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싸와라! 나의 사랑하는 2,300만 동포여!
icon 싸와라! 나의 사랑하는 2,300만
icon 2019-05-01 14:13:55  |   icon 조회: 424
첨부파일 : -
이승만 연설 모음


항일 단파방송 (1942년 6월 13일)


* 청취

http://이승만기념관.com/bbs/board.php?bo_table=mov&wr_id=20







나는 이승만입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해내, 해외에 산재한 우리 2,300만 동포에게 말합니다. 어데서든지 내 말 듣는 이는 자세히 들으시오. 들으면 아시려니와 내가 말한 것은 제일 긴요하고 제일 기쁜 소식입니다. 자세히 들어서 다른 동포에게 일일이 전하시오. 또 다른 동포를 시켜서 모든 동포에게 다 알게 하시오.


나 이승만이 지금 말하는 것은 우리 2,300만의 생명의 소식이요, 자유의 소식입니다. 저 포악무도한 왜적의 철망, 철사 중에서 호흡을 자유로 못하는 우리 민족에게 이 자유의 소식을 일일이 전하시오. 감옥 철창에서 백방 악형과 학대를 받는 우리 총애 남녀에게 이 소식을 전하시오. 독립의 소식이니 곧 생명의 소식입니다.



왜적이 저의 멸망을 재촉하느라고 미국의 준비 없는 것을 이용해서 하와이와 필리핀을 일시에 침략하야 여러 천 명의 인명을 살해한 것을 미국 정부와 백성이 잊지 아니하고 보복할 결심입니다. 아직은 미국이 몇 가지 관계로 하야 대병을 동하지 아니하였으매 왜적이 양양자득하야 온 세상이 다 저희 것으로 알지마는 얼마 아니해서 벼락불이 쏟아질 것이니 일황 히로히토의 멸망이 멀지 아니한 것을 세상이 다 아는 것입니다.



우리 임시정부는 중국 중경에 있어 애국 열사 김구, 이시영, 조완구, 조소앙 제씨가 합심 행정하야 가는 중이며, 우리 광복군은 이청천, 김약산, 유동열, 조성환 여러 장군의 지휘하에서 총사령부를 세우고 각방으로 왜적을 항거하는 중이니, 중국 총사령장 장개석 장군과 그 부인의 원조로 군비·군물을 지배하며 정식으로 승인하야 완전한 독립국 군대의 자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미주와 하와이와 멕시코와 큐바의 각지의 우리 동포가 재정을 연속 부송하는 중이며, 따라서 군비·군물의 거대한 후원을 연속히 보내게 되리니, 우리 광복군의 수효가 날로 늘 것이며 우리 군대의 용기가 날로 자랄 것입니다.

고진감래가 쉽지 아니하나니 37년 간을 남의 나라 영지에서 숨겨서 근거를 삼고 얼고 주리며 원수를 대적하던 우리 독립군이 지금은 중국과 영·미국의 당당한 연맹군으로 왜적을 타파할 기회를 가졌으니 우리 군인의 의기와 용맹을 세계에 드러내며 우리 민족의 정신을 천추에 발포할 것이 이 기회에 있다 합니다.



우리 내지와 일본과 만주와 중국과 서백리아 각처에 있는 동포들은 각각 행할 직책이 있으니 왜적의 군기창은 낱낱이 타파하시오. 왜적의 철로는 일일이 타상하시오. 적병의 지날 길은 처처에 끊어 버리시오. 언제든지 어데서든지 할 수 있는 경우에는 왜적을 없이해야만 될 것입니다.



이순신, 임경업, 김덕령 등 우리 역사의 열렬한 명장, 의사들의 공훈으로 강포·무도한 왜적을 타파하야 저희 섬 속에 몰아넣은 것이 한 역사에 한두 번이 아니었나니 우리 민족의 용기를 발휘하는 날은 지금도 또다시 이와 같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지에서는 아직 비밀히 준비하야 숨겨 두었다가 내외의 준비가 다 되는 날에는 우리가 여기서 공포할 거이니 그제에는 일시에 일어나서 우리 금수강산에 발붙이고 있는 왜적은 일제히 함몰하고야 말 것입니다.



