적 자유를 단연코 사수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지난 10월 하순경 중공이 월경 침입하려 할 때에 유엔과 미국은 국경지대에 있는 중공의 권익을 존중하겠다고 언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불법한 침입으로 허다한 살육을 감행하였고 한국전쟁을 국지화하려는 유엔의 기본방침에 의하여 한국정전안이 52대 2의 절대다수로 유엔 총회를 통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견강부회의 요구조건을 고집할 뿐 하등의 반성도 보이지 않음은 적색제국주의의 침략성과 괴뢰성을 노골적으로 표시한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기에 추호도 주저하지 않는 바이며 동시에 이러한 평화교란자를 지구상에서 말살해 버리기를 전세계의 민주여론에 호소하는 바이다. 우리는 전세계 민주우방과 더불어 민주주의적 자유를 수호하기에 전력을 다할 것을 굳게 결의하는 한편 대내적으로 군·경민이 뜨거운 동족애에 입각하여 서로서로 얽히고 설켜서 불타는 애국심을 12분으로 발휘하기 위하여 먼저 전 언론인이 사소한 이해와 구구한 소아에 국척함이 없이 대국적 견지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총 단결을 垂範함으로써 衝天의 火柱가 되어야 할 것을 엄숙히 요청하는 바이다. 이것은 언론계 자체의 권위를 위하여서 뿐만이 아니라 민주국가의 권위를 위하기 때문이요, 나아가서는 이러한 성실성과 권위 없이 3천만 동포와 더불어 이 중대한 시국을 돌파할 수는 없기 때문이라.


동지 제군! 적색제국주의의 살육과 공포와 노예화정책을 분쇄하고 조국과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총궐기할 때는 왔다.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동포를 기아와 결핍에서 구출하는 자유를 위하여, 인권과 평화를 위협하는 공포를 제거하기 위한 자유를 위하여, 그리고 진실한 보도와 비판으로 민의를 반영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를 위하여 총 궐기할 때는 왔다. 이러한 민주주의적 자유를 수호하는 데 노력과 성의와 정열을 경도하는 것만이 조국과 인류를 현재의 위기에서 구출하는 유일한 길임을 여기에 엄숙히 선언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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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전쟁중에도 언론 검열, 간섭 안해"

鄭晉錫 한국외대 교수, "그는 끝까지 언론자유의 신념을 지켰다"



뉴데일리


“이승만, 끝까지 자유민주언론 신념 지켰다”
鄭晉錫 한국외대 교수 “韓末엔 국제잠각 뛰어난 기자로 활약”
6.25동란 등 국가 위기에서도 검열이나 논조 간섭 전혀 안해


온종림 기자




“이승만 建國대통령은 끝까지 언론은 자유민주주의의 근간(根幹)이라는 신념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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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수는 6.25 전쟁 기간 기사 검열을 실시한다는 공고가 잠시 잇었지만 검열기구를 두거나 제도적으로 운영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국가가 어렵고 혼란할 때 다양한 주장이 난무하고 야당지가 여론을 주도하는 형국에서도 이 대통령은 신문의 논조에 간여하지 않았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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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hogabje.com/board/view.asp?cpage=0&C_IDX=30016&C_CC=AZ








서울에서 휴전반대 국민총궐기대회 개최


동아일보 1951년 12월 13일



통일 없는 휴전반대 국민총궐기대회는 12일 상오 10시부터 충무로 광장에서 10시부터 愛協주최로 성대히 거행되었다. 먼저 金一休씨의 개회사가 있은 다음 유엔총회(毛允淑 여사), 릿지웨이 사령관(崔仁順여사), 트루만 대통령(김철수씨)에 보내는 메시지를 낭독하고 대회 결의문을 金賢大씨가 낭독하여 통과하였다. 이어 尹致暎, 白南薰 양씨로부터 휴전회담은 한국분할을 재판시키는 것이므로 전국민이 거족적으로 반대하자는 요지의 궐기사가 있은 다음 대회를 끝마쳤는데, 동 대회에서 결의한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한국의 통일과 평화 없는 유엔군의 철수를 반대한다. 중공군을 우리 강토에서 몰아내고 북한괴뢰군의 무장을 완전히 해제함으로써 한국의 평화가 수립될 것이며 세계의 평화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2. 우리는 38선의 재판인 휴전선을 용인할 수 없다. 백두聖峰에 태극기가 휘날릴 때까지 침략자를 격퇴하고야 말 것을 다시금 맹서한다.


3. 우리는 국토분할과 재침략의 위험성 있는 모든 결정과 우리의 주권과 통일을 침해하는 어떠한 결정에도 결사반대한다.


4. 우리는 약탈과 학살의 대상으로 되어 있는 재이북 700만 동포를 구출하기 위하여 조속한 대책이 있기를 전 자유세계에 호소한다.


5. 우리는 자유통일 신민주주의적 한국을 건설한다는 유엔의 결의를 하루속히 관철하도록 촉진한다.






1953.4.26. 북진통일 국민총궐기대회



[ ..... 북진통일을 절규하는 시민들의 힘찬 행렬이 거리를 .......

...... 전시민이 한뭉치가 되어 국민들의 결의를 피력한 것은 저 신탁통치반대대회 이후 처음 .......


...... 백만 시민이 참집 ........ ]




1953.4.27. 경향신문



장! 휴전반대의 의기충천

휴전결사반대 서울시민궐기대회



공산괴뢰들의 6.25남침으로 조국의 강토가 전화속에 휩쓸려 수백만 인민이 죽고 상하였으며 수천만동포가 재산을 잃은 채 거리에서 방황한지 이미 4년이 되었으나 한가지 국토통일 조국독립이라는 희망을 가졌기 때문에 참고 견디며 싸워왔는데 다시 공산침략군과 타협함으로써 휴전회담이라는 일방적인 결정으로 조국은 다시 두동강에 짤리울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휴전을 반대하고 통일 없는 타협을 규탄하는 국민적인 감정은 임시수도 부산을 비롯한 전국방방곡곡에서 폭발되고 있는데 서울에서도 각정당사회단체 주도 아래 26일 오전 10시 반부터 중앙청광장에서 북진통일국민총궐기대회가 열려 휴전반대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용소슴 치는 북진의 맥박

침략자를 축출 북진통일을 결의



이날 일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꽃철을 맞아 시민을 불으던 창경원 덕수궁도 문을 굳게 닫고 시내 상가는 자진 철시를 단행 일체의 가무음곡이 정지된 가운데 북진통일을 절규하는 시민들의 힘찬 행렬이 거리를 메웠는데 이같이 전시민이 한뭉치가 되어 국민들의 결의를 피력한 것은 저 신탁통치반대대회 이후 처음 보는 대회이었다. 백만 시민이 참집한 가운데 대회는 김(김일)씨의 사회로 장중한 주악리에 개막되어 국민의례가 끝난 다음 강(강창희)씨의 사회사에 이어 조(조광섭)씨가 국제정세보고를 하였고 유(유??)씨가 별항과 같은 결의문을 낭독하여 팽배하게 일어나는 북진통일의 국민적 기개를 다시 한번 고창하였다.


