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달구지를 따라 덤재를 내려갔다. 한대리 앞을 지나갔다. 장흥 땅으로 들어섰다. 신작로는 탐진강 물굽이를 따라 휘어졌다. 신풍마을 앞을 지나쳤다.
유치의 면소재지인 송정마을을 빠져나왔다. 냇물 가운데에 있는 금사쟁이를 바라보며 후미거리를 휘돌아 걸었다. 단산마을 지나 보름모퉁이 다다랐다.
탐진강 건너편에 갓골마을이 보였다. 신작로 옆에 있는 물레방아에서는 물레가 돌아가며 쿵덕쿵덕 방아를 찧고 있었다. 대리 앞 다리를 건너서 빈재의 자드락길로 들어섰다.
구불구불한 잿길을 돌아갔다. 비탈을 오르니 빈재 꼭대기였다. 발을 멈추고 빈재들을 내려다보았다. 꿈을 꾸어오던 새로운 희망의 나라를 찾아 들어가고 있었다. 골짜기의 들을 빠져나온 시원한 바람을 마음껏 들이마셨다.
‘자주 다녔던 길인데 오늘은 유난히 새롭게 느껴지는 구나.’
운현은 빈재를 내려가면 걸어왔던 길을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궤적을 다시 더듬었다. 모두 지워버리고 싶은 지나온 발자국들이었다. 그런데 더욱 선명하게 다가와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눈에서는 눈물방울이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달구지는 빈재를 내려간 양지편 마을로 휘어들었다.
‘양지편은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희망의 새 터전이다.’
운현은 동네 앞에 있는 남산을 바라보았다. 하늘 높은 곳에 흰 구름이 두둥실 떠가고 있었다. 산들은 봄맞이 하려고 푸른 연두색의 진솔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양지쪽에 자리한 마을처럼 아늑한 행복을 찾게 될 거야.’
운현은 시선을 뒷동산으로 돌렸다. 자드락에 있는 대밭이 마을을 어머니의 치마폭처럼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대나무 사이에 있는 동백나무에는 동백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개천가에 있는 은행나무는 어서 오라고 손짓하네. 동네 앞에 있는 팽나무는 잘살아보라고 하며 수호신처럼 서서 반겨주는 구나.’
운현은 발을 멈추었다. 팽나무의 우듬지에 앉아있던 멧비둘기 두 마리가 뒷동산으로 날아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뻐꾸기의 노랫소리가 끼끗한 맑은 물을 뿌려대듯이 산울림이 되어 보끼미 들녘으로 흘러갔다. 꾀꼬리는 호들갑을 떨며 반갑다고 소리쳤다.
‘여기가 나와 후손이 살아갈 터전이다. 자식들을 많이 낳고 교육을 잘 시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면….’
운현은 양지편을 바라보며 꿈의 날개를 활짝 펴보았다. 마음은 수리봉으로 날아가 바위 부리 위에 앉아있었다. 사위를 둘러보며 세상을 품에 안았다.
‘자식들의 교육이 제일 중요하다. 재산이야 없다가도 있고 많이 가졌다가도 잃어버리게 되니까.’
운현은 자신이 살아갈 목표를 곱씹었다. 집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다시 결심했다. 자식들만은 제대로 길러 교육시켜서 올바른 사람으로 만들어야 되었다. 그렇게 되면 다른 모든 것은 저절로 해결 될 것 같았다. 자신이야 어떻게 되든 후손의 미래를 생각했다. 삶의 목표가 정해졌으니 실천하는 일만 남았다.
‘잘 될 거야.’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이 웃었다.
“내 꿈을 이룰 터전!”
운현은 뒤를 돌아보았다. 재암산과 사자산이 성큼 다가와 가슴에 안기었다. 위골이 위쪽에 있는 수리봉의 멧부리에서는 독수리가 내려다보며 비상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3
뒷동산에서 내려온 꾀꼬리의 노랫소리가 마을 위에서 맴돌았다. 꿩도 목청을 가다듬으며 소리쳤다. 마을 뒤 산자락에 있는 대밭 속에는 복사꽃이 피었다.
동백나무거리에는 동백꽃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가로수로 서있는 신작로 가의 벚꽃은 흐드러지게 피어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했다. 봄볕은 명주비단처럼 부드러웠다. 따뜻해 솜이불 덮어놓은 것 같았다. 남산 밑 밭에는 아지랑이가 너울거리며 춤을 추었다.