내가 워싱턴에서 몇몇 동포와 미국 친구·친우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 정부와 교섭하는 중이매 우리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을 날이 가까워 옵니다. 승인을 얻는 대로 군비·군물의 후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희망을 가지고 이 소식을 전하니 이것이 즉 자유의 소식입니다.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 씨의 선언과 같이 우리의 목적은 왜적을 파한 후에야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백배나 용기를 내야 우리 민족성을 세계에 한번 표시하기로 결심합시다. 우리 독립의 서광이 비치나니 일심 합력으로 왜적을 파하고 우리 자유를 우리 손으로 회복합시다.



나의 사랑하는 동포여!


이 말을 잊지 말고 전파하며 준행하시오. 일후에 또다시 말할 기회가 있으려니와 우리의 자유를 회복할 것이 이때의 우리의 손에 달렸으니 분투하라! 싸와라! 우리가 피를 흘려야 자손 만대의 자유 기초를 회복할 것이다. 싸와라! 나의 사랑하는 2,300만 동포여!









........................................................................................


전쟁 중 엄격한 보도 관제를 뚫고 외부 소식을 얻는 길이 단파 방송에 있었는데, 1942년 말 경성방송국과 개성방송국의 단파 방송 청취 적발로 불거진 이 사건에 여운형, 허헌, 백관수, 함상훈 등 해방 후 건준과 한민당의 주역이 될 인물들이 폭넓게 연루되었다. 사건의 핵심 당사자였던 송남헌은 이렇게 회고했다.



1942년 6월경 샌프란시스코에서 이승만 박사가 흥분한 목소리로 "2500만 동포들이여 조국 광복의 날이 멀지 않았으니 동포는 일심협력하여 일제에 대한 일체의 전쟁 협력을 거부하고 때를 기다리라"고 한 연설을 나는 직접 들었다. 이 방송을 들은 나는 가슴이 마구 뛰었고, 흥분해서 변호사 사무실로 달려가 그대로 전했다. 내가 전하는 말을 듣고서 모두가 금방 독립이라도 되는 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이 말은 곧 시내로 퍼져나갔다. (심지연, <송남헌 회고록>(한울 펴냄), 40쪽)



이승만은 1942년 6월에서 7월에 걸쳐 몇 차례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을 행했고, 독립을 간절히 바라던 국내 사람들의 귀에 그의 목소리가 독립의 희망과 겹쳐져 울렸던 것이다.

..............................................................................................







........................................................................................


1. “나는 이승만입니다.”



광복절이 돌아올 무렵이면 생각나는 것의 하나가 1942년 6월에 행한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의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이다. 카세트테이프로 듣는 쩌렁쩌렁한 육성은 예순일곱살의 그때의 그의 나이를 의심하게 한다.


“나는 이승만입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해내 해외에 산재한 우리 2천300만 동포들에게 말합니다.…자세히 들어서 다른 동포들에게 일일이 전하시오. 또 다른 동포를 시켜서 모든 동포에게 다 알게 하시오.…”


그는 일본이 패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말하고,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활동을 소개한 다음, 자신은 미국 정부와 임시정부 승인문제를 교섭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국내와 아시아 지역에 있는 동포들에게 다음과 같은 일을 하라고 촉구했다.


“왜적의 군기창은 낱낱이 타파하시오! 왜적의 철로는 일일이 파상하시오! 적병의 지날 길은 처처에 끊어버리시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할 수 있는 경우에는 왜적을 없이해야만 될 것입니다.…나의 사랑하는 동포여…우리의 자유를 회복할 것이 이때 우리 손에 달렸으니, 분투하라! 싸워라!…”



그것은 게릴라 활동의 선동이었다. 이 무렵 이승만은 철도에 폭파할 만한 터널이 있는 지점을 표시한 한국 지도를 들고 미국무부 관리들과 국회의원들을 만나고 다녔다. 한국인 게릴라들이 무장활동을 할 수 있도록 무기대여법(Lend Lease Act)에 의한 무기원조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이 단파방송은 국내에서도 들은 사람이 많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다가 투옥된 사람도 있었다. 게중에는 전 󰡔동아일보(東亞日報)󰡕정치부 기자였던 홍익범(洪翼範)처럼 광복의 새벽을 보지 못하고 옥사한 사람도 있었다.

.........................................................................................