이어 윤(윤재욱)씨와 남(남송학)씨가 열렬한 궐기사를 하여 대회회중을 격려하자 회중은 우뢰같은 박수와 환호로 이에 호응하였다.



이어 이대통령과 미국대통령 아이젠하워 장군 그리고 유엔총회의장 피어슨씨 및 크라-크 유엔군 총사령관에게 보내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멧세-지 낭독이 있었고 '속지 말자 침략자 크레므린 평화공세를!' '통일 아니면 죽음을 달라!' '내몰자 공산오랑캐 압록강 넘어로!' 등 열렬한 구호를 부르짖은 다음 국회 국방위원장 임(임흥순)의원 선창으로 대한민국 만세 북진통일 만세로 대회는 일단 끝을 막고 참집하였던 회중은 '휴전반대' '북진통일' 프라카-드를 높이 들고 일대 데모로 들어 갔다.




선언서



8년전 일본제국의 쇠사슬에서 해방되자 3천만 민족의 의사를 무시하고 우리 강토는 양단되어 드디어 역사상 일찌기 보지 못한 민족의 수란과 희유의 참화를 당하고 있으며 1951년 소련대표 마리크의 휴전회담 제안은 침략자로 하여금 재침략의 기회를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유세계의 고귀한 젊은 피들을 헛되게 하고 있다. 최근 적색제국주의자들은 세계정복의 독아를 닦으면서 가장한 평화공세를 전개하여 국제정국을 현혹케 하고 있으며 이에 수반하여 자유와 평화를 상징하는 유엔 총회를 비롯하여 우방제국지도자가 또 다시 혼미에 빠지게 됨은 심히 유감된 사실이다. 오늘 소위 판문점회담이 재개되는 이 마당에 있어 우리는 언제 까지나 외세의 농락에 유린될 수 없고 외세의 과오로 기인한 비극적 대상이 될 수 없다. 민족과 국가의 운명 정히 중대 간두에 선 이 순간 우리는 오직 우리의 힘으로 북진통일하는데 총궐기할 것을 신명 앞에 엄숙히 맹세할 뿐이다. 우리 천손 만대의 경복과 조국의 영예와 자유를 위하여 한사코 북진통일을 이룩할 것이며 우리 대한민국주권을 무시하는 여하한 국제협상도 절대반대하며 UN제국은 우리 민족의 절호에 귀를 기우려 정의를 살리기를 정중히 선언한다.



4286년 4월 26일

북진통일 서울시민궐기대회



구호


1 속지말자 침략자 크레므린 평화공세를

2 내몰자 공산오랑캐 압록강 넘어로

3 청년들아 북으로 총을 잡고 진격하자

4 멸공으로 통일하자 3천리강산

5 통일 아니면 죽음을 다오







1953.4.30


[ ....... 궐기대회 참가 총인원은 500여만 명 .......

...... 통일 없는 휴전을 반대한다는 결의문은 약 1만 통 ....... ]



경찰, 휴전반대 궐기대회 참가 연인원 통계 발표

평화신문 1953년 5월 4일


[부산] 통일 없는 휴전은 우리겨레에 주검을 갖다 주는 것이라고 절규하여 방금 전국적으로 북진 통일궐기대회가 개회되고 있거니와 30일 현재 치안국 집계에 의하면 동 궐기대회 참가 총인원은 500여만 명으로 각사회 단체 및 각지구의 대회에서의 통일 없는 휴전을 반대한다는 결의문은 약 1만 통에 달하고 있다.






1953.5.29. 경향신문


북진통일에 접대부들 궐기



긴급 국무회의로 북진의 소리도 드높은 27일 파고다공원에서는 종로구 요식업자 접대부 들의 통일 없는 휴전반대 대회가 벌어졌다.


통일이 아니면 죽엄을 달라! 통일 없는 휴전은 6.25의 재판이다! 고 외치는 구호도 씩씩하게 대회끝에 시가행진에 들어가 이마에 수건을 힘있게 싸맨 1천여 접대부들


종로로부터 세종로등 시내 중심가로를 일주하였는데 이날만은 이들도 이나라 여성의 ?된 가치를 시민들 앞에 남김없이 발휘하였다.(사진은 시가행진하는 접대부들)






1953.6.9. 진명여중고



[ ...... 학생들이 눈물로 아우성치면서 생사를 가리지 않고 떠밀고 들어가려고 .......

..... 울분이 터지는 데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 ]



휴전반대 시위중 미군의 진압으로 여중고생 다수 부상


서울신문 1953년 6월 11일



9일 擧市的인 휴전반대 데모에 참가한 진명여중고 학생 25명이 해산을 명령하는 미군헌병들에 의해서 부상을 당한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즉 이날 시위에 참가한 시내 각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정오경 미 제8군사령부와 미 제5공군사령부 앞에 쇄도하여 ‘통일 없는 휴전반대’와 ‘반공포로의 즉시 석방’등 구호를 드높이 부르면서 열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때마침 미 제5공군사령부 후문을 경비 중이던 미군헌병이 쇄도하는 진명여중고 학생들을 제지하려고 이들을 구타한 나머지 동 여중고생 25명을 부상시켰다.


부상당한 학생들은 대부분이 타박상을 입었는데 팔목에 열상 입은 자도 없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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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정보에 접한 시경 사찰과에서는 10일 상오 전기 학교 현장에 출동하여 이에 대한 진상을 조사한바 있었다.