보끼미 들녘에서는 종달새가 지저귀며 봄맞이의 창가를 불렀다. 탐진강을 스쳐 지나온 명지바람이 봄 처녀의 가냘픈 손길처럼 어루만지며 지나갔다.
“오늘 새로 이사 온 나주양반 집에서 성주받이 궂을 한다고?”
“성주받이를 한 것이 아니라 이사를 왔으니까 동네사람들에게 술 한 잔 대접할 모양이야.”
“신고식을 하는 건가?”
“신고가 아니라 얼굴도 익힐 겸 해서….”
“택호가 나주양반이라고 하는 걸보니 나주에서 이사 왔어?”
“나주가 아니라 영암 금정이라고 하던데.”
“김 씨네 도갓집 사위라고 했지?”
“맞아. 유기그릇 장사를 하려고 처가동네로 왔다고 하던데.”
“장인이 놋갓점을 하니까 도와주겠네.”
“아무래도 남보다야 낫겠지.”
“처갓집이 있으니 이사 왔을 것이고….”
“어째든 타관에 와서 살아가려면….”
“오직해서 왔겠어. 우리가 도와주어야지.”
“처가 동네데 무슨 객지야.”
“처가는 멀리 두라고 했는데….”
“비빌 언덕을 찾아서 왔겠지.”
“식구가 많다고 하던데.”
“십여 명이 된다고 들었어.”
동네사람들이 고샅을 지나가면서 한 마디씩 했다. 새로 이사 온 집을 찾아가고 있었다. 사립문을 들어갔다. 먼저 온 사람들은 마당에는 멍석을 깔아놓고 두레상에 둘러 앉아 떠들어대면 술잔을 주고받았다. 조촐한 음식으로 게걸스럽게 먹으며 이사 온 것을 축하했다.
“어서 오십시요.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운현은 손님을 받아 한 쪽에 자리를 마련하였다.
“당연이 와야지요. 이웃사촌인데.”
사람들이 생글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두리반 위에 적지만 푸짐한 먹을거리가 놓여있었다. 주전자가 나오고 잔에 막걸리가 채워졌다. 떠드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집 안에 가득했다. 복 받으라고 한 마디씩하며 즐겁게 먹었다.
“찾아 와주신 것 감사합니다.”
운현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이사 온 걸 환영합니다.”
누군가가 박수를 쳤다. 다른 사람들도 합세하여 손뼉을 쳤다.
“저는 배운 것도 부족하고 가진 것도 없습니다. 잘 지도해주시고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먹을거리는 없지만 정성을 드려서 조촐하게 마련했습니다. 푸닥지다고 생각마시고 맛있게 드셨으면 합니다.”
운현은 언행을 겸손하게 하여 조심했다. 첫 인상이 중요하기 때문에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었다. 타관생활이라 텃세가 심하리라는 것은 각오하고 있었다. 인간의 심리가 그랬다.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팠다. 그런 심술은 누구에게도 있었다. 도우며 살아가는 것이 더 좋은 일이기에 시기심을 자제했다.
“이만하면 푸져. 푸닥지긴.”
“많다고 좋은가. 마음이 푼푼하면 풍성하지.”
“이만하면 진수성찬이요.”
여기저기서 답례로 한 마디씩 했다.
“막걸리가 적으면 주조장에 있으니 걱정 마시고 마음껏 드십시오.”
운현은 말이라도 배부르게 대접했다.
“젊은 주인장, 아니 택호가 나주양반이라고 했지. 나주양반 이리 와 술 한 잔 해.”
“저는 술 못합니다. 그렇게 아시고 제 술 한 잔 받으십시오.”
운현은 주전자를 들고 돌아다니며 술을 따랐다. 신명이 나서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 옆집 감나무 가지에는 참새들이 모여 앉아서 조잘거리며 기웃거렸다.
멧비둘기도 마을 위를 돌아다니며 축하해주고 있었다. 재비가 찾아와 빨랫줄을 받히고 있는 바지랑대 위쪽 끝에 앉아 마당을 둘러보았다.
뒤란의 텃밭에서는 암탉이 병아리들을 데리고 다니며 나들이했다. 마을 앞 대밭에서는 꾀꼬리는 노래하고 뻐꾸기는 장단을 맞추었다.
산토끼는 남산 밑 논에서 파랗게 자란 보리 잎을 뜯어먹었다. 까투리는 꺼병이를 데리고 쏘다니며 먹이를 찾았다. 뒷동산 산마루 위에는 매 한 마리가 선회하면 내려다보고 있었다.