[ 2009-08-03 ]

http://chogabje.com/board/print.asp?c_idx=28501&c_cc=AZ

李承晩과 金九를 생각한다.
10만원권에 두 사람 초상화 함께 넣자.

孫世一







..........................................................................................


그러다 1940년대 들어 일제가 라디오 방송을 전쟁 선전의 도구로 활용하고 '외국 단파방송 청취 금지령'으로 정보통제에 나서자 한국인들은 올바른 정보에 더욱 목말라했다. 이때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온 것이 '미국의 소리(VOA; Voice of America)' 한국어 방송이었다. 미국전쟁정보부 샌프란시스코 사무소에 본부를 둔 VOA는 자유의 소리와 세계뉴스를 통해 2차 대전의 전황 등 최신 정보를 제공했다. 이는 한국 내 일부 수신자를 중심으로 일반에게 확산됐고 중국의 충칭 임시정부와의 연락 도구가 되기도 했다.



당시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1942년 6월 13일 부터 7월까지 VOA 육성방송을 통해 "싸워라, 나의 사랑하는 2300만 동포들이여"라고 외쳤다. 방송국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들도 위험을 무릅쓰고 VOA를 들으며 저항정신을 키워 갔다. 1942년 12월 경성중앙방송국에 근무하던 기술직원 2명이 단파방송을 듣다 고등계형사에 적발된 것을 계기로 방송인과 정객, 민간인 등 300여명의 한국인이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단파방송 밀청 사건'이다.

.......................................................................................





단파방송밀청사건(短波放送密聽事件)


언론·방송사건



일제강점기 말기 방송국에 근무하던 직원들을 중심으로‘ 미국의 소리(VOA)’와 중경의 임시정부에서 보낸 단파 방송을 청취하여 전황을 비밀리에 전파하다가 많은 사람이 체포당했던 사건.


일제강점기 말기 방송국에 근무하던 직원들을 중심으로‘ 미국의 소리(VOA)’와 중경의 임시정부에서 보낸 단파 방송을 청취하여 전황을 비밀리에 전파하다가 많은 사람이 체포당했던 사건.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총독부는 「외국 단파방송청취 금지령」을 공포하고 그 단속을 강화했다. 그러나 경성방송국에 근무하던 성기석(成基錫)·이이덕(李二德) 등 한국인 기술 직원들은 1940년 무렵부터 국내 보도방송의 중계를 위한 동경의 단파방송을 수신하다가 중경방송국에서 임시정부가 보내는 한국어 방송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신되는 ‘미국의 소리’를 몰래 듣기 시작하였다.



단파방송 밀청자의 수는 차츰 늘어났고 이들의 입을 통해서 전황이 퍼져나갔다. 그러나 이들은 1942년 말부터 일제 고등경찰에 적발되어 현업 기술자를 주축으로 하여 아나운서, 편성원 및 조선방송협회 산하에 사업부 소속 공사과, 보수과 그리고 주지과(周知課) 직원들이 일본 경찰에 대량으로 검거되었다.



개성송신소에 근무하던 이이덕·성기석·김동하·홍익범(洪翼範) 등이 1942년 12월 말에서 이듬해 초에 걸쳐 검거되었고, 이어서 경성방송국에도 검거선풍이 불었다. 이 사건으로 경성방송국 안에서만 아나운서·편성원·기술계직원 등 약 40명이 체포되었고, 각 지방 방송국까지 합치면 150명 가까운 한국인 방송인들이 검거되었다.



이 밖에도 정객과 민간인으로 끌려간 150여 명을 합치면 300여 명이 이 사건에 관련되어 수난 당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에게 적용된 법령은 1941년 12월 26일에 제정 공포된 「조선 임시보안령」을 비롯하여 「사설 무선전신전화법」·「사설 방송용전화법」·「육군형법」·「해군형법」·「보안법 및 치안유지법」 등이었다.



이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은 모두 75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대부분이 방송국 직원이었지만 방송인 아닌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장 무거운 형을 받은 사람이었던 홍익범은 《동아일보》가 폐간 당하기 전에 기자였던 사람이고, 허헌(許憲)도 《동아일보》와 관련이 있던 변호사였으며, 경기현(景棋賢)은 의사였고, 문석준(文錫俊)은 조선일보 영업국장을 지낸 사람이다.