그리고 이날 학생들을 인솔하였던 담임선생과 동교 학생 및 학부형측의 말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책임 인솔선생 李根永씨:불상사가 발생할까 해서 혹시나 학생들의 데모를 제지해 봤으나 500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눈물로 아우성치면서 생사를 가리지 않고 떠밀고 들어가려고 하는데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교장 이세□씨:이날 내가 있었더라면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휴전을 반대하는 마음에서 그 같이 시위하는 학생들의 행동을 제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학생일솔 책임 洪妊順□:울분이 터지는 데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학부형 □□창씨:내 딸이 미군에게 맞아 죽었다 하더라도 민족의 굳은 의사를 표시해 주었으니 만족하게 생각한다. 미군들이 어린 소녀들의 눈물로 호소하는 애끓는 정신을 이해 못하고 폭행을 가하였음은 실로 유감이다. 이래서 과연 자유세계의 진실한 민주평화가 확립되겠는가. 미군 당국자들의 신중한 검토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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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6.11. 부산 60만 시민궐기



[ ...... 굴욕적인 휴전조인을 한사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희구하는 3천만 겨레의 절규는 바야흐로 최고절정에 ........ ]



1953.6.12. 동아일보


우리의 갈 길은 오직 통일완수


정부안만을 지지
철시코 60만 시민궐기



굴욕적인 휴전조인을 한사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희구하는 3천만 겨레의 절규는 바야흐로 최고절정에 달하고 있다. 임시수도 부산에서는 어제 11일 국제시장을 비롯하여 신창동 대신동 등 전시내의 시장이 철시하는 한편 일반 상가점포 및 다방 등의 문은 굳게 닫혀지고 시민대중의 발인 시내 '버스'는 그 운행을 총정지하였다.


한편 이와 아울러 시내 충무로 광장에서는 상오 11시 40분부터 부산시 애국단체연합회 주최의 '정부대안 절대지지 국민총궐기대회'가 개최되었는 데 이날 대회장에는 각동민 상인조합 직장근로자 등 자발적으로 밀려든 수만여명이 참집하였다.


그리하여 동대회는 한청 이달우씨의 사회로 시작되어 양우정 김우정 양씨의 개회사 및 궐기사가 있은 다음 이대통령을 비롯하여 미대통령 유엔 사무총장 및 유엔군총사령관에게 보내는 '멧세-지'를 채택하고 이어 다음과 같은 결의문낭독이 있은 다음 만세3창으로서 하오 영시 15분 대회를 마치고 이어 보수동 파출소 미국대사관 앞을 통하여 시가행진에 드러갔다.


이날 시위에 있어 팔과 다리를 국가와 민족에 바친 수천 상이군인들은 역시 싸우다 쓰러진 앞 못보는 상이전우를 부축하여 가면서 '북진통일을 위하여 나머지 목숨을 바치겠다'는 피눈물의 구호와 '푸란카-드'를 내흔들고 시민의 앞장에 나섰다.





[ ..... 남녀학도 10여 만명 ......

..... 통일 없는 휴전반대 대회 .... 데모행진 ......

..... 이들의 부르짖음은 온 시내를 진동하였다. ....... ]



1953.6.12. 동아일보



10만 학생도 일대시위

상이병은 도청에서 대좌



또한 이날 전시내의 67개교 고등학교 학생과 10여 대학교의 남녀학도 10여 만명은 하오 1시 대신동을 비롯하여 영도 초량 충무로 서면 동래 등 6개 지구로 나누어 각기 통일 없는 휴전반대 대회를 개최하고 동 1시 40분경 부터는 '통일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등등의 구호를 절규하면서 데모행진을 감행하였다. 전기 10만명 이상의 데모 행진은 민족과 국가를 사랑하는 젊은이의 순정한 기개를 여지없이 발휘하여 남음이 있었고 이들의 부르짖음은 온 시내를 진동하였다.


한편 수천명의 상이군인들은 행진끝에 임시 중앙청내에 몰려들어 정부 및 입법부의 책임자를 만나 재기봉공의 각오를 표명하는 멧세-지 전달과 명확한 정부의 태도의 천명을 듣고저 하오 2시반 현재까지 광장에 주저 앉고 있다.






1953.6.11. 홍성군 이재명



[ ..... '통일 없는 휴전은 죽음이다' .....

..... 미제 수류탄에 자폭자살 ....... ]



1953.6.20. 경향신문


휴전반대의 불꽃

홍성 이씨는 통분 끝에 자결



우리의 주권을 무시한 휴전은 결사반대한다고 부르짖는 민족의 함성은 방방곡곡에서 들려오고 있다.


<이리> 지난 13일 이리 시민들은 역전광장에 시민총궐기 대회를 개최한 후 시가행진을 성대히 거행하는 한편 야간에 횃불 행진도 하였다.


(안중) 당지 평태군내 현덕 포승 청북의 3개면에서는 지난 11일 휴전결사반대 북진통일 총궐기대회를 군청광장에서 성대히 거행하였다.


(남양) 남양면민들은 지난 13일 남양국민학교 교정에 모여 휴전문제 한국제안관철 총궐기대회를성대히 거행하고 시위 행진을 행하였다.


(춘천) 춘천시 춘성군민들은 지난 13일 춘천여자고등학교 운동장에 모여 휴전문제 한국제안관철 총궐기대회를 성대히 거행하고 이대통령을 비롯한 각요로 보내는 멧세-지를 결의하였다.


(예산) 당지 시민들은 지난 13일 덕산에 주둔한 유엔군 통신부대 근방에 모여 휴전반대 북진통일을 부르짖으며 시위행진을 하였다.


(홍성) 당지군내 11개면에서는 지난 11일 북진통일 총궐기대회를 성대히 거행하였는데 통일없는 휴전과 포로강제송환에 울분한 홍성군 장곡면(홍성군 장곡면 산성리53)에 거주하는 이(이재명=27)씨는 궐기대회 선두에서 '통일 없는 휴전은 죽음이다'라고 통탄한 나머지 집에 돌아와 미제 수류탄에 자폭자살하여 통일을 애원하는 선구자가 되었다. 그런데 전기 이씨는 청양 경찰서에 근무 당시 보?한 미제 수류탄으로 자폭한 것이다.







1953.6.18.



[ ...... 국민의 절대적인 호응에 힘입은 이승만 대통령은 6월 18일 반공 포로 2만 7000명을 석방 ........

...... 미국은 7월 12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경제원조 등 5개 항을 보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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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3월 하순 그 동안 정체되었던 휴전회담이 재개되어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으며, 이에 비례하여 휴전반대국민대회 또한 열기를 더해 갔다.


이러한 국민의 절대적인 호응에 힘입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6월 18일 반공 포로 2만 7000명을 석방하기에 이르렀다. 이때서야 비로소 한국 국민의 동의 없이는 휴전의 실효성을 거둘 수 없음을 알게 된 미국은 7월 12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경제원조 등 5개 항을 보장했으며, 한국 정부는 유엔군측의 휴전협상 조건에 동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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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6.18.


반공포로 석방



발생원인


〈휴전회담〉이 진행 중이던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원용덕 헌병 총사령관에게 북한으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를 석방하도록 지시함으로써 일어난 사건이다.


한국전쟁을 종결하기 위한 휴전협상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의제의 하나는 포로송환 문제였다. 군사분계선에 관한 협상은 「휴정협정」 조인시 접촉선으로 하기로 일찍 합의에 도달했다. 그러나 1951년 12월 11일부터 시작된 포로 송환에 관한 협상은 1953년 6월 8일에 가서야 비로소 합의에 도달했다.


이 과정에서 논란이 되었던 것은 포로 송환원칙을 두고 유엔군측과 공산측이 첨예하게 대립했기 때문이다. 유엔군측은 포로가 돌아갈 국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자는 ‘자발적 송환원칙’을 주장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인민군과 중공군 포로들 중 북한이나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을 경우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었다. 이와 반대로 공산측은 포로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본국으로 반드시 돌려보내야 한다는 ‘강제적 송환원칙’을 내세웠다.


이러한 원칙의 대립 때문에 장기화되던 포로송환 문제는 귀한을 거부하는 포로는 중립국 송환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송환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렇게 될 경우 상당수의 반공포로들이 자유의 품에 안기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이승만대통령은 미국과 유엔참전국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공포로의 일방적 석방을 결정했다.



내용



휴전협상이 진행되고 있었을 때 남한에서는 「휴전협정」에 반대하는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이승만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면 한반도에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을 매우 우려했다. 미국은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나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한 회담이 곧 바로 개시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이승만대통령을 설득했다. 사실 미국은 「휴전협정」 체결 이전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경우 공산측이 휴전협상을 중단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갖고 있었다.


이승만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은 반공포로들에게 자유를 되찾게 해주려는 목적 뿐만 아니라 방위조약과 관련하여 미국을 외교적으로 압박하려는 목적도 갖고 있었다. 1953년 6월 18일 자정을 전후하여 유엔군이 관리하고 있던 부산, 마산, 대구, 영천, 논산, 광주, 부평 등의 반공포로 수용소에서 2만7천여명의 포로들을 석방시켰다. 부평수용소에서는 400명이 탈출하면서 30명이 사망했다. 6월 21일까지 계속된 반공포로들의 탈출과정에서 모두 61명의 포로가 희생되었고 1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휴전협상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상태에서 일어난 반공포로 석방 사건은 미국과 유엔 참전국들을 경악시켰다. 공산측은 탈출한 반공포로들을 전원 재수용할 것을 요구하면서 「휴전협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러한 유엔군측과 공산측의 반응은 반공포로 석방 이전에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승만대통령은 휴전협상이 한국 정부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깊은 불만을 갖고 있었다. 반공포로 석방을 통해서 이승만대통령은 한국 정부의 동의 없이는 휴전은 현실적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유엔군측과 공산측 모두에게 분명히 하고 휴전협상 과정 및 체결 이후에도 한국 정부의 입지를 강화하려고 했다.


미국 내에서도 반공포로 석방을 지지하는 여론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군 포로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냈을 때 소련 정부는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을 사상이 오염되었을지 모른다는 이유를 들어 처형시켰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 때문에 미국은 휴전협상에서 ‘강제적 송환원칙’에 반대했던 것이다. 반공포로 석방은 그들을 자유의 품으로 데려오기 위해 유엔 참전국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취해진 조치로서 이승만대통령의 가장 훌륭한 외교 업적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http://contents.archives.go.kr/next/content/listSubjectDescription.do?id=002717







1953.6.19.


[ ..... 중학생 1만여명은 ......

..... '통일 없는 휴전반대와 애국포로석방 만세' ......
..... 열광적인 시위를 ........ ]



1953.6.21. 동아일보



반공포로석방 지지

서울서 수만 남녀중학생 시위



[ 서울분실발 ] 19일도 반공포로의 석방을 지지하는 일대 시위행렬이 수만명의 서울시민과 학생들에 의하여 전개되었다.


이날 상오 9시 서대문 일대 중학생 1만여명은 동지구 배재중학에서 시위를 시작하여 시청앞을 비롯한 시내 중심지 일대에 '통일 없는 휴전반대와 애국포로석방 만세' 등의 프라카-드를 높이 들고 열광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한편 성신 숙명 수도 창덕 계성 동성 보성 등 7개 남녀중학생들이 궐기하여 애국포로석방지지의 구호를 절규하면서 5시간에 걸쳐 시내일대에 열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1953.7.8. 경향신문


비장한 우중시위

6일 2만여 학생, 시민들 단행



전국적으로 홍수사태를 일으키고 있는 폭우 속에도 불구하고 6일 2만5천여 명의 서울 시민 학생들은 시내 수개처에서 봉기하여 통일 없는 휴전반대 데모의 비장한 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날 상오 9시부터 성북구민 8천7백명 마포구민 1만명과 용산구민 3천명 성동 10개동회 5천5백여명이 궐기하여 비장한 우중시위를 단행하였다.


한편 시내 경서 선린 용산 상명 계성 보성 동성 성동 덕수상업 한영 수도여중 등 12개교 남녀학생들도 비바다로 화한 장안 거리에 북진통일을 절규하는 시위를 단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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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8. 정,부통령선거



[ ....... 유효표 74.6% ... 압도적 지지로 쉽게 대통령에 재선 .......


...... 민국당은 ... 정치자금의 낭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아예 후보를 내지 않았고 ......

...... 조봉암 ... 이시영이 무소속으로 .... 10% 내외 ........ ]




1954.5. 3대 민의원선거


[ ...... 자유당이 재석 203석 중 과반수가 넘는 114석 ........