이 밖에도 함상훈(동아일보, 조선일보 편집국장 역임), 국태일(동아일보 영업국장), 백관수(동아일보 사장) 등 동아일보 계통의 거물급 언론인이 증인신문을 받았다. 이 때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이미 폐간된 뒤였다.


아나운서 중에는 송진근·이계원·손정봉·서순원·이현·박용신·서정만이 구속되었다가 송·손·박 세 아나운서가 실형을 선고받았다. 편성계통에서는 이서구·모윤숙·김동익·김정관 및 양제현이 체포되었으나 양제현만 유죄판결을 받았다.



기술계에서도 많은 직원들이 체포되었는데 이이덕·성기석·김동하·염준모·박도신 등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은 일제하의 방송이 일인 주도로 시작되었고 1930년대로 넘어오면서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대변하고 침략의 도구로도 활용되었으나, 방송국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이 살아있었음을 보여 준다.









단파 방송 밀청 사건 대담 - 1992년 8월 29일 - 서울 (노시창)





대담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 개시 50주년 기념 특집.

방송일 1992년 8월 29일

참석
송 남원 전 경성 방송 작가
조 종국 전 경성 방송국 엔지니어
유 병헌 방송사 연구가
문 시형 방우회 회장
사회 노 시창
대담 녹음 서울 롯데 호텔







엠씨 오늘 8월 29일로 방송 개시 50주년을 맞은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은 지난 반세기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정확하고 객관적인 뉴스를 전함으로써 격변의 세월을 살아온 한국인들에게 귀중한 소식원이 되어왔습니다. 특히 일본의 한반도 식민 통치 기간중 세칭 단파 방송 밀청 사건이 일어났었는데 이 사건은 당시 방송 관계자들이 일본이 전쟁에 지고 있다는 미국의 소리 뉴스를 통해 몰래 듣고 이를 외부에 전파하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돼 다수가 검거되고 고문과 징역형을 살아야했던 사건입니다. 이 시간에는 한국의 방송사 연구가 유병헌씨와 밀청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송남원씨, 조종국씨, 그리고 문시형 방우회 회장으로부터 당시의 회고담을 듣는 특별 순서를 마련했습니다. 대담에 노시창 기잡니다.



노 유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먼저 이 사건이 어떻게 발단이 됐는지부터 설명을 해주십시오.



유 출발은 기술진이 좀 했죠. 그리고 단파 수신기를 조정할 수 있는, 단파 수신기를 만질 수 있는 사람은 기술자 밖에 없었으니깐. 이 단파 방송 연락 운동 그 자체는 기술자에 의해서 출발이 됐다고 확정을 짓고 싶습니다.


노 그런데 그런 분들이 그 방송을 듣고 자기들만 알고 있었으면 그 이상 문제가 없었을 수도 있었는데요. 그것이 외부로 퍼져 나감으로써 그 때 당시에 집권층에 위협이 되고 불안의 요소가 됐을텐데… 어떻게 해서 번져나갔고 그것이 누구한테 번져나갔는지요.


유 저도 그런 내용의 방송을 간혹 밀청한 사람인데 그런 방송을 들으면요, 얼른 얼굴이 하얗게 변합니다. 가슴이 막 떨립니다. 옆에 있는 일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생각하면 굉장한 공포에 떱니다. 또 그런 내용을 듣고 집에 가서 이불 속에서 자기 부인, 친아버지 이런 분들한테 그런 얘기를 끝까지 감출 수가 없어요. 우리 한국이 일본 식민지에서 해방이 되고 모든 외국에서 우리 독립을 도와주고 이승만 박사가 가서 독립 운동하고 온다는 사실을 알려 올때는 한국 민족은 가만히 참을 수가 없죠. 그런데 그 말을 집에 가서 은밀하게 이웃에 퍼지고 독립 운동하는 애국자들에게 퍼지고 이렇게 된거죠.


노 네. 그러면 잠시 그와 같은 단파 방송의 내용을 외부애 전파하신 역할을 하신 송남원 선생님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송남원 선생님은 그 사건으로 인해서 혹독한 옥고도 치르시고 그러셨는데요.