..... 민국당은 .... 불과 15명만 당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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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년 4.5월에 실시된 지방의회선거는 정당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기초의회(시,읍,면의회)의 경우 17,559석 중 무소속이 42.5%인 7,469석을 차지하여 자유당의 4,444석이나 야당세력인 대한청년단 2,843석, 국민회 2,621석 보다 다수였다. 그러나 광역의회(특별시,도의회)의 경우 선거 직전에 족청의 이범석이 내무장관에 임명됨으로써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관료, 경찰의 지원까지 받았던 자유당이 306석 중 147석을 차지하여 무소속 85석이나 한청 34석, 국민회 32석 보다 월등히 많은 당선자를 냈다. 기초든 광역이든 정당조직으로는 자유당세력이 지방의회를 거의 장악하게 되었고 그렇게 구성된 지방의회는 지방주민을 동원하여 직선개헌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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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경찰과 계엄군을 동원한 가택수색이 시작되고 심지어 구속중인 의원들도 보석출감하여 국회에 호송되었다. 이리하여 7월 4일 경찰과 청년단에 의해 포위된 의사당에서 기립투표 끝에 마침내 찬성 163, 반대 0, 기권 3으로 발췌개헌안이 통과 되었다.



직선제 개헌을 위해 이와 같은 무리수를 동원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52년 8월 5일의 정,부통령선거에서 유효표 74.6%에 해당되는 5,238,769만 표를 얻어 압도적 지지로 쉽게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경찰,관료,그리고 자유당 조직이 총동원된 선거였기도 했지만 전쟁 중의 국민들로서는 이승만 외에 마땅한 대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민국당은 이승만에 대항하여 후보를 내세운다는 것은 정치자금의 낭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아예 후보를 내지 않았고 초대 농림장관을 지낸 조봉암과 초대 부통령이었던 이시영이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각각 797,504표,764,715표를 얻어 10% 내외의 득표율을 보였다. 한편 부통령에는 자유당내 족청계의 지지로 후보에 나섰던 이범석을 제치고 이승만이 지지한 무소속의 함태영이 유효표의 41.3%인 2,943,813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원래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자 족청계가 장악하고 있었던 자유당은 52년 7월 전당 대회를 개최하고 정,부통령후보에 이승만,이범석을 각각 공천하였다. 그러나 개헌성공 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 정도로 강력했던 이범석과 족청계를 숙청함으로써 자유당을 확실한 친정체제로 전환시키고 싶었던 이승만은 전당대회의 결정을 무시하고 부통령에 무소속의 함태영을 지지하고 정,부당수제를 총재제로 바꿀 것을 요구하여 잠재적 경쟁자인 부당수 이범석을 제거하려 하였다. 이에 이범석과 경쟁관계에 있던 장택상총리는 전국의 지방행정조직 및 경찰조직을 동원하여 함태영을 당선시켰는데 이것은 족청의 조직력이라 하더라도 경찰,관료의 뒷받침 없이는 선거를 치를 수 없는 당시 정치의 한계를 잘 보여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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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 등의 무리수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2대 직선대통령 선거와 그 뒤를 이은 휴전반대운동 및 반공포로 석방 등에서 국민들의 동원이나 지지를 끌어 낼 수 있었다. 그것은 선거사상 처음으로 정당공천 후보제를 실시했던 1954년 5월 20일 3대 민의원선거에서 자유당이 압승을 거둠으로써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 물론 관료와 경찰의 선거개입은 여전히 중요한 변수였으나 이승만의 권위에 도전했던 이범석과 족청계를 숙청하고 이기붕을 중심으로 확실한 이승만의 친정체제를 확립한 자유당이 재석 203석 중 과반수가 넘는 114석을 차지하였다.



반면 민국당은 개헌파동 후 현저한 세력 약화 속에서 자유당의 족칭계 제거기를 이용하여 1953년 11월 혁신강화 전국대의원대회를 개최하고 종래의 집단지도체제를 신익희를 중심으로 한 단일지도체제로 개편하는 한편 소장파를 책임부서에 등용하는 등 당세 만회에 노력하였으나 3대 총선에서 불과 15명만 당선됨으로써 원내교섭단체도 구성치 못하게 되었다. 또한 1,2대 국회선거에서 압도적 다수가 당선되었던 무소속 제도의 변화와 자유당의 압승에 따라 67명의 당선자를 내는데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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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7.27. 휴전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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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하는 것은 2대 국회 후기에 들어서다. 그러니까 1953년 휴전 협정을 맺을 무렵 거세게 일어나는 북진 통일 운동 때부터 이승만의 의회 장악력이 점점 커지고 1954년 5.20선거에 의해 그야말로 이제는 자유당을 완벽하게 좌지우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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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 감금된 의원들, 화장실 가려다 뺨 맞은 총리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98> 조봉암과 진보당, 여섯 번째 마당

김덕련 기자 2015.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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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7. 이승만 대통령 가족장 장례




[ ..... 장례식 때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 참배를 하는 바람에 이화장 담이 무너지기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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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仁秀 박사는 李承晩 대통령이 국민에게 남긴 유언을 소개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5장 1절 말씀을 자주 하시면서 국민들께 남기는 유언이라고 하셨어요.


다시 나라를 잃고 침략을 당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경제적, 문화적 침략에 대비해 정체성을 해칠 노예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유해가 운구되고 이화장에 빈소가 마련되자 전국에서 추모객이 몰려들었다.



장례식 때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 참배를 하는 바람에 이화장 담이 무너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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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시경은 .... 고 이박사의 장례행렬을 보러 나온 서울 시민의 수를 1백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


해방 이후 최대의 인파 .......... ]





[ ..... 시청앞에 모인 약 35만명(경찰 추산)의 인파로 막혀 ......

..... 시민과의 고별절차는 취소 ...... ]






1965.7.27.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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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정오 무렵 정동 교회에서 나와 동작동으로 향해 떠난 영구차는 시청앞에 모인 약 35만명(경찰 추산)의 인파로 막혀 한동안 나아가지 못하다가 낮 12시 25분경 길이 트여 남대문쪽으로 빠져 나갔다. 시청앞에서 있을 예정이던 이 박사의 녹음 방송 등 일반 시민과의 고별절차는 취소됐다.



연도


ㅇ 이화동 입구에서부터 광목줄로 영구차를 매어 앞뒤로 사방에 남녀 90명씩 7백 20명의 남녀가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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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종로 5가 로타리에는 수천 시민이 운집해서 교통은 완전두절, 종로에 접어들자 영구행렬은 제대로 틀이 잡히기 시작 , 호상 변영태 씨가 선두에 섰으며 그뒤에 태극기 초상화 행장 만장을 든 배재중학생들 해군조악대에 이어 영구차가 따라 영구차량쪽에는 2대의 경찰 백차와 기마대가 호위했다.



국립묘지


ㅇ 삼각지에서부터 차로 운구하려던 예정을 바꾸어 영구행렬은 계속 도보로 오후 2시 40분 한강 인도교를 통과 , 3시반경 동작동 국립묘지에 도착하여 용사문 앞에서 정부 주관으로 영결식을 가졌다.이 식전에서 박치순 목사의 기도와 박대통령의 조사(정총리 대독)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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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최대인파


연도의 만송시민
경찰은 백만추계


서울시경은 27일 고 이박사의 장례행렬을 보러 나온 서울 시민의 수를 1백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 해방 이후 최대의 인파라고 밝히고 이날 연도 경비를 위해 관하 3천명의 경관을 동원했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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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는 달리 이박사 장례식행렬이 세종로 그 자리를 지나갈 때의 연도광경은 그의 영구가 하와이로부터 돌아 오던 그날의 성관보다 한층 장관을 이루었다. 이박사의 사면초상화를 앞세운 그뒤로 5백여개를 헤는 만장과 4백여개의 조화대열 그리고 소복에 상장을 두른 수천백명의 남녀수상객과 악대들이 호위하는 가운데 황국 꽃으로 뒤덮힌 영구차 그만하면 고 우남에게 영광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국장은 그 보다 더 성할 것이며 국민장인들 그 이상 장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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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5년 서울인구 380만
1966년 전체인구 2916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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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10. 박정희 대통령




[ .... 30일 하루동안 2백88만여명 ...... ]




鳴咽(명인)속 焚香(분향)5일째


1979.10.31

매일경제



鳴咽(명인)속 焚香(분향)5일째


全國(전국)서 총 5백85만명 30일 하루동안 2백88만여명



故(고) 朴正熙(박정희)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추모행렬이 서울을 비롯한 전국2천1백59개 분향소에 줄을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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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국의 분향인파는 1일까지 1천3백28만7천명 (내무부집계) ......


..... 1일 하룻 동안의 분향자수는 3백82만 ...... ]





"마지막 날"…분향 늘어


[중앙일보] 1979.11.02




고 박정희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전국의 분향인파는 1일까지 1천3백28만7천명(내무부집계)에 이른다. 1일 하룻 동안의 분향자수는 3백82만8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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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joins.com/article/1522786






* 1980 南韓人口(남한인구) 3744만명







[ ..... 영결식 당일에는 광화문 인근에만 200만명이 모였다 ....... ]




연합뉴스

장례식 조문 최대 인파는?


2009-02-19



김구 200만 훌쩍..박정희는 추산 불가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16일 오후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대단한 인내가 요구된다. 명동성동에 진입하기 위한 조문행렬은 통상 2~3㎞ 정도. 특이한 건 시간이 흐를수록 추모열기가 더 뜨거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19일 김수환 추기경 장례위원회에 따르면 조문 첫 날 1천500명으로 '단출하게' 시작된 조문객 수는 17일 9만6천500명, 18일에는 15만2천500여명으로 급증했다.


이 때문에 2-3시간은 기본이고 많게는 5시간을 기다리는 지난한 과정을 감수해야 김 추기경의 얼굴을 볼 수 있다.

다리에 쥐가나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 음악을 듣는 사람 등 '기다리는 사람들'은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발을 동동거리면서도 10초라는 짧은 조문시간을 위해 그렇게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적으로 추앙받았던 다른 저명인사의 장례식에는 어느 정도의 인파가 몰렸을까.


조계종에 따르면 지난 1993년 열반한 성철 큰스님의 영결식(11월10일)에는 10만여명이 모인 것으로 추산된다.

조계종 관계자는 "장례 당일에만 10만여명이 참가한 점에 비춰 7일장으로 치러진 장례 기간에 수십 만명이 다녀갔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장례가 끝난 후 3주간에 걸쳐 진행된 사리친견법회 동안 40만명이 다녀갔다고 조계종은 밝혔다.





해방 이후 100만 이상의 많은 조문객이 다녀간 경우는 1949년 6월26일 안두희의 총탄에 순국한 김구의 장례식이 처음으로 알려졌다.

국사편찬위원회의 김득중 편사연구사에 따르면 26일 오후 12시30분께 서거한 후 28일 오후 1시까지 약 75만명이 종로구 평동의 빈소인 경교장을 다녀갔다.


김 연구사는 "장례가 10일장으로 치러진 만큼 조문객수는 200만명이 훨씬 넘었을 것"이라며 "영결식 당일에는 인근 상가가 영업을 중지했고, 경교장에서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까지 인파가 가득찼다"고 말했다.




이후 유일하게 국장으로 치러진 박정희 대통령 영결식 당일(1979년.11월3일)에는 광화문 인근에만 200만명이 모였다. 전국 곳곳에 분향소가 마련됐고, 장례기간이 9일간 지속됐기 때문에 정확한 인원은 추산이 불가능하다고 김 연구사는 밝혔다.


또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 영결식(1974년 8월18일) 때는 빈소가 마련된 청와대에 10만명이 모였다. 육 여사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고, 5일장이었다.



아울러 국민장으로 치러진 김성수 전 부통령의 장례식에도 전국 각지에서 100만여명의 인파가 몰린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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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장일인 3일 청와대에서 국립묘지에 이르는 연도에는 2백여만 명의 시민등이 나와 ....... ]




국향에 묻혀 정든 청와대 떠나


[중앙일보] 1979.11.03




『잘 가십시오』-. 고 박정희대통령의 국장일인 3일 청와대에서 국립묘지에 이르는 연도에는 2백여만 명의 시민등이 나와 고인의 마지막 길을 보냈다. 18년5개월동안 나라를 이끈 지도자를 잃은 국민들의 마음은 무거웠다. 안개가 자욱이 깔린 서울거리에는 소복을 곱게 차려입은 칠순할머니에서부터 철부지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이날만은 미움과 노여움을 버리고 한마음 한뜻으로 고인을 추모했다.