송 그 당시, 40년때부터 시작해서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전부 없어지고 또 국내에는 일본 사람들이 한국 말을 못 쓰고 한국 글을 못 쓰고 전부 일본 말을 하라고 하고 일본 글을 쓰라고 할때, 서울 중앙 방송국 HLKAJE 방송이라고 하는데서는 한국 말을 주로 방송했기 때문에 거기에다가 소설도 쓰고 또 연극 같은 것도 하고 아동극 같은 것도 해서…나는 여느 작품을 쓰기 때문에 방송국 직원들과 가까이 지내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그것이 하나의 기초가 되어가지고 세계의 돌아가는 또 연합국의 승리 또 일본 군국주의의 패전에 진상을 알게 되서 그 진상을 갖다가 그 당시에 독립 운동 선상에 있던 김병노씨라던지 이일씨라던지 또 윤보선씨라던지 또 송진우씨라던지 기타 서울 안에 있던 항일 클럽에다가 이 사실을 전달을 해서 결국은 건국 준비에 이바지하도록 그렇게 하다보니, 결국은 그것이 실제로 활동을 제일 중추적으로 하시던 분이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 있던 홍익범씨올시다. 홍익범씨는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의 콜럼비아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끝내고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를 하다가 동아일보가 폐간됐기 때문에 그 때부터는 시간 여유가 상당히 많아서 나하고 매일 같이 만나게 됐고, 또 이 VOA를 통해서, 또 서울 중앙 방송국의 기술자 여러분들이 제공을 해주는 그 방송 내용을 홍익범씨가 다시 김병노씨라던지 이일씨라던지에게 전달하게 되는 이런 과정을 통해가지고 활동을 하다가, 42년 12월경에 일본 경찰에 이것이 발각이 되가지고 수백명이 구속을 당하고, 그러고 20여명이 유죄 판결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해방이 되서 모두 나오게 됐습니다.




노 이번에는 일본 사찰 당국의 반응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이렇게 외부로 번져나가게 된 것을 알고 나서 그 일본 당국에서는 어떤 조치를 취했습니까


유 일본에서는 경찰이 방송국 직원, 한국 사람의 뒤를 미행하는거죠. 감시를 당하는거에요. 또 때에 따라서는 헌병대도 방송 직원의 가택 수색을 한다던지, 추적을해 따라다닌다든지 그런 감시 속에서 경성 방송국의 한국 사람들 직원들은 살아야했습니다. 그런데 눈초리가 그 끈덕진 추적, 여기에는 완전히 끝까지 비밀이 보장됐어야될 이 사건이 결국은, 뭐 사람이라는건 부주의 할수도 있는거고 또 은밀하게 얘기하는 것을 옆에서 그 잠복했던 사복 경찰관이 들을 수도 있는 얘기고, 그래서 이게 새나가게 된거에요.


그래가지고 일망타진이라는, 참 중앙 방송국에서만 40명, 전국 방송국 직원 중에서 약 150명, 이거 방송국 직원만 관계된 사건이 아니거든요. 종교 지도자, 정치 지도자, 국내에서 독립 운동하던 사람들, 의사, 변호사, 뭐 각계각층이 망란된 사람들의 의해서 이 단파 방송 청취 연락 운동이 전개됐었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체포되고 또 체포를 해서 갖다가 이 사람들을 그냥 순수하게 다루는게 아니라, 혹독한 고문을 합니다. 네. 제가 쓴 책에 고문 내용이 나와있지만 지금 여기 계신 송남원 선생, 조종국 선생, 이 분들 모두 정말 지금 살아있지만 그때 다 죽었어야 될 사람들입니다. 말못할 고문을 뭐 한두가지가 아니라 전기 고문, 물고문, 고춧가루 고문, 뭐 말 할수 없는 고문을 당하고, 고생을 다한 사람들입니다.




노 그리고 징역형도 사신 분들도 많이 계셨을텐데요.

유 그렇죠. 방송국 직원 송기석씨 같은 경우엔 2년 징역 언도를 받아가지고 미결 기간이 9개월, 징역 언도가 2년, 그러니깐 2년 9개월의 언도를 사는셈인데, 8.15해방이 뜻밖에 빨리 왔단 말이에요. 그래가지고 형기를 40일 남겨 놓은채 서대문 형무소의 문을 박차고 나온 사람들입니다. 이 얼마나 민족적인 절규가 이루어진 순간입니까 이게 모두가 VOA 방송을 통해서 보내주는 그 참 뼈다귀 있는 애국의 소리, 민족의 소리, 혁명의 소리, 희망의 소리 방송이,,, 이승만 박사가 그대로 얘기한거에요. ‘이 방송은 혁명의 소리요. 희망의 소리올시다. 1000명에 한사람이 듣더라도 듣는 사람은 전하시오’. 이렇게 얘기한거에요. 그리고 인제 또 그것 뿐만이 아니라 중경에서 김구 선생이 독립 운동 하면서 중경 방송국을 통해 마찬가지로 보내왔다구. 그러니깐 듣는 사람이 도저히 이건 흥분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거에요. 그래서 이렇게 이루어진게 단파 방송의 전모가 되는거에요.




노 옥살이를 하는 도중에 돌아가신 분도 계신가요

유 돌아간 사람이 문헌에는 여섯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어요. 거기서 뭐 각계각층에 있는 사람들이 다 희생이 됐는데 많이 때리고 많이 고문하고 해서 죽어야 됐겠습니까 이 이희덕씨라는 분도 결국 끝내 소생을 못하고 미국 시민이었지만 죽어버리고 만거에요.




노 어려웠던 당시에 그 사정을 조종국 선생님으로부터 들어보겠습니다. 당시에 engineer셨는데 단파 수신기를 제작해서 보급했던 분으로 일경으로부터 아주 심한 그런 고통을 받으셨는데, 앞서 말씀 드린 송남원 선생님께서도 물론 많은 고통을 당하셨고요. 조종국 선생님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많이 조사를 당하고 하셨는데요…


조 아… 고문은 무척 당했어요. 한 6개월 간, 경찰부에 있었는데 나중에는 죽고 싶더군요. 어떻게 고문을 하는지… 그냥 뭐 물을… 물고문이죠. 말하자면… 하루에 한번씩 꼭 불러다가 물고문을 했어요. 그러니깐 뭐 자살하고 싶은 생각 밖에 안나요.

노 이 물고문이라는건 코에다 물을 붓고…

조 코에다 물 붓고 수건 뒤집어 씌우고 물을 붓고 이러는데… 하여간 뭐 그야말로 지옥 같더군요.




노 네. 지금까지 조종국 선생님의 말씀이셨습니다. 참고로 말씀 드리면 이 조종국 선생님은 독립 운동으로 지금 이 단파 방송 사건으로 인한 독립 운동으로 건국 훈장을 받으신 바 있습니다. 이 사건이 최근에 와서 이젠 단순한 방송국의 사건이나 뭐 지역적인 사건이 아니고 하나의 그 독립 운동이었다는 그 평가를 받고 있는데요. 지금까지 죽 방송사를 연구를 해오시면서 이 사건의 그 역사적인 평가를 선생님은 어떻게 내리고 계십니까


조 제가 왜정 시대부터 방송에 근무했기 때문에 이 사건에 대한 윤곽을 알고 있었고 일본 사람들이 패전해 갈때에 여기에 관계있는 서류 이런걸 다 막 불태워서 없애 버렸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하든지 이문제만은 밝혀 보겠다고 수십년 고생을 했어요. 그래서 있는, 공부한 그대로 자료 그대로를 가지고 1988년에 방송 센터에서 제가 주제 발표를 했습니다. 발표를 하니깐 각계에서 이것은 참 놀라운 얘기다. 이것은 정말 독립 운동이다. 그래서 제가 용기를 가지고 여기에 대한 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참 말이 그렇지. 일본 사람들의 총칼이 얼마나 무서웠습니까 그 앞에도 굴하지 않고 씩씩하게 방송 직원들이 싸워서 또 옥고를 치르면서도, 훤히 알죠. 아. 멀지 않아서 일본 놈들이 다 지고 갈것이다. 이런 얘기를 예상하면서 형무소에서 옥고를 참아 넘기면서 며칠 형기를 남기고서 8.15 해방이 되서 형무소 문을 자기들이 열고 나왔다는 사실, 이건 참 감격적인 얘기죠.

......................................................................................
2019-05-01 14:13:55
211.169.12.221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