청와대∼중앙청



박대통령, 소나무 울창한 영부인 곁으로|마지막 길에 상복 2백만 명 | 조포 62발 은은히 말없는 유족행렬



3백여m에 이르는 장의행렬이 이날 상오9시25분 청와대 문을 나서자 이른 아침부터 연도를 메웠던 시민들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영구차는 전후 40명씩, 좌우 10명씩의 3군사관생도 1백 명이 앞뒤에서 이끌었으며 그 뒤에 친족대표 10명·최규하 장의위원장등 추모제에 참석했던 장의위 일행· 친척·청와대비서실·경호실 간부의 순서로 영결식장인 중앙청으로 향했다.


장의행렬이 지나는 청와대 본관에서부터 정문까지는 1백 명의 3군 사관생도가 길 양쪽에 앞에총자세로 도열했다. 정문부터 삼청동까지는 비서실·경호실 직원 5백여 명이 검은 옷에 흰 장갑차림으로 서서 떠나는 박대통령을 배웅하며 흐느꼈다.


상오 9시l5분 박대통령의 영구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평소 박대통령을 가까이 볼 수 있었던 주방직원·청소부 아주머니들이 통곡을 터뜨려 또 한 차례 흐느낌의 파도를 일으켰다.


영구가 청와대 정문을 나서서부터 영결식장에 이르는 동안 박대통령의 나이수대로 62발의 조포가 경복궁 안에서 울렸다.


영구차 앞 영정을 모신 선도차에 탄 친족대표 박재석씨는 시종 손수건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연도에서 마지막 배웅을 한 청와대비서실·경호실 직원들의 슬픔을 더 북받치게 했다.



청와대주변은 이날 아침 자욱한 안개로 뒤덮였고 「아스팔트」위에는 낙엽이 흩날려 대통령을 잃은 슬픔을 더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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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joins.com/article/1522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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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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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 후 고향 김해의 봉하마을로 귀향하였다.


2009년 검찰의 정관계 로비 수사가 전방위로 확대되면서 노무현의 측근 세력들이 수사 대상에 오르게 되고 박연차와 친분이 있던 노무현의 가족들이 금전을 수수했다는 포괄적 뇌물죄 혐의를 받아 조사를 받았고,[12] 노무현 또한 검찰 조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해 5월 23일 자택 뒷산인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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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8일 오후 5시까지 공식 집계된 조문객은 432만 ...... ]



‘지못미’ 노무현 추모인원 전국 500만 돌파 “미안해서..아까워서..”


2009-05-29



[뉴스엔 글 박세연 기자/사진 정유진 박준형 기자]



노무현 前 대통령의 분향소에 500만 명의 조문객들이 다녀간 것으로 파악된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장의위원회에 따르면 28일 오후 5시까지 공식 집계된 조문객은 432만1,306명으로 집계됐다.


빈소가 마련된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는 120만명 가량의 조문객이 찾았다. 집계 시간까지 94만5,726명이 조문을 해 29일 자정까지 총 120만에 육박하는 조문객이 다녀올 것으로 전망된다.


이밖에 경기도와 서울 지역에선 각각 86만271명, 82만8776명이 조문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국민장 전날인 28일 밤 늦게까지도 덕수궁 대한문 시민분향소에는 수많은 추모 인파가 모여 밤을 지새웠고, 국민장이 29일 자정까지 진행되는 만큼 조문객 숫자는 더 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날 노 전 대통령의 노제가 거행된 서울광장 앞 덕수궁 대한문 시민분향소에는 미처 조문하지 못한 시민들의 조문 행렬이 줄을 이었다.


뿐만 아니라 민간 운영 통계엔 종교기관, 대학교 및 개인운영 분향소 등이 제외됐기에 실제 조문객은 5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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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905292203534100







2009-05-29


역대 최대 추모 인파 몰릴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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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노제로 향하는 운구 행렬에 상당 수 추모객들이 뒤따르면서 인파는 크게 늘 것으로 보입니다.



경찰은 최대 수용 인원을 서울 광장 5만 명, 광화문 일대 12만 명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민단체들은 수십만 명이 시청 앞 서울광장과 주변에 모일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뒤 엿새동안 통제됐던 서울광장에서 노제가 열리는 점이 큰 변수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지난 1987년 서울 광장에서 열린 고 이한열 열사 노제 때는 경찰 집계로 15만명, 주최 측 집계로 100만 명이 참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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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 전 대통령의 노제(路祭)와 서울역까지 이어진 거리 운구행사에서는


최대 18만여명(경찰 추산, 노제 주최측 40만~50만명 주장)의 시민들이 ....... ]





<김前대통령서거> 되돌아본 전직 대통령 장례


노무현·최규하 국민장, 박정희 국장, 윤보선·이승만 가족장



연합 | 2009-08-18





전직 대통령의 장례는 `국장·국민장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장(國葬)이나 국민장(國民葬)으로 거행될 수 있다.


18일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노무현·최규하 전 대통령은 국민장,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국장, 윤보선·이승만 전 대통령은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은 5월 23일 스스로 생을 마감한 지 7일만인 5월 29일 서울 경복궁 앞뜰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정·관계 주요 인사, 권양숙 여사를 포함한 유족 등 2천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 참석했다.


특히 서울광장에서 거행된 노 전 대통령의 노제(路祭)와 서울역까지 이어진 거리 운구행사에서는 최대 18만여명(경찰 추산, 노제 주최측 40만~50만명 주장)의 시민들이 참석해 노 전 대통령을 애도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유해는 이어 경기도 수원시 연화장에서 유족과 추도객들의 애도 속에 화장식이 치러진 뒤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사저 인근의 봉화산 정토원에 임시로 안치됐고, 49재를 마친 뒤 봉화산 사자바위 아래에 조성된 묘역에 안장됐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당시 전국 102곳의 정부 분향소에는 약 100만명이 조문하고, 서거 이후 안장식까지 봉하마을 분향소와 묘역에는 160만명 가량이 다녀간 것으로 집계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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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수립 이후 현재까지 국민장은 노무현·최규하 전 대통령과 1983년 미얀마 랑군 국립묘지에서 북한의 폭탄테러로 순직한 당시 서석준 부총리 등 17명의 장례식을 포함해 총 13회 엄수됐다.




반면 국장은 1979년 10월26일 서거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례가 유일하다.


박 전 대통령의 영결식은 9일간의 장의 기간을 거쳐 11월3일 중앙청 광장에서 엄수됐고, 유해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원수 묘역에 안장됐다.


박 전 대통령의 장의기간 전국에는 조기가 게양되고 중앙청 광장뿐 아니라 일선 읍ㆍ면ㆍ동사무소와 재외공관까지 분향소가 설치됐으며, 국장 당일은 임시 공휴일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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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전 대통령의 장례도 1965년 7월 가족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는 국립묘지에 안장됐다./연합






* 2009 서울시 인구 1046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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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무현... 조문객 수는 총 500만여 명.....

.... 김 前대통령... 조문객 수는 70만여 명......

..... 박정희 ... 정부 추산 조문객 수는 무려 1천979만여 명. ...... ]






故 노무현·김대중 前대통령 조문객수 큰 차이, 왜?



충격적인 자살과 고령에 병환··· 서거 원인 큰 영향

전두환· 노태우 前대통령, 국장 또는 국민장 힘들어





장기영 학생기자

2009.08.26




“고 노 대통령 영결식에 아내와 함께 참석했다. 이번처럼 거국적인 애도는 일찍이 그 예가 없을 것이다. 국민의 현실에 대한 실망, 분노, 슬픔이 노 대통령의 그것과 겹친 것 같다.”


지난 29일 영면(永眠)한 김대중 前대통령이 서거 두 달여 전인 5월 29일 작성한 일기에는 노무현 前대통령을 떠나 보내는 슬픔과 함께 그 규모에 대한 감탄이 묻어난다.




노 前대통령 국민장(國民葬) 조문객 수는 총 500만여 명. 노 前대통령의 고향인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만 약 100여 만 명의 조문객이 다녀갔다. 그러나 채 석 달이 지나지 않은 지난 18일 서거한 김 前대통령의 국장(國葬) 조문객 수는 70만여 명.



단순히 숫자만 놓고 보자면 국민장 보다 한 단계 높은 국장의 신세가 초라하다. 지난 1979년 박정희 前대통령 국장 당시 정부 추산 조문객 수는 무려 1천979만여 명. 조문객 동원 논란 등으로 부푼 거품을 감안하더라도 어마어마한 숫자다.




노·김 前대통령 추모객 7배 이상 차이···서거 원인 주 배경




이처럼 두 前대통령의 장례기간 조문객 수에 큰 차이가 나는 데에는 서거 원인, 서거 당시의 국내 정서 등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먼저 노 前대통령의 경우 갑작스레 스스로 목숨을 끊어 큰 충격을 안겼다. 또한 노 前대통령은 ‘박연차 게이트’ 관련 수사로 現정부의 정치보복, 검찰의 강압수사 등 크고 작은 논란을 증폭돼 정부와 여당에 대한 반감이 최고조에 이른 상태에서 서거해 파장이 컸다.



반면 김 前대통령은 서거 당시 86세의 고령이었던 데다 폐렴 등 건강악화로 인한 입원소식이 수 차례 언론을 통해 보도돼 국민들은 비교적 담담한 분위기 속에 그를 떠나 보낼 수 있었다.




대통령 재임 시절 업적에 대한 논란도 거국적 추모 분위기를 이끌어 내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분석된다. 특히 당시 ‘국민의 정부’가 주도했던 대북화해정책은 찬반논란을 낳으며 여론분열 양상을 띠었다.


전북 C대학에 재학 중인 대학생 Y씨는 “경직된 남북관계를 풀어나갈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며 ‘햇볕정책’을 김 前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았다. 실제 김 前대통령은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냈고, 남북화해를 위한 노력을 인정받아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업적이라 불리는 햇볕정책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이견이 존재한다. 상당수 햇볕정책 비판론자들은 이른바 ‘퍼 주기’식 대북정책이 북한의 ‘간’을 키웠다는데 동의한다. 핵 문제를 배제한 채 진행된 각종 논의와 원조가 굶주린 북한의 배를 채웠고 미사일 발사와 핵 실험 등 대남, 대미 도발의 도화선이 됐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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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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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사는 아파트에서는 관리소 방송이 조기를 달자고 수차례 호소했지만 그 숫자는 1%도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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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TV를 통해 영결식장의 의자를 눈 여겨 보았다. 눈대중으로 보아도 3분의2가 비어있었지만, 조선일보는 2만여 명이라고 부풀렸다. 24,000개의 의자를 놓았는데 2만 명 이상이 앉았다면 저렇게 텅 비어있을 리 없다.


필자는 방송을 따라다니면서 연도에 사람들이 있는가를 보았다. 필자가 보기에는 썰렁한 거리였는데 무슨 애도하는 시민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서울시청 앞에도 겨우 17,000명 정도가 모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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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먹구구





박정희 분향 2000만 : 노무현 분향 500만

= 4 : 1

인구보정 5.2 : 1






이승만 장례 인파 경찰 100만 : 노무현 18만

= 5.6 : 1

인구보정 경제교통보정 20 : 1





노무현 조문 500만 : 김대중 조문 70만

= 7 : 1





종합하면,


이승만 : 박정희 : 노무현 : 김대중


= 140 : 36 : 7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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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2월호 月刊朝鮮



[編輯長의 편지] 「역사의 십자가를 지신 어린 羊」 李承晩할아버지,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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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月刊朝鮮」(monthly.chosun.com)이 실시한 「20세기 한국의 대표인물」 설문조사에서 朴正熙가 20명의 후보자들 가운데 과반수의 득표로써 1위를 차지했고 2위는 金九(김구), 3위는 金大中(김대중)이었습니다. 그런데 李承晩의 득표율은 1%에도 미달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姜英勳(강영훈)-南悳祐(남덕우)-盧在鳳(노재봉) 세 전 총리의 좌담에서 세 元老는 『20세기 한국인의 최대 성취는 민족국가 건설이며 대표인물은 李承晩, 朴正熙 두 분인데 우열을 가리기가 어렵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20세기 한국의 前半部(전반부)를 대표하는 분은 독립 건국운동의 지도자였던 李承晩, 후반부는 조국 근대화의 旗手(기수)였던 朴正熙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저나 전 총리 세 분 같은 기성세대와 젊은 네티즌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생각이 왜 이렇게 큰 격차를 보이고 있는 것일까요.




李承晩은 金九 지지자들과 金日成 지지자들로부터 남북 분단의 책임자란 협공을 너무 오랫동안 당해왔습니다. 몇년 전 한 여론조사에선 대학생들 사이에서 李承晩의 인기가
2019-05-05 23:29:04
211.169.1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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